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의 시노달리타스 일정을 마치고, 나에게 든 생각은 보통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갈릴래아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시노달리타스의 의미가 결국 경청하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로마에서의 시노달리타스가 무슨 대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회의 죽음을 목격하고 부활을 기다리는 신학적 의미에 대한 나의 고민을 불편해 하는 수녀님들도 있었지만, 몇몇 수녀들은 나와 함께 수도생활의 죽음을 신학화 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부활하지 못한 수도생활에 대한 고찰을 함께 해 나갈 동지를 만난 것이 기뻤다. 그리고 우리들은 부서지는 교회가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시작했다. 바티칸공의회 문헌에서 우리는 분명 교회는 어떤 권한을 이행하는 기관이 아니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더더욱 아니며, 하느님의 백성, 즉 사람들이라고 천명했다. 그렇다면, 조직이나 기관으로서의 교회나 수도회가 무너지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대의 징표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의 종교 잡지 <소저너>(Sojourner)는 특집기사로 <무너지는 기독교>를 다루었다. 팩데믹을 지나면서, 미국 교회의 30퍼센트 이상의 목회자가 성직을 떠났고, 신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어느 동네를 가든 있던 교회 건물들이 컴퓨터 관련 회사들로 넘어갔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기사는 이제 목회자가 조직을 관리하는 경영 혹은 관리인일 필요가 없고, 멋진 교회로 꾸미기 위해 비싼 가구를 사들일 필요도 없으며, 건물 유지비 같은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일갈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제 교회는 좀 더 본질적인 것 즉, 복음적 삶을 증거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기로에 서 있는 거라고, 그래서 희망의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각이 내게는 참으로 참신했다. 좀 더 작아지고, 그래서 군림하는 교회가 아니라, 서로를 따스하게 보듬음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는 공동체 운동으로 변화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교회의 조금은 지친 모습에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어느 곳을 보아도 조각상으로 가득가득 채워진 대성당. 조용한 대성당인데도 나는 어쩐지 이 모든 조각상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귀를 막고 싶어졌다.&nbsp;©박정은<br>
어느 곳을 보아도 조각상으로 가득가득 채워진 대성당. 조용한 대성당인데도 나는 어쩐지 이 모든 조각상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귀를 막고 싶어졌다. ©박정은

교회에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결국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힘들지 않은 신앙인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시대가 변할 때마다 사실 교회와 수도회는 계속 변화해 왔다. 현재 수도생활의 형태는 사실 프랑스 대혁명 후에 시작된 형태이고,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현대의 삶 안에서 필요한 수도생활로 전환되어야 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회도 팬데믹으로 갑자기 교회가 위축된 것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에 사람들의 영혼을 만져 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한 어떤 변곡점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시노달리타스가 추구하는 서로 경청하는 교회로 변화하기를 소망해 본다. 성령은 우리를 늘 새롭게 하셨고, 위로를 주셨으며, 새로움을 주셨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며, 평범함 속에서 새로움을 그리는 갈망이다.

나는 로마에서의 모임을 마치고 혼자 밀라노로 떠났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서재 벽장에 붙여 있던 '최후의 만찬'의 원화를 보고 싶어서였다. 은혜의 성모 마리아 성당 옆에 붙어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의 식당 벽면에 그려진 그 벽화를 꼭 한 번은 보고 싶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에 있던 그 그림은 고급의 질을 가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어느 날 어린 내가 그 그림을 처음 만나던 날, 난 무슨 숨겨진 나라를 본 것 같은 충격을 받았었다. 친밀한 식탁의 느낌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찬은 늘 내 영혼을 부추기는 주제가 되었다. 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부터 뛰어가서 '최후의 만찬'을 보면서, 희미해져 가는 천재 화가가 그린 벽화를 보며 어린 시절 내가 보던 벽장 속 그림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꼭 보고 싶었던 벽화는 내 아버지가 당신 서재 벽장에 붙여 놓았던 그 그림, 내 맘속에 새겨진 그 그림이었음을. 그래서 나는 투어 일행을 빠져나와, 성당에 들어가 미사를 드렸다. 미사라면, 그저 이 세상 어느 동네의 성당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밀란 시장에서 본, 인간 안전망이란 작품. 누구도 소외됨 없이 모두 다 연결된 세상을 꿈꾸는 자리가 교회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한참을 머물렀다. ©박정은

그리고 밀란의 어지러운 방사선 거리를 하루 종일 걷다, 움베르토 에코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건물에 새겨진 낡은 라틴 문자들을 구경하며 무슨 의미를 발견할까 설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 나는 아름다운 성당이 아닌, 쇼핑몰 한가운데서 교회의 의미를 발견했다. 새롭게 지어진 쇼핑몰에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는 제목의 현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로 도배를 한 밀라노의 거리에 현대 작품, 그것도 쇼핑몰에서 본 작품들은 현재를 사는 내게 이게 교회라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특히 '인간 안전망'이란 작품은 전체 화면에 모든 사람이 다 손에 손을 잡고 있어서 누구도 소외된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로 모여 있지만, 최소한 그 공동체의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그 그림 전체는 한 사람도 연결되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이미지는 내가 꿈꾸는 수도생활의 미래 같기도 했는데, 미래의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소외와 고립을 극복하는 고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밀라노에서 골목 골목을 걸어 다니면서, 그리고 뮤지엄에 가서 지난 시대의 그림들을 보면서 행복했고 감동받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내가 신학자 시노달리타스를 마치며 로마를 벗어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갈릴래아로 가고 싶었던 것처럼, 시장터에서 만난 그림들이 내게 신앙의 비전을 주었다는 것이 새로워서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밀라노의 가장 중심에 있는 두오모 성전을 보면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건물 안팎을 가득 채운 온갖 조각들 때문이었다. 성전 꼭대기에를 올라가 보아도, 안의 구석을 보아도 위대한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의 조각이 빈 공간 없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현기증이 나서 성당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관광객들은 조용한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건물이 너무 시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성부의 조각상을 보았는데, 눈은 퀭하고, 힘없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도 좀 조용해지기로 했다. 그래서 하느님이 커지시고, 조직으로서의 교회와 수도회는 더욱 작아지며, 그래서 글로벌한 세상에서 초췌하고 지친 노인네처럼 여러모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소망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평범하게 매일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새로움을 기쁨 속에 발견하기를 기도하면서.

두오모 대성당에 있는 성부상. 퀭한 눈에 지구를 들고 계신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느님의 백성들도 어쩌면 이 세상에서 저렇게 퀭하고 지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은
두오모 대성당에 있는 성부상. 퀭한 눈에 지구를 들고 계신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느님의 백성들도 어쩌면 이 세상에서 저렇게 퀭하고 지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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