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장기풍)

“교회는 노인들이 봉사할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교종, 6월15일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노년의 의미와 가치 계속

프란치스코 교종은 6월1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에서 지난 여러 주 동안 진행된 노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교육을 계속하면서, 하느님께서는 노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봉사할 수 있는 힘을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에 노인들 스스로 옆으로 물러나려는 유혹을 극복하고 열심히 봉사활동에 나서라고 격려했다. 가르침 내용.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신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1,29-31) 그녀의 열병이 가벼웠는지는 모르지만 늙어서는 단순한 열병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늙으면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따라서 노년에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노년에는 마음에 바라는 것이 그치지 않음에도 육체의 힘이 쇠약해져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에 욕망을 줄이면서 인내를 갖고 건강을 지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질병은 젊을 때와 다르게 노인에게 부담을 주며, 남은 생을 더 단축시킵니다. 따라서 노인들은 그들이 회복되지 않고 여생의 희망을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드로 장모를 치유하신 복음의 장면은 우리에게 희망과 교훈을 줍니다.

첫째 예수님은 병든 여자를 혼자 방문하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나이 든 노인들을 ‘함께’ 돌봐야 합니다. 노인 수가 증가하는 요즘 공동체는 많은 사람이 함께, 자주 노인을 방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된 노인을 방문하고 기도로 그들을 주님께 맡겨야 하는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노년, 장애, 중병, 쇠약에도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사회는 생명을 환영하는 사회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든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아 고쳐 주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 사랑의 몸짓은 제자들에게 첫 번째 교훈을 주십니다. 여인의 믿음은 그녀를 굽어보신 하느님의 부드러움에 대한 감사로 빛납니다.

여인은 치유된 후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31절) 이것이 여인이 우리에게 준 두 번째 교훈입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사회는 노인들을 제쳐 두고 싶은 유혹을 극복하고 지역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노인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형제자매들을 위한 치유, 위로, 중보의 성품을 간직한 노인들은 ‘믿음에 따르는 '감사의 순결함'을 가장 잘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을 공동체 행사에서 배제하는 대신 관심의 중심에 둔다면 하느님께 감사하는 귀한 봉사를 하도록 격려받을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우리에게 보여 준 것과 같이, 삶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한 노인의 감사는 공동체와 함께하는 기쁨을 회복시키고 제자들 믿음의 목적지인 본질적 특징을 부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보여 주신 중보 기도와 봉사 정신 그리고 말씀과 행동에는 노인들에 대한 한계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의 부드러움에 대한 감사의 복음적 예배는 남성과 여성들의 문법에 따라 쓰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와 믿음의 부드러움과 관련해 여성들은 남성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를 남성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를 '손으로 잡고'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의 '특별한 부드러움'은 확실히 성모님과 같이 약자와 병자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지혜에서 배울 수 있도록 젊은이와 노인이 자주 한자리에 모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평화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후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전쟁으로 피폐해진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한 호소와 함께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진정한 의미로 순교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도하고, 도우라고 촉구했다. 교종의 우크라이나를 위한 호소는 이번이 전쟁 후 56번째다. 교종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우크라이나 국민을 잊지 말고 전쟁이 먼 일인 것처럼 익숙해지지 말자”고 호소하면서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참된 순교를 하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우리의 추모, 애정, 기도, 도움이 항상 전달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동안 전쟁 종식을 위해 수없이 호소했다.

지난 2월 말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상당수가 여성과 어린이인 7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우크라이나를 떠났고 800만 명 이상이 우크라이나 국내 실향민이 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고통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끈질기게 촉구해 온 교종은 그들의 고통에 교회의 유대감을 보여 주기 위해 바티칸 국가관계 장관 리차드 갤러거 대주교와 온전한 인간개발촉진위원장 미카엘 체르니 추기경과 자선위원장 콘라드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한 바 있다.

 

교종, 무릎 통증으로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 집전 취소

바티칸 공보실은 6월13일 프란치스코 교종이 계속되는 무릎 통증으로 16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와 성체 행렬을 주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역자 주: 대부분 국가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삼위일체 대축일 후 목요일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한다.) 바티칸 공보실은 "교종의 무릎 통증으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전통적 성체 강복을 동반한 미사와 행렬은 이날 거행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확인했다. 지난 2년 동안 성체 성혈 대축일 행사는 코로나19 감염방지를 위해 성체 행렬 없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소수 신자들만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다. 그러나 팬데믹 전에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로마시내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 행렬 하는 전통을 고수했다.

