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규 칼럼]

民은 약하다. 죽이려고 칼 휘두르면 꼼짝없이 죽고 만다. 그러나 지극한 그 수용성 때문에, 오히려 民의 한(恨)은 불길 되어 부활하고 만다. 몸은 죽으나 혼불은 더욱 충만하며 되살아난다. 불길로 화한 그들은 여기저기에 불 지르고 다니며 모든 권력의 칼을 녹인다. 그렇게 모든 쇠붙이가 녹아 사라진 뒤 民의 혼불은 다시 순수한 몸으로 나타나 새 세상을 낳는 불사조의 자궁이 된다. 하늘나라를 꽃피울 씨앗이 된다.

알몸의 항거이기에 더욱 무서운 民의 몸짓

民은 사회구조악의 최종적이고 직접적인 피해당사자인 까닭에 일단 그가 의식화된 상태에 처하면 생존권 차원에서 나서기에 자못 혁명적인 변혁주체가 된다. 자기생존을 위한 행동은 그 어떤 것이든 진실 되고 순수하고 거기 진정성이 있고, 빼앗기거나 버릴 기득권조차 없는 그들로선 참으로 거리낌 없는 몸짓이 된다. 그것은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거는 행동, 참으로 알몸의 항거이기에 무서운 것이다. ‘요원의 불길’ ‘노도의 물결’ 등으로 표현되는 그 몸짓! 民이 하늘이 되고 민심이 천심이 되는 때도 바로 그때이다.

사실 현대에 있어 우리 民처럼 생명을 죽이려드는 것에 대해 불굴의 의지로 수없이 항거하고 또 그것을 물리쳐 이긴 경험을 거듭 지닌 존재도 없다. 우리 民의 생명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찌하여 우리나라에서 현대세계사 최초의 반제국주의 민중혁명운동이요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기폭점이 되었던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 그것은 조선 말기 때부터 民의 가슴속에 조금씩 심어져 자라 온 하늘의 불씨들, 곧 숱한 民의 항쟁을 통한 민각(民覺), 서학의 도입과 실학의 대두를 통한 민중적인 자각, 무엇보다 동학혁명의 화두인 ‘인내천(人乃天)’이야말로 그 불씨에 기름을 당긴 꼴이 되었다.

그 뒤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들자 외형적으론 구국의 혼(魂)으로 불타올라 의병활동, 탐관오리·부패척결, 외세배격·자강운동, 새로운 종교운동 등등으로 표현되며 그들 자신을 불태웠으나, 그 모든 몸부림은 결국 그로부터 최소한 백년은 걸리게 될 길고도 거대한 민혁(民革)의 물길을 트기 위한 터닦기 작업이었다.

그렇게 한번 하늘의 불길이 당겨진 民은 마치 잠재된 마그마의 화산대처럼 역사의 결정적 순간 그 기회 때마다 자신을 분출시켜 드러내며 역사의 큰 흐름을 점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아가고 있다. 참으로 民을 죽이는 현실은 民을 부활시킨다.

이토록 한 세기를 꾸준히 성장해 온 民이 또 있으랴

과연 지나간 한 세기 우리 民의 역사는 저항사(抵抗史)였다. 조선말기 수탈권력에 대한 그 수많은 민중항쟁과 동학혁명, 그것은 일제침략과 함께 3·1운동에 와 절정을 이루고, 다시 6∙10만세항쟁, 11·3광주학생항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을 통해 도도한 흐름으로 드러났다.

일제로부터 벗어난 후에도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몸짓은 지난 60년 동안 결코 멈추지 않았으니 10·1대구항쟁, 4·3제주항쟁, 4·19혁명, 10·16부마항쟁, 5·18광주항쟁, 6·10시민항쟁 등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었다.

이런 위대한 역사의 꿈틀거림 배후(역으론 전면도 된다)엔 인간화를 위한 우리 民의 몸부림이 언제나 함께 했었다. 진정 우리 현대사에 있어 생명을 지키려는 모든 인간화 투쟁운동의 배후세력 또는 실질주도세력은 民이었다.

民의 이런 줄기찬 저항은 현대세계사에서도 드물고, 이토록 한 세기를 꾸준히 성장해 온 民도 없을 정도이니 참으로 독특하고도 유일한 상황에 우리 民이 처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슬프고도 아이러니컬한 사실이지만, 民은 그러한 좌절을 수없이 겪으면서 아주 단단해졌다. 우리 민족과 국가의 희망찬 미래의 열쇠는 오히려 여기에 있는 것이다.

民의 가슴에 담겨진 하늘이 이 땅을 감싸 안는 아름다운 꿈

과연 民의 가슴속에 하늘을 심어라. 그럴 때 그 하늘의 불씨는 끝내 民을 새 세상을 낳는 혁명의 참 주체가 되게 할 것이다. 참된 자유를 한번 주어보라. 진정한 민주의 창(窓)을 한번 열어보라. 어떤 의미에선 가장 생명력이 넘치고 있는 존재인 우리 民에게 길만 열어 준다면, 民은 천지개벽의 놀라운 일을 할 것이다. 그 줄기찬 불굴의 생명력 그대로 드러날 때 이 땅은 생명의 나라, 사람의 세상이 되리라.

이제 그렇게 자란 民이 새처럼 날아오르는 그 부활을 꿈꾸어 본다. 民의 가슴에 담겨진 하늘이 이 땅을 온전히 감싸 안아 품는 아름다운 꿈을 그려본다. 그리고 民의 그 가슴에서 새롭게 태어날 우리의 땅 그 고운 모습을 그려본다. 그날 이 세상은 새 하늘 새 땅의 온전한 구원을 맞이하게 되리라.


정중규 (장애인운동가,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지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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