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비자는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교회문화에 낯선 사람일 뿐이다"

▲ 사진/한상봉

내가 다니던 성당은 성직자나 수도자 뿐 아니라 일반신자들도 예비신자 교리를 담당했다. 단순히 예비자들을 위해 간식을 챙기고 출결을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다. 당시 본당 주임사제는 기존 예비자교리 방식, 즉 예비자들을 한군데 모아놓고 성직자나 수도자가 강의하는 교수식 방식을 벗어버리고자 했다. 너무 일방적이고 상호소통이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직자나 수도자만이 교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보지 않았고,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구역에서 교리봉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양성했다. 궁극적으로 구역의 기존신자들이 구역의 예비자를 책임지고 돌보자는 것이었다. 이 운용방식의 특징은 예비자에 우선을 둔, 개별적인 맞춤식 교리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맞춤식 교리로 이전보다는 한층 예비자에게 다가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구석구석 교회의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은 여전해 아쉽기는 매 한가지였다. (이 과정 중에 나도 교육을 받았고, 2년 전까지 본당에서 예비자교리를 약 3년간 이끌었다.)

예비자들은 왜 성당에서 아이처럼 주눅 들어 행동하는가

약 3년 동안 예비자교리를 하면서 의아스러웠던 점은, 예비자들이 교회의 문턱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하나같이 모두 유순한 어린아이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한 가정의 가장도, 사회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지도자도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주눅 들어 행동한다. 다소 심한 말로 하자면 거의 문맹 수준이라고 해야겠다. 왜 그런 것일까?

본당에서 예비자모집을 하고 나면 예비자환영식을 하는데, 처음으로 신앙을 접하는 사람이나 다른 종교에서 천주교로 찾아온 사람들을 맞이하는 날이다. 그런데 나는 여태껏 이 환영식이 너무 어색하고 불편하다. 말 그대로 환영식인데, 예비신자들을 배려했다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성호경을 긋고 주님의기도로 시작해서 영광송으로 끝내는 이 불친절함. ‘이제 당신들은 이곳에 왔으니 여기서 하는 대로 눈치껏 잘 따라하세요’, 그 뜻인가. 옆 사람 따라 성호경 따라 긋고 주님의 기도를 찾아서 읽는다 해도 이건 너무 불친절하고 자기중심적이다. 첫 날부터 교회가 자기들만의 익숙한 행위나 기도로 처음 온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다.

어떤 경우는 더 지나쳐서 이렇게까지 얘기하기도 한다. “여러분이 다 자기 뜻으로, 자기 발로 여기 찾아오신 것 같지요? 나중에 아시겠지만 그것은 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부디 예비자교리를 무사히 끝내고 모두 다 세례 받으시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이 틀리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시의적절한 내용이나 표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서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비자들에겐 매우 뜬 구름 잡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리고 그냥 나중에 스스로 알도록 내버려두지 처음부터 그렇게 억지로 주입시킬 필요가 있을까. 예비자는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교회문화에 낯선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갈 동반자이다. 나에게 익숙하다고 아무 고민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면 불친절을 넘어 기득권자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생활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교리 일색

예비자교리가 시작되면, 약 4주나 6주 후엔 예비자 받아들이는 예식이나 신경전달식을 하게 된다. 받아들이는 예식은 이제 예비자들을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건데, 이건 오래 전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시절에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난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공동체 식구로 받아들일 때 했던 예식이라 한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지금도 필요한지 의문이다. 이건 그렇다치고, 사제가 경문을 쭉 읽어나가면 예비자들은 준비된 자료를 보고 순서에 맞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혹은 ‘아멘’, 또는 ‘네 믿습니다’라는 고백 아닌 신앙고백을 한다. 대상이 세 살짜리이거나 군대 같은 조직에서나 통용될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 고민없이,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들었다. 여기선 초등학교 입학식 만큼도 예비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교리 일정을 크게 아우르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자. 그래서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건설하자’로 압축할 수 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가 교리의 핵심이며 예수님 따라 실천할 덕목을 배우는 것이 교리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개 예비자교리는 첫날부터 생활과는 동떨어져 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고 부활했으며 승천했다’는 뜬 구름 잡는 교리 일색이다. 예수의 죽음이, 부활이 그리고 승천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교리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추상적인 언어를 들이대고 지금 몰라도 나중에 알게 된다고 말하니, 예비신자들은 어린아이처럼 유순하게 행동하고 삶과 신앙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교회를 찾은 사람들을 이렇게 문맹수준으로 만드는 데에는 교회의 책임이 크다.

순종만 가르쳤지, 의심하고 묻고 따지는 걸 가르치지 않는 교회

우리교회는 신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만 가르쳤지 의심하고 묻고 따지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비자환영식만 해도, 예비자 받아들이는 예식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권위적인 교회의 면모를 예식과 신앙 행위 속에 담아 자신도 모르게 대대손손 이어가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오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강제하고 있다.

우리는 예비자들이 교회에 왜 찾아왔는지,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지에 상관없이, 교회에 찾아온 사람들을 적당히 대접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잘 전할 수 있을지는 뒷전이고, 얼마나 더 많이 세례를 받게 할지가 우선인 건 아닐까. 교회가 세례자를 얼마나 많이 배출할까, 어떻게 하면 타종교인을 이쪽으로 개종시킬까 하는, 개종과 입교권면을 마치 신앙의 최대과제처럼 생각한다면 슬픈 일이다. 사실 예비자교리는 예비자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다. 우리가 과연 신앙인답게 잘 살고 있는지 환기하는 시간이며, 예비자들이 세례로 다시 태어날 때 기존신자들은 세례를 갱신하는 축복의 시간이다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강한 교회공동체만이 건강한 신자를 낳을 수 있다. 교리시간에 하느님을 의심하기도 하고 예수님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계 속에서 '나'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 뿐만 아니라, 빈곤 때문에 물로 배를 채우는 어린 아이들이나 쪽방을 전전하는 가난한 이웃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우리를 둘러싼 삶을 나누는 교리시간이 되어야한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게 서로 돕는 공동체야말로 예비자들에게 값진 ‘새로 태어남’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