소셜 미디어 사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 필요시 로그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종종 ‘몇 년 전 오늘’ 제가 올렸었던 사진이나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최근 우연히  ‘9년 전’ 제가 올렸던 어떤 사진 한 장이 이런저런 일로 마음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제 눈에 덜컥 띄어 버렸습니다. 혹시 학창 시절 큰 맘먹고 시작한 책상 서랍 정리 중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진이나 편지를 발견하고 추억에 잠기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당황하신 적이 없으신가요? 저는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옛 사진이나 편지를 발견하면 되도록  ‘추억 모드’ 스위치를 끄고 to-do-list (해야 할 일 목록)에 집중하는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제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작은 사진 한 장이 특별했던 시간 안으로 망설임 없이 저를 빠져들게 했습니다. 이상하지만 잠시나마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9년 전 사진’이라는 친절한 AI 인공지능 알고리즘 덕분에 사진 속 2013년 스페인 어느 길 위로 잠시나마 순간 이동을 하게 된 저를 보게 됩니다. 문제의 사진은 입회 전 직장을 그만두고 12킬로그램, 제 욕심만큼이나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약 800킬로미터를 33여 일 동안 혼자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중 찍힌 제 작은 발 사진이었습니다. 회계 월말 결산을 빨리 마감해야 하거나 밀린 과제나 시험 준비를 해야 할 때 왜 이런 딴짓(?)은 더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 사진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구입해서 발에 맞지도 않는 싸구려 등산화를 신고 걸으며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열을 가득 담은 마른 땅바닥만 묵묵히 바라보며 걷다 찍힌 제 발 사진 하나가 주는 후폭풍은 꽤나 세게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여느 관광지 사진처럼 멋지게 잘 찍은 사진도 아니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유영혜
한 걸음 한 걸음. ©유영혜

순례길에 관한 책자 하나만 무작정 믿으며 스페인으로 떠났던 저는 출국 단 3일 전에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부랴부랴 급하게 짐을 꾸렸습니다. 저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처음 상세히 알려주었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하느님께 보내야 했던 힘들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니 어느 새 뜨거운 순례길을 한 걸음씩 홀로 걷고 있는 제가 보이는 듯합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매일 6-8시간씩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둘째 날 피레네 산을 넘을 때 고관절을 다쳤습니다. 억지로 참고 며칠 더 걷다가 급기야 통증이 너무 심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습니다. 속도가 너무 뒤처져 아예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던 기억이 납니다. 걷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걷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며, 슬슬 뒤처지는 기분에 어느 순간 부끄럽게도 깊은 외로움과 서러움이 밀려왔고 이 길을 소개해 준 그 친구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는 왜 여기에 꼭 가 보라고 한 거였을까? 나는 도대체 여기 왜 온 거지?’

극심한 고관절 통증과 함께 겨우 멈춰 선 순례길 첫 대성당인 팜플로나 산타마리아 대성당 안에서 큰 십자가에 매우 처참한 몰골로 고통스럽게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절뚝거리며 겨우 그분 발 아래에 멈추어 천천히 예수님을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습니다. 외국이라서 그랬을까요. 남들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렇게 펑펑 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한참 동안의 눈물과 콧물이 잦아들 때쯤 에야 비로소 이곳에 왜 와야 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 팜플로나 산타마리아 대성당에서 만난 예수님. ©유영혜<br>
스페인 팜플로나 산타마리아 대성당에서 만난 예수님. ©유영혜

이제는 너무 오래 되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수도원 입회 전 어느 추운 겨울 노량진 한복판을 종종걸음으로 함께 걷다 말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소개해 주었던 그 친구는 느닷없이 저를 멈춰 세우고 제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잡더니 어리둥절해 하는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분명히 힘든 날을 겪을 거야....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리암을 정말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해. 절대로! 알았지?” ‘얘가 갑자기 뭐라고 하는 거지....?’ 피정이나 기도 모임을 하던 중도 아니었고 함께 바쁘게 길을 걷다 말고 갑자기 앞 뒤 문맥도 없이 사람을 멈춰 세우고, 그것도 해맑은 미소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10년이 훌쩍 지난 오늘 불현듯 그 친구의 말의 의미와 타이밍에 대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시간과 사건, 원인과 결과는 과거-현재-미래 한 방향으로만 흐르며 영향을 주겠지만 어쩌면 지금의 저를 도우시기 위해 과거 그 시간에 그 친구를 허락하셨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재차 물었던 그 친구의 눈빛이 아직 생생합니다. 마치 현재의 제가 어리석게도 하느님 중심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 갇혀 그분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세상과 인간사에 짓눌려 힘들어 하며 혹여나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력을 잃진 않을지 미리 염려하며 저를 미리 따스하게, 안타깝게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 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그 친구는 예언자였을까요, 아니면 천사였을까요. 천사였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겨 두고 결국 하느님께 돌아갔으니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미움과 오해를 받거나 진실에 가까운 소통도 불가능해 힘든 상황을 묵묵히 견뎌야 할 때, 또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할 때 상대나 상황을 원망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판단하려는 제 못난 모습이 보입니다. 문득,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우리 부족한 인간 군상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악의 속성에서 나오는 조롱의 말과 멸시 앞에서도 가시기로 한 길 위에 의연히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분을 닮지 못하는 부끄러운 제 모습과 그 친구의 존재, 그리고 순례길에서 만난 예수님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한 발자국씩 그분을 믿고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을 의미하는 걸까요?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면서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이 큰 동기가 되어 움직이거나 그것에 만족해 하고, 심지어 그러한 달콤한 부산물들로 살아간다는 의식도 못하고 살고 있거나, 반대로 박해나 무시를 받아 쉽게 상처받고 소중한 생명력을 잃고 있다면 그것은 또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 발 끝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존재 근원에 더 가깝게 다가가 더 이상 외부의 비 본질적 요소가 하느님께서 지어 주신 우리 각자의 고유하고 깊은 내면을 동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은총이며 신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On a daily basis) 기도해야 하는가 봅니다.

Vitality, 생명력. ©유영혜

조금은 움츠러든 제 어깨를 다독여 주며 다시 생명력으로 향하게 하는 질문에 감사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느님께서 너를,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다는 것 잊지 않고 있는 거지?’

친구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남기고 싶습니다. ‘고마워.... 깊이 사랑할게. 그리고 안녕.’

"누가 그대에 대하여 호의를 품고 있는지 반감을 품고 있는지 도무지 생각하지 마라.
늘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만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대 안에 그분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며 깊이 사랑하라.
이것이 그대가 해야 할 본분인 것이다."

– 십자가의 성 요한

유영혜(미리암)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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