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없는 교회의 장애성”

지난주 우리신학연구소 온라인 세미나에서 시각 장애인으로 60여 년을 살아온 나종천 씨의 일성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교회의 장애인 사목의 현재를 이렇게 명료하고도 비범하게 집어낸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강의를 들으면서 성서와 사회교리에 자신의 신앙을 녹여내 얘기하는 내용은 마치 한 편의 잘 엮어낸 ‘장애인을 주제로 한 평신도 신학 논문’을 접하는 듯했다. 그동안의 고민을 신학적으로 풀어 나가는 조리 있는 말에서도 그랬지만, 자신의 삶과 신앙을 녹여내어 ‘신앙생활권’, ‘상호선교’, ‘영적 장애’, ‘장애인 빠진 본당의 장애성’ 등의 압축적이고 정제된 명제로 담아낸 데에서는 그 체험과 고민의 깊이를 짐작하게 했다. 또 본당을 ‘지역적 통합사목’에서 바라보는 사목적 안목은 장애인 사목의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교회 당국이 꼭 들어야 하는 ‘변방의 목소리’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올해 상반기 온라인 세미나를 ‘차별’을 중심 주제로 잡고 논의하는 과정이 사전에 있었지만, 나종천 선생의 얘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집중을 요구하는 정밀한 것이었다. ‘신앙생활권’이라는 말도 그중에 하나다. 아시아의 공산 국가들이거나, 힌두교, 이슬람, 불교 등 다른 주류 종교의 득세로 소수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는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 나라들도 아닌데, 한국에서 ‘신앙생활권’이라니! 그동안 무심코 당연하게 여겼던 신앙생활이 다른 사람에게는 회복되어야 할 권리였다니. 뒤늦은 자각도 자각이지만, 신앙생활을 중요한 권리의 하나로 접근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삶이 놀라웠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광범위한 것이지만 중심 메시지는 복잡하지 않다. ‘장애인들이 격리가 아니라 일반 신자들과 함께, 또 나아가 주민들과 함께 지역에서 떳떳하게 사는 것’이다. 따라서 시청각 장애인이나 농인을 위한 본당을 따로 만드는 것은 잘못된 사목 정책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판단은 어떤 이론보다는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979년 ‘가톨릭 맹인선교회’를 설립하고 각 교구와 전국으로 확대하는 데에 힘을 쏟았고, 12년 전에는 여주로 이사해 본당을 근거지로 시각장애인 복지 활동을 펼쳐 왔다. 그 결과 3년 전에 ‘함께 길벗’이라는 ‘장애인 사도직 단체’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가 ‘심신 단체’라 하지 않고 굳이 ‘사도직 단체’라고 강조한 것은 그가 제시한 ‘상호 선교’와 관련이 깊다.

한마디로, 시각 장애인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화의 주체이며 따라서 하느님나라 건설에서 동등한 파트너로서 서로 배우며 실천해 가자는 뜻이 곡진하게, 그러나 비타협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장애인 신학연구소’를 제안한다. 현실 적합하고 합리적인 사목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신학과 사목의 불모지인 한국 교회에 새 피를 수혈하는 것이 급하기 때문이다. 교회 당국은 ‘잘 알고 있으니 니가 알아서 해라’고 내치지 말고 제발 잘 ‘경청하기’ 바란다. 이러한 작지만 지혜로운 목소리들이 모일 때 교회는 진정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우리가 겪어야 하는 진정한 부활의 의미가 아닐까.

바티칸 시국. (사진 출처 = Pxhere)
바티칸 시국. (사진 출처 = Pxhere)

교황청의 구조 개혁 단행- 지역 교회도 가능할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3월 19일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를 발표하고 교황청 조직 개편의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이 조직 개편이 의미하는 바를 추적하면서 이번 교황령을 살펴보니 어쩌면 교회 전체의 구조 개혁 가능성과 그 시작을 보여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 동안 제도교회에 대한 비판을 단 한 줄도 허하지 않아 성직중심주의와 이음동의어로 여겨질 법한 한 대표적 교회 매체가 이를 전혀 다른 톤으로 보도했다. ‘교황청 구조 개혁’ 또는 ‘대대적인 구조 개혁’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어 새삼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만큼 개혁의 물결이 가깝다는 징조로 읽힌다. 여기에 간단히 그 핵심 내용을 소개해 보면 이렇다.

