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 기각, ‘전원 집행유예’ 원심 유지

경동건설 하청노동자 정순규 씨(57, 미카엘) 산재 사망 항소심 재판부(부산고등법원 제2-1 형사부)가 23일 모든 항소 이유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이 피고인 모두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에 유족과 연대 단체 등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며 재판부를 즉각 규탄했다.

1심 재판부(서근찬 부장판사, 부산지방법원 형사4단독)는 지난해 6월 16일 업무상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경동건설(원청) 현장소장, JM건설(하청) 이사에게 각각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경동건설 안전관리자에게 금고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각 법인에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한 바 있다.

이날 김윤영 판사는 제1심과 비교해 양형의 조건에 변화가 없고 제1심의 양형이 재량의 합리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경우 항소심이 원심 판결을 존중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들며, “원심 판결 이후 양형에 반영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보이지 않고, 주의 위반 정도, 사고 발생 경위, 피고인들의 나이 등 제반 양형 조건을 고려하면 원심 판결은 모두 합리적 범위에서 적정하게 이뤄진 것으로 보이므로 양형이 가벼워서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검사 측은 원심이 인정하지 않은 제1사다리 추락 사망 가능성이 있고, 피고 측의 죄질에 비해 원심 양형이 지나치게 가볍다면서 항소한 바 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상해가 심각한 점에서 피해자가 높이가 2.15미터에 불과한 제1사다리가 아닌 4미터 높이의 제2사다리를 비계 바깥쪽으로 이용하다 추락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이 같은 검사의 공소 사실에 무죄를 선고했다.

2021년 11월 부산 대청동 가톨릭센터에서 봉헌된 정순규 씨(미카엘) 2주기 추모미사. 이번 항소심을 앞두고 경동건설 엄벌 촉구 탄원에 천주교계에서 40여 곳이 연대했다. (사진 제공 = 정석채)<br>
2021년 11월 부산 대청동 가톨릭센터에서 봉헌된 정순규 씨(미카엘) 2주기 추모미사. 이번 항소심을 앞두고 경동건설 엄벌 촉구 탄원에 천주교계에서 40여 곳이 연대했다. (사진 제공 = 정석채)

2심 재판부는 피고인 측의 항소 이유도 기각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현장주의 의무 및 안전관리 의무는 사업주인 경동건설에 있으므로, 하도급을 주었다는 이유로 업무상 주의와 안전 조치에 대한 의무가 없다는 경동건설 측 주장은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김윤영 판사는 “사업주는 비계 바깥쪽 사다리를 운영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관리하고 안전사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의무가 있다”면서 “비계 바깥쪽 사다리를 설치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안팎에 모두 설치됐을 경우라면 추락 위험을 방지할 안전 장비를 착용하게 해야 한다. 피고인들이 이러한 현장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방치하고 관리감독하지 않은 점 등에 비춰 보면 업무상 주의, 위험방지 조치 의무 위반이 인정돼 피고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1심 결심공판 당시 최후변론에서 피고인 측은 계단식 통로가 있지만 망인이 빠르다는 이유로 사다리 이동을 선택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면서 “안전한 통로로 갈지 위험하지만 보다 빠르게 사다리를 이용할지는 망인의 선택이다. 망인 사망에 있어 피고인들의 책임 요소가 그렇게 많다고 보긴 어렵다”고 주장한 뒤 같은 이유로 항소했다.

피고 측의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만한 CCTV나 목격자 등 사고 당시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어떤 과정으로 추락했는지를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이 이 재판의 관건이다.

재판부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 관리감독의 최종 책임자는 원하청이라는 점 ▲안전 계단은 작업대와 떨어진 곳에 있고, 정작 주된 작업 공간에는 안전장치가 없는 비계와 사다리를 두어 작업자들이 이용할 수밖에 없게 한 점 ▲이를 관리감독하지 않고 방치,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피고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검사 측의 항소 이유인 제1사다리 이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을 근거로 원심의 판단이 맞다고 봤다. 하지만 유족들은 지난 4월 18일 항소심 첫 공판에서 추락한 정 씨의 몸에 심각한 손상이 있는 점, 추락한 정 씨를 비계 안쪽에서 끄집어냈다는 목격자 진술을 근거로 4.2미터 높이에서 안전 규정 위반으로 추락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와 관련해 추가 신문을 요구했지만, 검찰과 원하청 모두 추가 증거 제출과 신문을 진행하지 않았다.

