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신심이 아닌 “저널리즘”

수많은 가톨릭 신문들의 발행인란. (사진 출처 = CNS)
수많은 가톨릭 신문들의 발행인란. (사진 출처 = CNS)

(기사 출처 = NCR)

데이비드 깁슨

미국 주교회의 산하 가톨릭 통신사인 CNS가 스스로 자신의 해산을 알리는 첫 보도를 한 것은 올해 102년을 맞는 이 매체의 편집권 독립성에 대한 한 증거이자 CNS를 사실상 죽이기로 한 미국 주교들의 결정이 얼마나 우매한지를 보여 주는 확고한 증표였다.

지난 5월 4일 CNS(Catholic News Service)의 국내 보도 활동을 중단한다는 발표로, 그간 교계제도가 신뢰성을 유지할 몇 안 되는 한 원천이자 미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자신의 교구 경계 너머의 교회에 대해 믿음직스럽게 정보를 제공할 중요한 수단이며, 교회를 갈라지게 만들어 왔고 정상적인 신자들, 대개는 가톨릭 신앙 그 자체인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어 온, 이념에 매달린 (극우) 가톨릭 매체들의 확산에 맞선 증거자가 이제 사라졌다.

이 매체에 따르면, 임직원들은 워싱턴과 뉴욕의 편집, 보도 본부는 문을 닫고 바티칸 지국만 유지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CNS는 “가톨릭교리서”와 “미국 성인 교리서”를 비롯한 많은 서적의 저작권을 소유한 미국 주교회의 출판부도 2022년 말로 출판 업무를 그만둘 것이라고 보도했다.) 로마에 남은 조그만 지국조차 제대로 일할 수 있을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니면 텔레비전 업계 식으로 말해, 화면에 나오기는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국내로 보자면, CNS의 폐간은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각 교구에서 내는 교구신문들과 전국의 여러 가톨릭 매체들은 다른 교구의 소식과 해외 소식을 이 통신사에서 받아서 써 왔기 때문이다. 일반 지방지나 전문지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적 가톨릭 미디어들은 전체 교회를 다 취재할 역량이 부족하며, 이러한 교구 매체들이 CNS를 구독할 재정이 어렵다 해도 CNS의 국내 업무를 중단한다는 것은 우리네 지역 신문이 <AP>나 <로이터>의 구독을 중단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일이다. 이제 이들이 그간 CNS에 내던 작은 구독료는 더욱더 줄어들 것이다.

(역자 주: 미국은 국토가 광대해 전국지가 없고 거의 모든 신문이 지방지다. 일부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유명 매체가 전국적 영향력과 독자를 갖고 있지만, 이름에서 보듯 원래는 지방지다. 그렇다고 해서 워싱턴이나 뉴욕에서 벌어지는 중앙의 일이나 전국적 관심사, 다른 지역과 해외 주요 사건이 아예 지면에서 빠질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역할을 맡을 통신사 <AP>(Associated Press, 연합통신)가 만들어졌고, 각 매체는 <AP>를 구독하면서 <AP>가 내는 전국적 기사, 해외 기사를 받아쓴다. 가톨릭교회의 뉴스 세계에서 이 <AP> 역할을 하는 것이 CNS다.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처럼 가톨릭 신자가 많은 다른 나라에도 각기 이러한 전국/해외 기사를 담당하는 가톨릭 통신사가 있다.)

CNS의 전신인 '가톨릭 소식지'의 1920년 4월 11일판. (사진 출처 = CNS)<br>
CNS의 전신인 '가톨릭 소식지'의 1920년 4월 11일판. (사진 출처 = CNS)

일반 매체들도 그렇듯, 가톨릭 매체들을 괴롭히는 재정적 압박이나 문제들이 심한 것은 사실이다. 가톨릭 교계제도는 이렇듯 가톨릭 매체를 위한 기부금, 광고 수입이 줄고 있는 시대에 CNS 운영자금을 어떻게 댈 것인지 지난 수년간 토론해 왔다. CNS가 의미 있게 살아남을 수 있게 재창조되는 방법에 대해 충분히 창조적으로 고민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말이다.