눈에 띄는 변화는 교황청 중앙조직의 주요 형태였던 청(Congregation)과 평의회(Council)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 부서(Dicastery)로 통합한 구조 혁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상징적이고 의미 있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한 부서의 장을 맡을 수 있다”1)고 명시한 대목이다. 이는 1988년 요한바오로 2세가 교황령 ‘착한 목자’(Pastor Bonus)에서 특기한, ‘반드시 추기경과 대주교가 성과 평의회의 장관과 의장을 맡는다’는 조항을 근본에서 바꿔 놨다. 특히 “교황청 관료조직(Curia)의 이 새로운 변화(aggiornamento)는 통치와 책임의 역할에 있어 평신도 여성과 평신도 남성(laiche e laici)의 참여를 제공해야 한다”(1부 10항)2)고 명시하고 있는 대목에 눈이 번쩍 뜨인다. 이는 다음 항에서 더 확고한 톤으로 강조된다.

“교황청의 모든 관료 조직은 로마 교황에게서 받은 권한으로 인해 교황의 직무(primatial munus)를 행사하는 데 있어 교황의 이름 아래 위임받은 권한으로 특정한 사명을 수행한다. 이러한 이유로 세례받은 신자 중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능력, 통치력, 기능을 바탕으로 부서 또는 기구를 이끌 수 있다.”(2부 5항)3)

이 글에서 인용한 <LaCroix>의 칼럼을 쓴 로버트 미켄스는, ‘교황청이 이러하다면 이런 변화가 지역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대를 밝혔다. 미켄스는 지역 교회의 교구장 주교는 평신도가 특정 분야들에서 그를 대신해 주교직을 수행케 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스위스의 라우산느(Lausanne) 교구 샤를 모레로트(Charles Morerod) 주교가 이미 그 일을 시작했으니, 적어도 한 사례는 있지 않느냐며 주교들이 교황령에 따라 권력을 분산하기를 바라고 있다.4) 드물지만 한 지역 주교회의 사무총장과 한 교구 사무국장을 평신도에게 맡기는 예도 있으니 미켄스의 제안이 전혀 엉뚱한 것이라고 볼 이유는 없는 듯하다. 실로 교황청의 권력 분산, 곧 탈중앙집중화야말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개혁 의제 가운데서 핵심 중의 핵심이다. 교황은 이번 교황청 꾸리아 전면 개편을 ‘공동협력성’(synodality), 곧 교회의 삶과 사명을 위한 모든 세례받은 가톨릭인의 공동 책임감을 촉진하는 지속적인 과정과 연결시켰다. 또 교황은 이번 구조 개혁이 교회의 “선교적 회심”의 하나라면서 이 쇄신 운동은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고유한 사명의 이미지”를 교회가 더 많이 닮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고 묘사했다.5)

(사진 출처 = 바티칸뉴스)
(사진 출처 = 바티칸뉴스)

카오스의 위기는 창조로 가는 산통(産痛)

