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1909년 10월 25일, 하얼빈 역사 주변의 여관에 머물던 안중근은 줄칼로 7개의 총알에 십자 표시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을 발사하고 나머지 3발은 수행원을 쏘았다. 총알은 하나 남아있었다. 이어 혈서로 '대한 자주'를 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꼭 시간이 부족해서 총알이 남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 3월 26일은 안의사 서거 98주년이었다. 서거 100주년을 맞춰 여러 학술 심포지움과 기념관 확대신축, 여러 문화사업이 계획되어 있고 내달 4월이면 유해발굴 팀이 안중근 의사가 묻혔다고 전해지는 뤼순(旅順) 감옥묘지를 발굴하러 떠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일의 기획 진행과정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 스산한 기분이 든다.


그동안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으려는 시도를 해볼 만큼 해본 북한이 아무 성과를 이루지 못했던 이유가 유해가 묻힌 장소를 정확하게 고증해주는 자료가 없을 뿐더러, 묻혔다는 설이 있는 지역도 이미 주택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1986년 김일성 주석이 직접 뤼순 감옥을 방문해 유해발굴을 요청했지만 발견해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정황인데 근간에 들어서 남한이 본격적으로 유해발굴을 시도하고 있다.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건만, 굳이 일을 진척시키는 이면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배어있다는 소문이다. 여러 기념사업을 통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불순함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러는 정권의 이미지를 안중근 의사를 통해 만들어내고 그 이데올로기를 정권안정에 이용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다며 비판하는 측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기념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사람과 기관들이 모두 친일파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부터 좋지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듯하다.

이십대 초반, 구립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어와 나는 얼떨결에 재경해주향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고향이 해주라 늘 그 모임에 나가야 한다던 그 친구는 혼자 가기 싫다며 같이 가자고 졸랐었다.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 서먹했지만, 해주, 진남포라는 지명을 듣고 머리속에 안중근 의사가 떠올라 해주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 따라 갔었다.

모임은 1세대 어른들이 모두 늙어가는 마당에 2세대 자녀들이 혹시라도 고향을 잊고 돌아갈 의지를 상실할까 하여 한 달에 한 번(혹 일 년에 한 번?)씩 만나 식사를 나누며 고향 이야기를 하는 모임이었다.

북쪽 지방 사람들답게 고기를 넉넉히 먹는 그분들 곁에서 재밌는 얘기를 들으며 덤으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일찍 신문화를 받아들인 데다 산악지대(?) 사람들이라 내 고향 충청도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구월산과 해변의 발전소지대를 이야기하면서 고기를 집어주시던 그 어른들에게선 관대함이라고 느껴지는 여유와 더불어 절망의 입자가 떠도는 한이 뿜어져 나왔던 것 같다. 모든 걸 읽어본 사람들이 지닌 모순된 감정이었을까...?

안중근 유해 발굴 작업을 둘러싸고

안중근(安重根 토마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뤼순 감옥 접견실에서 만난 본당 신부 빌렘과 두 동생 정근, 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요즈음 갑자기 열기를 띄는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은 이 유언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니 후손인 우리로서는 마땅하고도 옳은 일일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가톨릭 신자로서뿐 아니라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서도 드물게 어떤 허물도 없는 분이 아닐까 싶다. 저마다 조금씩의 오점을 남기는 게 사람의 한 평생일 텐데.

안중근 의사의 일생 중에 당시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와의 만남을 기록한 글들은 교회 행정가로서의 처신이 필요(?)했을지 모르는 주교님과 열혈 신자로서 예수의 뜻을 이루려는 평신도의 갈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한말과 일제시대 가톨릭이 우리 민족을 이끌어가며 지도한 방법은 깊이 숙고해보지 않더라도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런 탓이었는지 오랜 동안 안중근 의사는 가톨릭신자가 아닌 것처럼 대해온(?) 것 같은데 근래 들어 무척 반기는 것 같아 당혹스럽지만 다행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안중근의사는 황해도 해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부모 형제는 물론 친인척도 많았다. 그들은 저마다 안의사의 뜻을 이어받으며 독립운동가 가문을 이룩했다. 다만,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 마태오가 중일전쟁 당시 처가의 권유에 따라 상하이에서 아편장사로 치부했으며 후에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고국을 방문하는 우를 범한 게 안타까울 뿐이다.