한편 교종은 다음 해부터 로마시내 여러 본당과 지역에서 미사와 성체 행렬을 함으로써 성체 성혈 대축일 전통을 이어 가기로 결정했다.

 

“가난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 가치를 지켜야 합니다”

교종, 제6회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메시지 신자들의 책임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매년 연중 제33주일(올해는 11월13일)에 기념하는 올해 제6회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메시지를 공개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더 큰 연대와 책임을 촉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 없는 개인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메시지 내용.

올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우리의 삶의 방식과 우리 주변의 다양한 형태 빈곤에 대해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강한 도전입니다. 현재 세계는 코로나 대유행으로 대량 실직과 또 다른 재앙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빈곤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이 시대에 매우 다른 시나리오를 부과하는 한탄스러운 운명입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어기고 스스로의 의지를 강요하는 ‘초강대국’들의 직접 개입으로 이 문제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의미한 전쟁'이 초래하는 엄청난 빈곤과 폭력은 방어력이 없는 취약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수백만 명 여성, 어린이 및 노인들이 '안전을 찾기 위해 폭탄의 위험'을 무릅쓰고 실향민으로 이웃나라에 피난처를 구함으로써 자신들의 '뿌리를 자르고'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받는 고통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이 전쟁터에 남아 두려움, 식량, 물, 의료 및 애정 부족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은 어두워지고 그것의 피해를 느끼는 사람들은 이미 수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해지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행되는 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부자가 되셨지만 그의 가난으로 우리가 부자가 되도록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사도 바오로의 외침을 묵상하게 합니다. 성 바오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고 권고했고, 바오로는 식량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돕기 위해 많은 헌금을 모금하기 시작했습니다. 성 바오로는 초기의 열정적 호응이 주춤하고 그가 제안한 계획이 추진력을 일부 상실한 뒤 코린토 공동체에 서한을 보내 모금을 다시 시작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주일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도록 헌금을 모으는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항상 '기쁨과 책임감'으로 해 오던 일입니다. 특히 현재는 중동, 중앙아프리카,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온 수백만 명의 난민을 환영하기 위해 전 세계가 관대하게 문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그들 가족과 지역 사회가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을 후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갈등이 오래 갈수록 결과는 더 무거워집니다. 그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비상 단계를 넘어 구호 활동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우리의 처음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시작한 일은 같은 책임감을 가지고 끝까지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는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는 생활 양식’은 공동체 의식과 친교감이 높아지고 결속력이 더욱 성숙해집니다. 부유한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은 사적 이니셔티브, 경제 성장, 가족 지원 및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구체적 인센티브의 긍정적 결과로 가족이 부와 안정의 상당한 증가를 경험한 지난 수십 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혜택을 ‘안전과 생존’을 찾아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민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자유, 책임, 형제애, 연대의 가치를 계속 옹호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항상 사랑, 믿음, 희망을 우리 삶과 행동의 기초로 삼도록 합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은 가난을 선택한 하느님 아들의 모범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를 갖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위임할 수 없는 직접 참여를 통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한 ‘복지 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행동주의가 아닌 그들의 무기력함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는 형제자매들의 진실하고 너그러운 관심입니다. 진정한 부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데 있지 않고 서로 짐을 지게 하는 상호 관심과 사랑에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도 뒤처지거나 배제되지 않는 방식입니다.

올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가난이 우리를 부자로 만든다’는 신앙생활의 큰 역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삶이 죽음을 이기고 존엄이 불의에서 구속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가난의 길을 따라야 하며, 사랑으로 삶을 나누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일생의 양식을 쪼개고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평등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불행에서, 부자를 허영심에서, 그리고 절망에서 해방시키는 길입니다. 부자로 태어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성 샤를 드 푸코의 모범을 따를 때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은 또한 그분의 외적 삶에서 예수님을 가장 완벽하게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2022년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 우리에게 은총의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양심을 성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 우리의 충실한 삶의 동반자인지 자문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도이며 증인들입니다"

교종, 아프리카 ‘백인 교부’ 선교회원들에게 ‘기도와 형제애’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6월13일 바티칸에서 열린 아프리카 ‘백인 교부’(Chapter of the White Fathers) 선교회 총회 참석자들에게 그들이 받은 은사의 의미와 힘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고, 선교사들은 기도와 형제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도와 증인이 되라고 강조했다. 연설 내용.