경동건설 산재사망 항소심 선고 뒤 열린 기자회견 참가자들. (사진 제공 = 정석채)<br>
경동건설 산재사망 항소심 선고 뒤 열린 기자회견 참가자들. (사진 제공 = 정석채)

벌은 줬는데 너무 가벼워....
힘없는 노동자에겐 억울함만 남긴 판결

이날 선고 뒤 정순규 씨 유족, 중대재해없는 부산운동본부,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은 부산고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솜방망이 처벌로 인해 산재 사망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사법부의 엄중한 법 적용과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쪽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고 정순규 씨 배우자인 김영희 씨는 “오늘 판결은 3년 가까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저희 유족들에게 또다시 마음에 상처를 안겼다”면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실낱같이 기대했지만 오늘 판결은 기득권들에만 존재하는 법이지 힘없는 노동자에게 없던 일도 있었던 것처럼 억울함만 남는 판결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남편의 죽음은 경동건설이 은폐하고 조작한 기업 살인이 분명한데 재판부는 산업재해 조사내용으로만 추측성 판단으로 기업에 유리하게 솜방망이 처벌했다. 유족들이 수많은 증거를 수집해 재판부에 제출했지만 하나도 다뤄지지 않고 모두 묻혔다”고 말했다.

김도아 씨(가톨릭노동상담소 실장)는 “벌은 줬지만 벌이 너무 가볍다. 사법부는 보다 엄중한 처벌을 통해 기업들의 안전의식을 제고하고 고인과 유가족에게 최소한의 위안이 되길 바랐던 기대를 저버렸다”면서, “이번 재판이 산재사고에 대한 처벌이 얼마나 솜방망인지, 가장의 사고 뒤 가족들이 상처받고 또 상처받는 과정이었음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올해 들어 지금까지 부산에서만 공식적으로 중대재해 19건이 발생했고 그 가운데 18건이 산재 사망, 가장 큰 원인은 추락”이라면서 “언제까지 안전조치 미흡으로 인한 추락사를 방조하고 있을 것인가”라고 규탄했다.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다 추락해 숨진 김태규 씨(24) 어머니 신현숙 씨는 “가족들이 밤낮 증거를 모아 아들 사고 1년 3개월 만에 항소했는데, 당시 담당 경찰이 ‘이렇게 조사를 해서 법정에 올려도 재판부가 제대로 안 해 주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것을 오늘 명백히 확인했다”고 말했다.

신현숙 씨는 “산재는 명백한 살인이며, 살인 기업은 물론 그를 옹호하는 재판부도 벌 받을 것”이라면서 “법이 바뀌지 않는 한 죄 없는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항소심 선고와 기자회견에는 천주교 쪽에서 부산교구 김인한 신부(성소국장), 이균태 신부(김해성당 주임), 차광준 신부(임호성당 부주임)와 서울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JPIC 분과 수도자 8명이 함께했다.

애초 선고 기일이었던 지난 5월에는 전국의 산재 피해 유가족, 노동조합 및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등 218개 단체가 경동건설 엄중 처벌을 촉구하는 탄원서에 연명한 바 있고, 천주교 관련 단체로는 40여 곳이 참여했다.

24일 유족과 중대재해없는 부산운동본부는 이번 항소심 선고에 대한 입장문을 내고 “원통한 마음을 해소할 수 없고, 오히려 더욱 참담하기 그지없다”면서, ▲검찰의 항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 ▲진심 어린 사과 ▲책임자 엄중 처벌을 촉구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변호사 선임조차 못하는 산재사망 피해자는 노동부가 사망사고의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고, 검찰이 책임자의 법 위반 여부를 확인해 엄중한 구형을 내리기를, 이를 토대로 재판부가 책임자를 엄중 처벌하기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면서 “하지만 경동건설 고 정순규님의 1심, 2심 결과는 이러한 모든 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동부, 검찰, 사법부의 기만적 행위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매일 7-8명의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고 분노스럽다면서 이제라도 반성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사망사고 책임자에게 엄중 처벌을 내렸어야 한다고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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