그러나 이러한 교황청 구조 개혁이 순항할지는 미지수다. 재임한 때부터 현재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사 및 지지와 또 철저한 반대라는 양극단의 반응에 직면했고, 또 앞으로도 그런 상황이 눈에 띄게 바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개혁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변화를 거부하는 교황청 관료, 지역 교회 주교, 보수적 평신도 등의 상당한 반대에 부딪혀 왔다. 2013년 '복음의 기쁨'이 출간됐을 때 ‘가톨릭이 드디어 변하는구나’라며 환호한 세계 시민들과는 무척 대조적인 반응이 아닐 수 없다. 그중에서도 아시아 교회는 잠잠하고 특히 한국 교회에서 교황의 개혁 의제는 밥상에 오르기는커녕 대문 앞에 서 보지도 못했다. 사실 교회 개혁 관련해 교황은 9년 동안 한국 교회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 왔다. 이제 그의 개혁 프로젝트를 본격화하고 어쩌면 결산하는 장이 될 3년에 걸친 ‘주교 시노드’를 포함한 ‘하느님 백성의 시노드’의 돛을 올리고 그 여정에 들어간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역시 반대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특히 독일 교회의 ‘시노드의 길’(Synodal Path)에 대해서는 그 소리가 곱절로 큰 거 같다. 그 한가운데 전 독일주교회의 의장이자 교황 자문기구인 추기경위원회의 구성원이며 교황청 재무평의회 의장이기도 한 마르크스 추기경(뮌헨-프라이징 대교구)이 있다. 최근 그는 ‘동성애적 행위의 도덕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변해야 하며, 교리는 절대불변이 아니므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해 한 미국 주교에게서 ‘공식적으로 사임하라’는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6) 또 다른 미국 주교는 온라인에 독일 교회의 ‘공동합의적 길’에 반대한다며 서한을 공개하였고, 미국 주교 49명을 포함해 주교 74명이 서명하는 일이 이어지기도 했다. 독일 주교회의 의장 베칭 주교는 서한을 통해 현 독일 교회의 움직임은 ‘교황을 포함해 절대로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공식 반박했다.

제임스 킨은 <The America>에 쓴 칼럼에서 3년에 걸친 시노드 절차가 1년이 지난 상황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들과 그것을 부추기는 이들이 없어진다거나 이번처럼 공개 반대가 그칠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흥미롭게도 ‘이런 논란과 혼란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느 정도는 바라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칼럼 제목처럼 어쩌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혼돈은 교황의 마음속에 있는 계획의 일부가 아니냐는 것이다.7) 물론 이런 판단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킨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다. 전 아일랜드 대통령이자 교회법 박사인 메리 매컬리스를 포함해 이미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런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과 교황만이 알고 있을 일을 누가 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여기에는 파 보면 보이지 않던 두 가지가 수면 위로 부상하는 듯하다. 하나는 ‘교황의 개혁과 독일 교회의 시노드의 길이 영 달라 보이는데 왜 어물쩍 물타기 하냐’고 항의하는 이들의 문제 제기마저도 이미 교황의 계획 안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성서의 창세기가 전하듯 창조는 가지런히 정리된 질서 속에서가 아니라 혼돈과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카오스 속에서 가능했음이 주는 시사점이다. 그걸 상기한다면, 지그재그까지는 아니더라도 진폭이 제법 느껴지는 교황의 행보도 이런 혼란 속의 창조를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무게가 실린다. 그렇게 보는 것은 교회 개혁을 향한 교황의 선한 마음을 믿기 때문이고, 또 그런 사심 없는 선한 마음이 하나둘 모여 창조라는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밖에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회 개혁을 위해 성가를 부르며 나아가자.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1) 편집국, '교황청 개혁 발표, “복음화부서” 제일 앞으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2.03.23.
2) Robert Mickens, “The next phase of Vatican reform will be crucial”, <LaCroix>, March 26, 2022.
3) 위의 글. 강조는 필자.
4) 2011년 베네딕토 교황은 도미니칸 수도회 신부인 모레로트 주교를 스위스에서 3번째로 큰 라우산느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주교 임명 당시 교황청립 안젤리쿰 대학 학장, 교황청 국제 신학위원회 총무, 파문된 르페브르 대주교를 추종하는 비오10세회와의 대화를 책임진 교황청 3인 중의 한 명으로 스위스 안팎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5) Cindy Wooden, “Pope Francis Promulgates Curia Reform Emphasizing Church’s Missionary Nature,” The Tablet, March 21, 2022.
6) James T. Keane, “Should Catholics worry about bishops disagreeing in public? Or is this part of Pope Francis’ plan?”, The America, April 19, 2022.
7) 위의 글.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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