먼저 원래 7월 첫째 주 예정됐던 저의 아프리카 콩고 민주 공화국과 남수단으로의 사도적 순방이 저의 건강 문제로 연기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제 나이에 선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여러분 선교사들의 기도와 모범에서 용기를 얻고 제가 항상 마음에 품고 있는 콩고 공화국과 남수단 사람들을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교사들은 이 ‘시대의 장’을 ‘감사와 희망’으로 살았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것은 ‘영적 건강의 표시’이며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가르치신 ‘신명기적 태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길에 대한 감사한 기억을 되살려 보십시오.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이 ‘희망의 불꽃’을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선물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러울 때 희망 있는 영혼과 하느님께 대한 경이로움에 열려 있지 않고 하느님 섭리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성령과 말씀으로 이루시는 소명의 씨앗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감사와 희망을 간직하는 영적자세가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선교사들은 하느님과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줄 알고 서로 도우며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희망을 품는 하나의 공동체로 감사와 희망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끌어당기고 붙들어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선교사들은 ‘예언적 증거로서의 선교’의 뿌리에 대한 충실성과 함께 성령께서 라비제리 추기경(백인 교부 선교회 창시자)에게 맡기신 카리스마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와 세계가 변화하더라도 그 은사는 항상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선교사들에게 지속되는 그 의미와 힘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특히 복음화의 맥락에서 이슬람 종교가 만연한 장소에서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기도와 형제애’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느님과 형제자매들에 대한 열린 마음을 말합니다. 매일 미사 봉헌에서 끌어내는 하느님의 임재 안에 우리가 존재하며, 그분이 우리를 바라보게 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 거함에서 나오는 ‘수액’, 이것이 사도가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이것은 ‘선교의 역설’이며, 여러분이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만’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최근 시성되신 성 샤를 드 푸코의 증언은 여러분을 위한 또 다른 은사이지만 우리 시대 모든 그리스도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선교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성 샤를 드 푸코는 하느님에 대한 강렬한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에게 형제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변화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그분의 모범은 선교사들에게 ‘기도와 형제애’를 강조합니다. 모든 교회는 단순함의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은사, 직무, 제도에서 발산하는 본질적 핵심으로 돌아가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묘사된 최초의 공동체가 경험한 오순절과 같이 빛을 발하도록 합니다.

종종 예언을 이스라엘 예언자의 모델을 따르는 개별적 실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교회는 예언을 증거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보편 교회는 수많은 나라와 문화권 사람들이 이루는 형제애의 공동체며, 오직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전이기도 합니다. 기도와 형제애로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들도 가난과 더불어 불안과 불안정을 경험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대화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작은 공동체들은 ‘복음화의 감미로운 기쁨’을 경험하도록 파송되었습니다. 이번 ‘백인 교부’ 선교회 총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에게 아프리카 성모님의 전구를 간구하면서 여러분이 선교하는 지역 사회 형제자매와 신자들에게 저의 축복을 전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분법적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닙니다”

교종,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배경과 교회 영적 쇄신에 대한 소신 밝혀

프란치스코 교종은 최근 예수회 평론지 <가톨릭 문명>(La Civiltà Cattolica)과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교회의 영적 쇄신 징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다음은 6월14일 공개된 인터뷰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질문 : 우리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전쟁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어떤 조언을 하시겠습니까? 평화로운 미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습니까?