동시에, 미국 주교회의 내의 보수주의자들은 CNS를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해 왔다. 그들은 덴버에 본사를 둔 <CNA>(Catholic News Agency)와 같은, 보수판 CNS에 해당하는 것의 탄생을 도와줬다. (역자 주: CNA는 매체 이름부터 CNS에 대한 대결적 의도를 보여 준다. 이들은 진보 가톨릭 매체인 <National Catholic Reporter>(NCR)에 대응해서는 <National Catholic Register>를 창간했다. 약칭을 쓰면 같은 NCR이 되므로, 이런 일은 여러 이유에서 피하는 것인데, 의도적으로 택한 것이다.) 극우 가톨릭 통신사인 CNA는 (돈이 부족한) 교구 매체 등이 도저히 거부하기 어렵게도, 기사를 무료로 제공한다. 미디어 문제에 관해 주교들의 의견을 주도하는 벌링턴 교구의 크리스토퍼 코인 주교는 <NCR>의 브라이언 프라가 기자에게 “CNA는 CNS가 망한다는 확실한 징표였다. 공짜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벽 위의 글씨였다.”(역자 주: 구약성경 다니엘서 5장에 나오는 바빌로니아 멸망의 예언 이야기다.)

다른 보수파 주교들은 <National Catholic Register>, <EWTN>과 같은, (극우 매체) <브레이트바트> 스타일의 매체들을 후원해 CNS에 경쟁시켰는데, <EWTN>은 기본적으로 가톨릭판 <폭스뉴스>에 해당한다. (현재는 레지스터, EWTN, CNA가 모두 한 그룹으로 통합돼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에 <EWTN>을 두고 “악마의 작품”이라고 표현한 바 있으니, 이 케이블방송 매체는 가톨릭 신자들을 분열시키려 애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 주교회의 의장이자 로스앤젤레스 대교구의 호세 고메즈 대주교는 <EWTN>의 이사 가운데 한 명이다. <CNN> 회장이 <CNN>과 앙숙인 <폭스뉴스>의 임원으로 앉아서는 <폭스뉴스>를 위해서 자기 언론사를 망하게 하려고 일하는 꼴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진정한 언론인들은 그 답을 알 것이다.

CNS의 사진편집자인 바버라 스티븐슨이 또 다른 일반통신사인 UPI의 사진전송기 Unifax II에서 사진을 받고 있다.(1990) CNS는 교회 밖 소식은 AP, UPI 등을 구독하여 받아썼다.&nbsp;(사진 출처 = CNS)<br>
CNS의 사진편집자인 바버라 스티븐슨이 또 다른 일반통신사인 UPI의 사진전송기 Unifax II에서 사진을 받고 있다.(1990) CNS는 교회 밖 소식은 AP, UPI 등을 구독하여 받아썼다. (사진 출처 = CNS)

이런 일들이 주교회의가 내던 102년 된 매체가 그처럼 충격적으로 목이 베인 결정으로 이어졌다. CNS가 폐간되면서 그간 CNS가 맡아 오던 영역은 아마추어이면서 이념에 매몰된 자들에게 넘겨졌다. 그릇된 정보와 분열이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우리의 민주적 기관들에도 위협이 되고 있는 이 시기에 말이다. CNS는 미국에서, 전 세계에서도, 가장 독립적이고 높이 존경받는 종교 통신사 가운데 하나였다. CNS의 편집진이, 전 세대보다 덜 고분고분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 속한 교회 관리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난 성직자들이 기사를 자기네가 원하는 대로 고쳐 쓰거나 아예 올리지 말라고 요구할 때 거부한 이야기들은 일반 언론으로서도 최고 수준이었다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CNS가 없어진다는 것은 종교 차원의 좁은 문제만도 아니다. 석탄채굴 산업의 쇠락에 대해 온통 관심이 쏠려 있지만, 언론계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자리를 줄여 왔다. 신문계는, 원래 가장 심도 있고 원칙상의 보도 활동이 있어 왔던 곳인데, 양적, 질적인 쇠퇴가 특히 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2008년에는 기자 수가 11만 4000명가량이었는데 2020년에는 8만 5000명쯤으로 줄었다.

