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동체 수녀님들과 함께 본 영화 한 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영화 제목은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When love is not enough)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치유모임인 A.A를 시작한 빌 윌슨의 자전적 이야기로, 공동체 수녀님들이 ‘중독’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함께 시청하게 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알코올 중독자였던 빌이 사랑하는 아내의 지속적인 헌신을 통해 변화하고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치고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는 빌은 자신이 더 이상 스스로 알코올 중독이라는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인정했을 때, 하느님의 이끄심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고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뒤로 아내와 함께 알코올 중독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돕는 A.A를 조직하면서 헌신적인 삶으로 변화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빌은 중독에서 빠져나오는 12단계를 제시하는데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자신이 체험한 부분인 ‘나 스스로는 이 중독의 상황을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내가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빌은 아내인 루이스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알코올에 중독된 이후로는 알코올에 의존하여 작용되는 생각과 행동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었고 결국 수없는 맹세와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면서 루이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과정을 통해 이를 깨닫게 됨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첫 번째 단계의 의미가 그 무엇보다도 크게 와닿았습니다. 

평소에 특별히 무엇에 중독되어 있다는 인식 없이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혹은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기본적으로 나는 어떤 사고방식에 의존하고 있는지, 내 머릿속에는 어떠한 길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고 그 길에 의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때론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 또는 이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사고방식이 나의 행동을 좌우하고 다른 사람들도 이에 따르기를 바랄 때, 그것이야말로 순수하게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태도와 같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동안 어떠한 태도와 방식에 의지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옳다고 믿고 있으며 그 방식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끼는지,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편안한지 저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봄이 찾아오는 미시간 호수 ©김지혜<br>
봄이 찾아오는 미시간 호수 ©김지혜

현재 저는 시카고라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생활 방식, 새로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전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지녀 왔던 말하는 방식에서부터 생각하는 방식, 식습관까지도 새롭게 보도록 초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도전은 매번 어렵게 느껴지고, 특히 공동체 안에서의 대화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할 때 느껴지는 무력감은 늘 저를 영화 속 빌이 느꼈던 좌절감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환경 안에서 그동안 내가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살아왔는지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하고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 '이렇게 되어야지!'라고 고집했던 것들, '이런 방식으로 전개될 거야!'라고 믿는 생각이 적용되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면 오로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 제가 무력하다고 다시금 말씀드리는 것뿐임을 알게 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지금 주어진 새로운 환경과 도전이 결코 좌절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며 새로운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는 초대임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레나 마리아의 외침에 저도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의존하고 있었던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져 오직 하느님만을 새롭게 믿으라는 그분의 초대가 얼마나 달고 감사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은 제 안에서 새로워지라고 외침을 느낍니다. 또한 세상 안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여겼던 것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바라보도록 초대하심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한쪽에서는 전쟁의 고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울리고 있는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눈이 가리워져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메시지가 더 깊이 스며들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게 됩니다. 

이곳은 마치 날씨가 사순 시기를 함께 겪기라도 하듯 지난주까지 눈발이 날리곤 했지만 이제 서서히 미시간 호숫가에 올라오는 푸른 잎들을 바라보며 부활과 함께 봄이 왔음을 느낍니다.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봄의 기운과 함께 다시 한번 새롭게 부르시는 예수님께 기꺼이 다가가기 위해 오늘 하루도 저의 청력을 탓하기보다 영어에 조금이나마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결심해 봅니다. 

공동체에 마련된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 공간. ©김지혜<br>
공동체에 마련된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 공간. ©김지혜

김지혜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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