교종 : 우리는 동화 ‘빨간 모자’ 패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동화에서 빨간 모자는 착하고 늑대는 나쁜 사람입니다. 이번 전쟁에 이분법적인 선과 악은 없습니다.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글로벌한 요소들로 발생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몇 달 전 어느 국가 원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매우 현명했습니다. 그는 나토가 행동하는 방식을 매우 우려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나토는 러시아를 향해 ‘성문’을 짓고 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가 제국주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러시아는 어떤 외세도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상황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전쟁은 2월24일 시작되었습니다. 그 국가 원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미 징조를 읽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사용하는 군대, 일반적으로 체첸, 시리아 등 용병들에 의해 수행되는 잔인함입니다. 그러나 위험은 우리가 이것을 괴물처럼 보고, 도발되었거나 예방되지 않은 전쟁 뒤에 펼쳐지는 전체 드라마를 놓치는 것입니다. 저는 무기 실험과 판매에 주목합니다. 매우 슬프지만 이는 큰 문제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당신은 푸틴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이는 매우 단순하고 잘못된 말입니다. 저는 원인과 사익을 고려하지 않고 복잡한 상황을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구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러시아군의 만행과 잔혹함을 목격하는 동안 문제를 잊지 않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러시아가 일주일 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잘못 계산했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갈등의 역사를 가진 용감한 우크라이나인들을 잊고 있었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가 우리와 더 가깝고 우리 감성을 더 자극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일부 지역, 나이지리아 북부, 콩고 북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진행 중인 전쟁에 신경 쓰지 않는 다른 나라들도 있습니다. 25년 전 르완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미얀마와 로힝야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은 전쟁 중입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우리가 제3차 세계대전을 단편적으로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한 세기 동안 세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나는 피아베 강에서 할아버지 기억을 통해 첫 번째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다음은 두 번째, 지금은 세 번째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새로운 재앙입니다. 당신은 한 세기 동안 모든 무기 거래와 함께 세 번의 세계대전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4년 전 노르망디 상륙 70주년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국가 원수와 정부가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해변에서 죽은 수만 명의 젊은이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이야기를 하자면 2014년 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맞아 레디풀리아에 갔을 때 저는 전사한 병사들의 나이를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매년 11월2일 묘지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죽은 병사들의 나이를 보고 울었습니다. 지난해 나는 프랑스 묘지에 갔습니다. 그 무덤들은 그리스도교인이든 이슬람교도든,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희생된 20, 22, 24살 프랑스 젊은이들 무덤이었습니다. 나는 슬로바키아에 가서도 많은 젊은이와 노인 여성들에 놀랐습니다. 노인 남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할머니들 혼자였습니다. 전쟁이 그들의 남편을 앗아갔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는 이유는 당신의 잡지가 전쟁의 인간적인 면을 다루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리뷰가 전쟁이라는 휴먼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면 합니다. 지정학적 계산과 사물을 철저히 연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당신의 일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휴먼드라마도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묘지들의 휴먼드라마, 노르망디나 안치오 해변의 휴먼드라마, 우편배달부가 문을 두드리고 “조국을 위해 아들을 준 것에 감사하다”는 편지를 받는 여인의 휴먼드라마. “당신의 아들은 조국의 영웅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홀로 남겨진 여인을 묵상하면 인류와 교회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회정치적 성찰을 수행하되 전쟁의 인간적 차원을 소홀하지 마십시오. 우크라이나로 돌아갑시다.

남자들은 싸워야 했고 대부분 우크라이나 난민과 망명자들은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입니다. 지난주 아조우스탈 제철소에 있던 우크라이나 군인 두 아내가 찾아와 그들을 구조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 민감합니다. 그곳에서 남편과 싸우는 아이들을 둔 젊은 여성들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열정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상황이 끝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여성들을 돌볼 것입니까? 우리는 현재를 넘어 가까운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미 '독수리'들이 이들의 머리 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인신매매에 빠지거나 이용당하지 않도록 어떻게 지원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는 노예제도와 전쟁을 경험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에 자주 베어지고 찢어진 부유한 나라입니다. 역사가 우크라이나를 영웅적 나라로 만들어 준 것과 같습니다. 이 영웅적인 모습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부드러움과 함께하는 영웅심입니다! 실제 러시아의 젊은 병사들과 용병들이 증언한 것처럼 이들이 전쟁에 나갈 줄도 모른 채 처음 도착해 그들을 돌보는 것은 우크라이나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위대한 인간성, 위대한 부드러움. 용감한 여성들. 용감한 사람들,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그들의 땅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영웅주의가 그들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바로 우크라이나 국민의 영웅심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세계대전, 세계적 이해관계, 무기판매, 지정학적 상황이 영웅적인 인민을 순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러시아 정교회 키릴 총대주교와 40분 대화했습니다. 처음 그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성명서를 읽어 주었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나는 "형제님, 우리는 국가 성직자가 아니라 백성의 목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6월14일 예루살렘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하기로 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우리 대화가 오해되지 않도록 상호 합의하에 회의를 나중으로 연기했습니다. 나는 9월 카자흐스탄 총회에서 그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목회자로서 그와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질문 : 교회에서 어떤 영적 쇄신의 징조가 보이시나요? 새롭고 신선한 삶의 징후가 있습니까?

교종 : 구식 관점으로 영적 쇄신을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보고 평가하는 방식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나는 유럽​​ 교회에서 최근 공의회를 기억하는 운동그룹, 새로운 주교 등 떠오르는 자발적인 것들에서 많은 쇄신을 봅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공의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터무니없는 일이 아닙니다. 복구주의는 공의회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현장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 많은 ‘복구주의’ 그룹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한 주교는 이 ‘복구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간 교구를 관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공의회를 수락한 적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공의회를 받아들이지 않은 복구주의의 생각과 행동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공의회가 아직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공의회가 뿌리를 내리려면 100년이 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뿌리를 내리려면 아직 40년이 남았습니다!