당시 서울 장충단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름을 딴 박문사(博文寺)를 짓고 대외전쟁에서 죽어간 일본군을 애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의 상징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데려와 마침 박문사에 와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눈물의 악수 장면을 연출했다고 한다. 내선일체를 대내외에 공표한 것이리라.

1905년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의 가쓰라 내각의 총리 가쓰라와 식민통치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이 앞장 서 만들어낸 강제점령 조약이었다. 가쓰라는 역사 시간에 배우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미-일간 두 외교부문의 우두머리인 가쓰라와 태프트가 만나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묵인해주는 대신,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강제점령하는 걸 간섭하지 말라는 내용의 밀담이었다. 결국 본국의 총리 가쓰라와 여러 번의 총리직을 거쳐 식민지 한국의 초대통감을 맡은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의 국권을 탈취해간 일본 극우세력의 간판인 셈이다.
농민의 아들로 자수성가한 야심의 사나이

1909년 초대통감직을 사직하고 만주를 사찰하러 나간 이토의 목적은 하얼빈에서 러시아의 재무상 코크초프를 만나 만주철도 이권과 한반도, 만주 일대를 일본 제국의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루고 이어 러일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었으나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국내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청나라로부터 항복은 받아냈으나 이미 서구 열강이 청나라를 조차지로 장악하고 있어 일본이 들어오는 걸 막고 있었고, 러시아는 재정악화로 일본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피폐해진 일본의 경제여건은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성행하며 일본사회당을 구성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극우세력과 군부세력은 러시아로부터 만주와 한국에서의 이권을 얻어내어 일본내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실행하고자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는 러시아 수비대의 보호를 받으며 코크초프의 마중을 받고 이미 그 곳에 진출한 일본인들과 인사를 나누려다 러시아 수비대 뒤편에서 안중근 의사가 발사한 3발의 총에 모두 맞았다고 한다. 빈사상태에서 이토는 쏜 사람이 누군지를 물었고 수행원은 한국인이며 이미 체포되었음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이토는, "바보 같은 놈!" 하는 말을 하고 숨이 졌다고 한다.

일본지폐 천 엔의 모델,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보호조약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평을 내놓기도 한다. 그는 일본 국내 정치에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걸 막아내는 방패막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안중근의 저격 사건으로 그가 죽자 일본은 군국주의로 내달리게 되었으며 한일합방도 그 와중에서 이루어진 듯이 말하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토 자신이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자수성가한 야심의 사나이였으며 메이지 유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메이지 시대의 법률안을 초안하며 내각제를 실시하여 자신이 초대총리가 되었고 이어 3번이나 총리직을 역임한 사람이다. 메이지 유신 자체가 일본의 에도막부 시절 설움을 당하던 지역의 (하급)무사들이 주동이 된 반란이었던 만큼, 이미 그가 군사적 도전을 몸에 익힌 군국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한다.

테러리스트의 마음을 이해한 사나이

친일파 출신들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확대신축하고 유해를 찾아 나선다고 촉각을 세우는 요즈음, 안중근과 동시대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라는 시인을 알게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에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다는 소식에 대한 소회를, "나는 한국인의 애처로움을 알아. 그들을 진정으로 미워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 관대한 마음에 정(情)을 아시는 공작(이토 히로부미)도 나와 함께 한국인의 심정을 슬퍼하실 것이다."라고 적어두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도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한 듯하다. 일본 국내 정치에서 이토는 청렴하였으며 중립적이고 현실적인 안목으로 정치를 이끌어 국부(國父)로 대접받는 인물이니 우리의 감상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인은 <9월 밤의 풍경>이라는 시에서 메이지 유신의 가파른 욕망을 지켜보며 "...세계 지도 위, 이웃의 조선 나라 검디검도록 먹칠이 되고 있다. 가을바람을 듣는다... "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코코아 한 잔>이라는 시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듣고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은 일본군부와 우익정권이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그룹을 탄압하고 검거하는 과정에서 총살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쓴 시라고 한다.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한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끝없는 논쟁 후의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모금을 홀짝이며
혀끝에 닿는 그 씁쓸한 맛깔로,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1911.6.15 지음)