남은 기자들이 받는 월급도 그 어느 때보다 적다. 온라인 매체들은 (전통 매체의 쇠퇴에 따른) 빈 곳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데, 특히 우리 지역 사회의 심장이자 영혼이라 할 지역적 차원의 보도가 그렇다. 그중에도 종교 보도가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각 매체에서) 풀타임 종교 담당 기자가 줄고, 자기가 맡은 종교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경력 기자들이 줄어들면서,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 대한 기사 자체도 줄어들었다. 어쩌면 현재 세계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핵심 동인이 종교인데도 말이다.

<커먼윌>과 <아메리카>, <우리의 주일 참례자>와 같은 가톨릭 매체들은 존경받을 만한 경력과 전문가다운 편집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통신사가 아니며 CNS가 해 오던 영역을 맡기 시작할 수 없다. 바로 이 글이 실린 <NCR>조차도, 교회에 관한 속보를 내는 데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가장 칭찬받을 만한 언론으로서의 경력을 지닌 이 매체도, 지금처럼 제한된 자원으로는 지금까지와 같은 일밖에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간 CNS를 써 오던 자기네 교구 매체에서 대신 <NCR>을 쓰도록 허용할 주교는 아주 드물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자 수가 줄어든) 일반 언론의 과로에 치이고 경험도 부족한 기자들이 가톨릭교회에 관해 뭔가를 쓸 필요가 있을 때는 (지금까지처럼 종교 전문기자가 있어서 직접 취재하던 것과 달리) 정보나 힌트를 얻으려 우선 가톨릭 매체를 찾아볼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들이 아주 쉽게 찾아서 좀 적당히 고쳐서 자기네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은 또한 잘 편집되거나, 심지어 정확한 것도 아닌 경우가 아주 잦을 것이니, CNS는 이 추세 속에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공간은 자신들은 언론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울리는 징에 지나지 않는 플랫폼들에 의해 지배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를 희생시켜 자기 개인만 더 돋보이려는 주교, 추기경들이 교회의 뜻이라고 기사에 나오는 것을 갈수록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신자들의 삶과 이들의 신앙 감각은 교회 밖에서는 갈수록 더 적게 보도될 것이다. 주교들과 교황의 직무는 가장 목소리가 크고 가장 성을 크게 내는 자들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이고, 이들은 무엇이 가톨릭적이냐를 규정하는 자들이 될 것이며, 가톨릭 언론인임이 무슨 뜻이냐를 규정할 것이다. 가톨릭 지도자들은 일반 언론이 가톨릭교회에 관해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고 늘 비난하지만, 가톨릭 매체야말로 진짜 범죄인이다.

가톨릭 매체의 위기는 한 특정한 매체나 필자의 가톨릭적 진실성에 초점을 둔다고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이 예의성을 더 갖추자고 호소하기만 (또는 그런 호소가 필연코 실패하면, 울고 불기만 하거나) 해서는 이 위기가 풀리지 않는다. 기실, 그러한 방법은 누구는 좋은 신자이고 누구는 영성체도 해 주면 안 될 자이며, 아니 아예 화형시켜야 할 놈이라고 양파 까듯 끝없이 규정해 나가는 막다른 외길로 나아갈 뿐이다. 그것은 21세기판 전통주의일 뿐이다. 가톨릭 매체의 진정한 위기는 전문가주의, 프로페셔널리즘의 위기다. 자신의 평판을 원칙적인 저널리즘의 기준과 관습을 따름으로써 쌓아 나가고 유지하는 매체와 실천자들이 없다는 위기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 문제의 핵심이다. 즉, 가톨릭 저널리즘(언론)의 질은 한 언론인이 지닌 가톨릭 신앙의 질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저널리즘)은 매체의 일부이지만, 모든 매체가 언론은 아니다. 언론, 즉 저널리즘은 기술(craft)이자 (그 기술을 쓰는) 직업이며, 따라서 자기가 하겠다는 그 일을 얼마나 잘 하느냐로 신뢰를 얻는 것인 바, 그 일이란 진실이 무엇이냐를 찾는 일이라 정의된다.