영적 쇄신의 다른 징후는 사회적, 사목적 보살핌을 통해 교회에 새로운 모습을 제공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이와 관련 매우 창의적입니다. 당신은 당시 태어나지 않았지만 1974년 나는 예수회 제28대 총장 페드로 아루페 신부의 시련을 목격했습니다. 당시 아루페 신부의 예언적 목소리를 막는 보수적 반응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분은 성인이지만 당시에는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교종에게 큰 복종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한 순종입니다. 바오로 6세는 그것을 이해했습니다. 교종이 예수회에서 한 연설 중 최고의 연설은 1974년12월3일 바오로 6세가 직접 작성한 연설입니다. 원본이 ​​​​존재합니다. 예언자 바오로 6세는 그것을 쓸 자유가 있었습니다.

한편 바티칸 꾸리아와 연결된 사람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정통파’로 생각하고 아루페에 반대하는 스페인 예수회 그룹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6세는 이 게임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아루페는 교종에게 순종하는 어린이 같은 단순성으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우리가 소그룹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가면서 "가자, 가자! 교종님이 지나가려고 합니다. 그를 맞이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즉흥적인 사랑은 소년과 같았습니다. 로욜라 관구에서 온 한 예수회 신부는 특히 아루페 신부에 화를 냈습니다. 그는 여러 곳, 심지어 아르헨티나까지 파견되어 늘 말썽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언젠가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진짜 범인은 아루페 신부와 칼베스 신부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은 성 베드로광장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그들을 볼 때일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신에게 2차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대한 감각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전통주의자들에게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회와 교종에 대한 충성을 옹호한 인물들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루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를 비추는 빛입니다. 그리고 신비주의적이라기보다 더 교육적이고 금욕적인 폐쇄적이고 경직된 사고의 표현인 에피롬 연구소(Epitome Instituti)의 경직된 공식에서 자신을 해방하여 원천으로서의 영성수련을 재발견한 사람도 바로 아루페 신부였습니다.

질문 : 독일에서는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시노드 여정이 있지만 실제로는 실생활에 매우 가깝습니다. 많은 사람이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쾰른 교구입니다. 당신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종 : 저는 독일 주교회의의장 베칭 주교에게 말했습니다. "독일에는 좋은 복음주의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시노드 경로가 지성인, 신학적인 엘리트로부터 생겨 외부 압력에 크게 영향을 받을 때 발생합니다. 시노드 여정이 신자와 함께, 백성과 함께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는 교구들이 있습니다. 나는 독일 교회 시노드 여정에 대해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제가 한 달이 걸려 직접 썼습니다. 나는 바티칸 꾸리아를 개입시키고 싶지 않아 혼자 했습니다. 원본은 스페인어이고 독일어 버전은 번역입니다. 나는 그 편지에 생각하는 바를 썼습니다. 다음으로 쾰른대교구 문제입니다.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울 때 나는 상황이 진정되어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대주교에게 6개월 동안 자리를 비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물이 거칠면 선명하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나는 그에게 사직서를 쓰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사직서를 보내면서 교구에 사과의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기 위해 그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지만 사직서를 손에 넣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많은 압력 그룹이 있으며 압력을 받을 때 명확히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압력이 없을 때까지 분별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관점이 있다는 사실은 좋습니다. 그러나 압력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쾰른대교구가 세계에서 갈등이 있는 유일한 교구로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갈등을 겪고 있는 세계 다른 교구들과 마찬가지로 이 교구를 취급합니다. 아직 갈등이 끝나지 않은 푸에르토리코 아레시보 교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수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교구들이 많습니다.

질문 : 교종님, 저희는 디지털 잡지이며 교회 밖의 젊은이도 읽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빠르고 즉각적인 정보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분별의 과정에 어떻게 소개할 수 있습니까?

교종 :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젊은이들과 일할 때 우리는 항상 고정된 관점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관점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발걸음을 내딛도록 도와줄 지혜를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내 시대 젊은이들과의 일은 스터디 모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이상과 행동의 길로 그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가만히 서 있는 동안이 아닌 길을 따라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젊은이들을 보고 주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은혜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것을 돌보시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임무는 그들을 경로에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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