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를 다닐 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사는 박해가 전부일까?’ 박해가 끝난 이후 교회의 모습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가진 지식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몇십 년을 훌쩍 넘어서 민주화를 위한 한국 교회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교회의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 교회의 일상 생활과 체험, 교회의 사명과 노고를 기울여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늘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상황”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요한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 14항) 일제 강점기란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어떠한 길을 걸었을까? "교회는 역사 안에 존재하며 역사 안에서 활동한다."("간추린 사회교리" 524항)

얼마 전 한국 교회는 그 역사 속에서 걸었던 길에 대한 반성문을 내놓았습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합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침묵과 제재에도, 개인의 양심과 정의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천주교인들에 대한 기억"과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기억하려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지난 잘못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좌절에도 쓰러지지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그들을 본받고 따르기 위한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3∙1 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 중에서)

러시아 정교회 키릴 총대주교.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러시아 정교회 키릴 총대주교.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속에서 이 담화문이 떠올랐던 이유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의 행동과 말 때문이었습니다. 키릴 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여러 차례 이번 전쟁이 "서방에 맞서 루스키 미르(러시아 세계)를 방어하려는 성스러운 투쟁"이라고 했지요. 올 부활절에는 미사에 참석한 푸틴을 앞에 두고 "러시아 국민에 대해 고상하고 책임감 있는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국민들을 향해 이번 전쟁을 위한 군 복무는 이웃을 향한 복음주의적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러시아라는 나라를 넘어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큰 지도자인 키릴 대주교의 이러한 말은 종교가 사회 속에서 어떠한 길을 걸어야 될지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크라이나 내 22개 정교회 교구가 미사 중 키릴 총대주교의 언급을 중단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미사 중에 "주님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를 생각하시어 우리 교황 프란치스코와"를 생략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전례적으로 옳냐 그르냐의 문제는 나중에 할지라도 이러한 조치가 상징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격동기 안에서 종교의 역할은 항상 강조되어 왔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미얀마의 한 추기경이 군부의 최고사령관을 만나 함께 케이크를 자르는 장면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추기경은 성탄의 메시지는 "평화의 건설"이라며 "모든 이들이 용서와 상호 존중, 진지한 대화와 화해를 통해 평화와 일치, 국가 발전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지요. 그 시간 미얀마 군부는 민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끊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 글을 시작하면서 일제 강점기 때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을 상기시킨 이유를 이제 아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5월 우크라이나를 명백하게 ‘악의 세력’으로 규정한 키릴 총대주교에 맞서 우크라이나 정교회 (러시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는 러시아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유명 언론인 <월스트리트 저널>은 러시아 정교회가 이미 국영방송이나 국영기업처럼 러시아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고 평가했지요. 전쟁의 악명이 극에 달할 지난 3월 민간인 학살로 러시아의 전쟁범죄에 대한 비난이 쇄도할 때도 키릴 총대주교는 독일 나치 정권의 세계 정복 시도를 분쇄한 것은 러시아라면서 “하느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달 모스크바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그는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국가근위대 대장에게 금박으로 장식한 성화를 수여하고 전쟁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여러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종교는 세상의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백여 년 전 우리나라가 그리고 미얀마가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그 답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변화 속의 사회 속에서 종교의 올바른 역할과 세계의 평화를 기원해 봅니다.

유상우 신부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