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지금 세상은 연분홍 꽃잎잔치로 흥분되어 있다. 거무죽죽한 벚나무 가지마다 몽올몽올 꽃눈을 만들더니 이삼일 전부터 그야말로 벚꽃동산을 만들어준다. 죽어버린 것 같던 나무들도 저마다 연초록 생기를 드러내며 향기를 뿜어내고 있어.

이제 길가의 풀잎 하나도 정겹게 보이는구나. 아마 나이 드는 징후겠지?
승희야, 중국에 청정호로 흘러 들어가는 원상강이 있다는구나. 그 강변에는 맑고 향기로운 풀이 돋아난다고 해. 이 풀은 양나라 때 시인, 홍암의 싯구에만 전해지는데 세상에 피어난 듯 세상을 초탈한 듯 좀 비현실적인 모습이네. 그 풀의 이름이 청지(菁芷)라는구나.
생각나지? 우리가 풀잎 같던 시절 함께 읽던 교내잡지의 이름이었잖아.

그 시절의 너는 풀잎, 꽃잎처럼 하늘하늘해서 염려스러웠는데 곧 그렇게 꽃잎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지.
이제 친구들은 서정주의 시 속에 나오는 국화를 닮은 누님들이 되었어. 시간의 흐름이 지나가는 거울을 보며 너를 그리워한다.

너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나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서 어느 골목을 걸었었지......
막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갖고 싶었어. 그러나 세상은 너무 완강하게 우리를 밀어내고 있었지. 우리는 성(城) 주위를 맴돌 뿐, 들어가지 못하는 카프카 소설 속의 K처럼 일이 잘 안 풀렸지. 그런 와중에 홀연히 떠나버린 너......

머언 세월을 돌아보며 그리움을 풀어보려 네 앞에 선다.
승희야, 보고 싶다. 원상강 강변으로 가면 풀잎 같은 우리들의 청춘이 남아있을까. 그 곳에서 맑고 향기로운 풀잎으로 피어나 강물에 얼굴을 적시며 생명의 기쁨에 취하고 싶구나.

며칠 전부터 몸이 아파서 일을 다 물리고 잠을 잤어.
그러다 일어나 베란다에 나가 바람을 쏘이다보니 엊그제 담가놓았던 팥을 그냥 버려두었더구나. 그런데 팥알들이 하얀 뿌리를 내밀며 소생하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양파도 파란 싹을 드러내고 감자도 푸른 기운을 한 곳으로 모으며 살고자하는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지. 어이없지만 티베트인들이 부르짖는 함성을 듣는 것만 같지 뭐니.

너를 보내면서 그리고 엄마를 하관하면서 나는 흙속에 묻은 꽃씨처럼 너와 엄마를 기다렸단다. 봄이 오면 거짓말처럼 살아나 돌아오리라는 꿈을 꾸었지.
그런 생각의 파장 안에서 나온 영상이었겠지. 둥그런 옛무덤 위로 별이 내리고 그 영상 위로 아이들 동요 '형제별'을 입힌 무대작업을 했었단다.

승희야,
공간과 시간과의 상호관계를 완성시킨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강한 천체 주변에서 시간은 빨라지고 반대로 중력이 가벼워지면 시간은 한없이 느려진다는구나.
시공간이 절대적인 개체가 아니라 관찰자의 시선, 조건이 개입되는 거야.

에베레스트산 정상과 해수면 사이의 조건을 그의 공식에 넣어 계산해보면 10의 12승분의 1 만큼의 시간 차이가 생긴다고 하네. 에베레스트 정상의 원자 세슘시계와 베이스캠프의 시계는 이 효과 때문에 35,000년 뒤에 1초의 차이가 나게 된다는구나. 산정의 시계는 그만큼 중력을 덜 받는 거지. 그래서 35,000년이 지나면 에베레스트 정상의 시계가 1초 느려지는 거지.

순전히 물리적인 입장에서도 무거움과 가벼움은 시간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한다. 영적인 차원으로 비약을 해보면 '가볍게 살자'는 흔한 소리가 물리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 가벼운 실체만이 시간을 느리게 한없이 머물게 하는 셈이지. 가볍다 못해 무게를 다 털어버린 존재는 시간을 벗어나 영원의 궤도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게 상대성이론이 신앙을 향해 던지는 화두가 아닐까 싶다.

물에 담기자마자 지닌 생명을 풀어내 뿌리를 뻗는 팥알이 애틋하다. 그래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너를 생각하고 마음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위안을 찾는구나.

에제키엘 서(書)는 서두부터 부활을 예감케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 과학에서도 성경에서도, 남은 우리들은 너를 다시 만날 방법을 찾는다. 사랑스러운 내 친구, 아이처럼 순전하게 예수님을 따르던 내 친구였으니 지금 여기보다 더 좋은 곳에 있으려니 믿는다.

승희야, 이 찬란한 벚꽃동산에 함께 머물고 싶어 마음이 너를 찾아 헤매었어. 봄날처럼 따뜻했던 너를 먼 훗날 다시 만나면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리라 다짐한다. ...미안했어.

 

/이규원 2008-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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