이시카와 타쿠보쿠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데뷔 시절, 잠깐 젊음의 이상을 노래하며 천재적인 시인으로 등장하다 곧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환경 아래서 아이들을 지키려 교장 배척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이후 이시카와는 다른 직장도 구하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견디느라 폐결핵에 감염된다. 가난을 못 견디고 아내는 집을 나가버리고 시인은 늙은 어머니를 업어보고 너무나 가벼워진 어머니가 애처로운 나머지 세 걸음을 걷지 못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이들이 나의 형제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일본문학사에서 이시카와 도쿠보쿠는 메이지 시대의 관념적인 시풍을 벗어나 처음으로 서민의 삶이 깃든 시를 쓴 시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시풍은 우리의 시인 백석(白石, 1912-1963)을 매료시켜 그가 가장 존경하며 본받고 싶은 시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백석은 월북-납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어 중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며 조선의 조선인의 시답다는 평을 들으며 사랑받는 시인이다. 시인 윤동주가 백석의 시집을 구하려고 애쓰던 편지글들이 남아 있다. 백석의 시를 읽으며 윤동주 시인은 시작(詩作)을 했다. 그래서 이들의 시세계는 교집합이 넓다.

고뇌하는 지식인, 다쿠보쿠에게서 필명을 딴 백석

일본은 페리제독 군함의 협박 아래 문호를 열고 서구 제국주의를 배웠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몸체를 제국주의로 바꿔 다시 태어난다. 게다가 직접 군인들이 정치계로 밀려들어온 군국주의 일본은 그 기동력이 한층 상승한 체제였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이러한 메이지 시대의 탐욕스러운 대륙침탈의 욕망을 고민하는 일본 지식인이었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해서 실직자가 되어 곤경에 처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이름을 따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사건을 히틀러 치하의 본 회퍼 목사님과 견주며 정당방위론에 가까운 신학을 펴며 안중근 의사를 변호하는 교회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러나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의 고위 성직자 가야파가 예수 하나를 로마에 넘겨주면 유대민족의 안전을 보장받으리라는 논리를 펼치며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이토 히로부미도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나의 생명으로 죽기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70세의 노인으로 저격 당시 30세인 안중근에게는 아버지의 연배이다. 이토는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을 하다 집을 나간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간 집에 받아들여져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 가난한 시절, 그에게 밥을 넉넉히 주었던 어느 하녀를 잊지 못하고 끝내 그를 찾아 보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원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지방의 토호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황해도 관찰사는 동학도들이 해주감영을 침탈한 것을 안태훈에게 알려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안태훈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동학도들을 소탕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학도들이 사용하던 정부미를 빼앗아 안태훈의 민병에게 먹인 것뿐인데, 동학란이 가라앉은 후, 대한제국 정부 관료들이 안태훈에게 정부미 일천 포를 내놓으라는 협박을 해왔다. 그러자 그는 천주교의 신부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이때의 만남으로 신자로 거듭나게 된 사람들이다.

마지막 양심의 총탄 한 발

1909년 10월 25일 밤, 하얼빈의 어느 외진 방에서 7개의 총알에 십자 표시를 하던 안중근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다음날 이토와 수행원들에게 6발을 발사하고 한방은 남겨둔 이유가 무언지 헤아려 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죽어 마땅(?)한 벌레만도 못한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그를 끝내 시베리아 유형지를 자청하게 만들고 거기서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른 생명을 해할 자격이 없음을 자각한다. 어느 산문에선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식인이란 자신의 이마에 총을 겨눈 사람들이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여명의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시대만큼의 어둠을 소유한 사람들일 것이다. 안중근 토마의 생애는 가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늘 외세의 욕망 앞에 벌거숭이로 온갖 고역을 다 맛보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낯선 타지, 도쿄에서 소설가로 일어서보려다 실패하곤 돈이 떨어져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옷을 저당 잡히고 빌려온 돈 중에서 덜어내어 하얀 목련과 꽃병을 샀다고 한다.

나는 안중근 의사가 남겨둔 십자 표시의 총탄 한 발을 하느님 앞에 선 자의 피 같은 양심으로 읽는다. 가당치 않은 순간에 사보는 한 송이 목련처럼 자신의 이마를 겨누는 양심의 총탄 한 발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 아닐까.

/이규원 200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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