가톨릭 저널리즘은 신심이나 호교론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인 구두장이는 구두에 작은 십자가 장식을 다는 것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구두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장인의 훌륭한 솜씨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루터 대신에 가톨릭 이야기가 좀 더 믿을 만하다면, 가톨릭 철학자인 자크 마리탱이 그리스도교 예술에 대해 쓴 유명한 글을 한번 보자. “그리스도교적 작품을 하나 만들고 싶다면,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고는 그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라. 당신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아름답게. 즉, ‘그리스도교적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는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1년 2월, CNS 100주년을 맞아 CNS 바티칸 지국 기자들을 특별 면담했다. CNS의 전신인 '가톨릭 소식지' 1920년 4월 11자의 사본을 보고 있다.&nbsp;(사진 출처 = CNS)<br>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1년 2월, CNS 100주년을 맞아 CNS 바티칸 지국 기자들을 특별 면담했다. CNS의 전신인 '가톨릭 소식지' 1920년 4월 11자의 사본을 보고 있다. (사진 출처 = CNS)

문제는 언론인들이 지닌 가톨릭 신앙이 아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수행하는 저널리즘의 수준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반대하는 그토록 많은 가톨릭 매체가 저널리즘의 가장 기본적 사항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아니 좀 너그럽게 말해서, 그것을 모른 채로, 취재하고 쓰고 편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관점을 퍼뜨리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매체들은 자신들이 저널리즘을 잘 알고 올바르다고 가장 크게 떠드는 치들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실수를 하거나, 크고 작게 고의로 사기를 치면서도 말이다. 이들은 기사 맨 앞에 써 넣는 발신지, 즉 취재와 기사 작성의 현장이 어디인지를 자신이 실제로는 수만 리 떨어져 있음에도 마치 사건 현장에 있는 듯이 보이게 하는 용도로 (이해하거나 아예 거짓으로) 쓴다. (역자 주: 이 발신지 표기는 그 기사의 신뢰성 정도 평가에 절대적이어서, 이것을 거짓으로 써서 제출하는 기자는 발각 즉시 해고하는 언론사도 있다.) 이들은 (필자, 기자, 해당 언론사 자체와 취재 대상이 서로 이해관계에 있는 경우) 이해충돌이라는 기초적 문제를 늘 숨기고, 자기네가 어디에서 자금을 조달하는지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네 것이 아닌 기사를 베껴 쓴 기사를 싣고, 엠바고(정보제공자와 약속한 보도 제한 시한)를 깨고, 험한 주장들을 – 익명의 소식통인 경우가 많은데- 기초적 사실 확인도 하지 않거나 고발된 당사자에게 반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낸다. 이들은 기사와 칼럼 사이에 구분도 없고, 경영과 편집이 분리돼 있다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는다. 매체만 있을 뿐 저널리즘, 즉 언론은 없다.

편집도 전혀 없고, 책무성도 전혀 없으며, 전문가다운 자세도 전혀 없으니 더욱더 신뢰성은 전혀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이 가톨릭 주교들이, 자신들의 신뢰성의 저수지가 이미 다 증발해 말라 버린 주교들이, CNS와 같은 전문성 있는 뉴스 매체를 없애버림으로써 죽이고 있는 바이다. 주교들이 공개 비난해 마지않는 바로 이 반 프란치스코 이념주의자들이야말로 이번 결정으로 강화됐으며, 가톨릭교회 안의 반 현대, 반 공의회 조류는 또 다른 선물을 받은 셈이다.

가톨릭 칼럼 사이트인 <베드로가 있는 곳>의 마이크 루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회매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 '놀라운 기술')에서는 신자들이 “진실하고 완전”하며 전문적 방식으로 보도된 “정보의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사람들에게 매체의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CNS는 이 의무를 완수함에 결정적 역할을 해 왔으며, CNS를 잃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촉구하고, 훌륭한 언론이 제공하는, 복음화와 공동선을 훼손한다.

(데이비드 깁슨은 포덤 대학 종교문화연구센터 소장이다. 그는 <RNS>에서 전국 담당 기자로 일한 바 있으며, 상을 받기도 한 언론인이자, 저술가, 영화제작자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news/opinion/closing-catholic-news-service-us-bishops-undermine-their-pastoral-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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