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들이 자라나서 예쁘게 말할 줄도 알고, 자기 고유의 얼굴 표정이 생겨날 때, 우리들은 기쁨 속에서 삶의 신비를 만난다. 이 조그만 생명이 주는 기쁨으로 모든 것이 빛날 때, 노년의 빅토르 위고는 왜 그토록 어린아이들에 대해 시를 자주 그리고 많이 써 내려갔는지 수긍도 되고 또 이해도 간다. 그 예쁜 아이의 엄마가, 십 년간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한 영성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식을 하러 미국에 들어왔다. 한 여성이 엄마가 되고, 또 학자가 되고 하는 그 진정성 있는 노력들이 눈이 부시다. 꼬마는 엄마의 박사 가운을 제 몸에 걸쳐 보며 무언가 자기만의 상상의 나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신성한 시간 앞에, 나는 말을 잃었다. 그의 공부가 적당한 지적 유희를 너머, 하느님을 찾는 여성 신앙인의 고백이어서, 그저 축하한다는 말은 그 복된 순간을 담아내기에 너무 얕다. 하여, 이제 논문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여성 신학자의 앞길을 침묵 속에서 축복한다. 이제 낡아 가는 내 졸업 가운을 물려받아 입고 선 새롭게 탄생한 신학자로서의 새 생명을 보면서, 이렇게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고 그래서 늘 새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의 오월은 설레는 달이다. 미국 곳곳의 젊은이들이 요구되는 모든 이수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으며, 세상을 향해 첫발은 내딛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졸업식, 즉 학위수여식을 코멘스먼트(commencement)라고 부르는데, 글자 그대로 하면 시작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준비해 온 학문의 열매를 손에 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순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학위를 얻기까지 수고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는 알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성큼 걸음을 뗀다는 의미가 더욱 크다.

'착한 엄마'라는&nbsp;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이 작품은 공부하며 아가를 돌보는 워킹 맘의 모습을 담았다. 일하면서 아이들 키우는 많은 엄마들에게서 성모의 맘을 만난다. ©박정은<br>
'착한 엄마'라는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이 작품은 공부하며 아가를 돌보는 워킹 맘의 모습을 담았다. 일하면서 아이들 키우는 많은 엄마들에게서 성모의 맘을 만난다. ©박정은

하지만 여기저기 꽃들이 피어나고 나뭇잎들이 더욱 푸르러질 때, 우리는 저 찬란한 오월의 나무는 깊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 또한 내면의 행진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에 졸업을 하는 우리 학교의 어린 학생들의 코멘스먼트를 앞두고 마음이 쓰인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은 우리 학생들의 내일이 그렇게 밝고 쉬운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시대에 졸업을 하는 이 젊은이들의 행진에 더욱더 박수를 쳐 주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론 난 이렇게 두세 개의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해낸 그들의 용기와 젊음에 멋지다고 외치고 싶다. 누군가 내가 은퇴 후, 이 학교에서 보낸 어떤 순간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졸업식을 꼽을 것이다. 학위를 받는 학생들의 이름이 한 명 한 명 불리울 때마다, 가족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고, 나팔을 불어댄다. 그리고 그렇게 누리는 기쁨의 웃음소리는 교정의 풀들과 나무 잎새에 배어 있다. 나는 졸업식이 끝난 다음 날, 혼자 학교에 가는 습관이 있다. 학생들의 졸업을 기뻐하던 사람들의 전율이 남아 있는 고요한 학교를 걷는다. 그리고 학생들을 기억하면서, 이런 날에는 묵주 기도를 한다. 

그래서인지, 내게 오월은 너무나 당연히 성모님의 달이다. 성모의 밤 같은 멋진 기도의 밤은 없어도, 꽃향기 풍겨 나오는 저녁 산책길에는 나직한 성모송이 잘 어울린다. 초저녁 달이 걸린 오월의 어느 거리라면, 삶의 한 획을 그으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딛는 내가 아는 사람들을 성모님께 맡겨 드리기에 딱 좋다. 내가 사는 곳 버클리에는 장미 정원이 있다. 같은 수도회의 친한 수녀님 베스와 가끔 이곳을 산책하는데, 며칠 전 속이 꽉 찬 장미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베스에게, “와 이 장미가 난 너무 좋다. 꼭 작약처럼 생겼어” 하니, 꽃 가꾸는 데 조예가 깊은 그는, 이렇게 속이 꽉 찬 장미가 원래 장미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속이 성근 장미는 사람들이 종자를 개량해서 만들어 낸 장미라고 알려 주었다. 

속이 가득찬 장미.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꽉 차고도 계속 열려 가는 내면을 담는다면, 그리고 그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잔잔한 축제다.&nbsp;©박정은<br>
속이 가득찬 장미.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꽉 차고도 계속 열려 가는 내면을 담는다면, 그리고 그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잔잔한 축제다. ©박정은

그리고 너는 왜 이 장미가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이 장미에게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했다. 내면으로 움직여 들어가는, 그리고 그 내면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 같아서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성모님의 삶을 상징하는 꽃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늙어도, 혹은 우리가 죽어도, 진리 혹은 하느님을 향하는 내면의 이 행진이 이렇게 꽉 차서 터질 듯이 그렇게 계속 열려지는 어떤 길이라면, 그런 신비라면, 우리를 둘러싼 외연의 삶이 힘들어도 견딜 만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누지 않고 혼자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학기는 유독 힘들었던 것 같다. 나도 학생들도 모두 너무 지쳤었다. 그렇다고 수업이 싫었던 것도 아니었고, 많은 미팅을 소화해 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장미의 속을 가만 들여다보다가, 내가 오월의 오후 햇살이 가지는 어떤 결을, 그리고 오후 두 시 산책을 하다 바라보는 하늘의 느낌을, 또 오후 네 시 한가한 카페에서 간단하게 음식을 시켜 놓고,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의 짜릿함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수업이 몇 시에 있고, 몇 분 후에 회의가 있고 하는 숫자로 된 시간을 읽는 방식으로는 저 장미 꽃잎들이 가리키는 내면의 움직임 속으로 들어 갈 수 없으며,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듯이 달려가는 외부의 삶의 속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결을 내가 감지하는 여유를 잃어버릴 때, 사실 삶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생명력은 얼어붙어 버리는 건 아닐까. 

꽃을 만나고 꽃을 피우는, 이 땅의 모든 성모. 호찌민 시의 어느 골목길에서 만난 성모님.&nbsp;©박정은<br>
꽃을 만나고 꽃을 피우는, 이 땅의 모든 성모. 호찌민 시의 어느 골목길에서 만난 성모님. ©박정은

내게 삶의 매 순간, 그 순간의 결을 곰곰이 생각한 삶은 성모님의 삶이다. 가난한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예수의 가장 완성된 제자로서 성모님의 삶은 오늘 내게, 잠깐 멈추어 서서, 생의 순간들의 그 다양한 결을 감지하고 또 느껴 보라고 초대한다. 그리고 일상의 궂은 자리에서 생명을 피우고 있는 이 세상 어머니들과 여성들의 마음에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가 가득하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성모처럼 안으로 안으로 흐르는 생명을 사는 복된 삶을 우리가 살아가기를 꿈꾼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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