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엇이 황무지라는 시에서 고백했듯이, 사월은 잔인한 달이다. 죽은 듯한 나무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진통을 하고, 그 세밀한 떨림 속에 생명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익숙해져 버린 슬픔과 절망 속에 머무르는 죽음의 포근함을 뒤로하고, 다시 생명을 향해 나아가야 하기에 우리들의 영혼은 머뭇거리며 늑장을 부리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기쁨과 놀라움의 봄비라 하더라도, 기대하지 못한 어떤 것이 지니는 불편함을 껴안고 잎을 틔우는 긴장을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어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시 4월. 다시 한번 파스카의 신비,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만나야 하는 시간, 거룩한 시간 앞에 서 있다. 주 예수께서 성큼성큼 그 길을 가시니 우리도 주춤주춤 걸어 나가야 한다. 학교 교목 신부님께서 빨간 옷을 입고 학교 성당으로 좀 와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아침이어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데, 전례에 맞는 빨간 옷을 찾아 입고 서둘러 학교로 갔다. 오랜만에 오는 학교는 낯설 지경이었다. 성당에 들어서니, 이제 손을 조금씩 떨기 시작한 노 사제가 장식한 성지 주일의 제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빨간 제대와 커다란 종려나무 가지로 꾸며 놓은 성당 곳곳은 늙고 병든 한 신실한 영혼의 절절한 신앙고백 같아서 마음이 짠하다. 곧 은퇴를 앞둔 신부님은, 요즘 들어 부쩍 걱정이 많고,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셨다. 그래서 오늘 성당에 들어서자 마자 내가 건넨 인사말은, “신부님, 아무 걱정 말아요. 우리가 다 함께 하는 전례이니, 틀려도 상관 없어요”였다. 평소에 지나치리 만큼 완벽한 전례를 사랑하던 신부님의 성정을 아는 터라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제대 위에는 컴퓨터 마우스가 함께 올려져 있다. 줌으로 미사를 참례하는 사람들과, 성당에 초대된 일부 사람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는 이 방식은 노 사제를 더욱 노심초사하게 하는 듯했다. 그래서 미사 시작 한 시간 전에 와 달라는 조금은 지나치다 싶은 신부님의 요구에 아무런 토 달지 않고 달려갔다. 그러면서, 신앙하는 자의 마지막 뒷모습은 과연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알고 전 생애를 신앙하다, 생의 마지막에 이른 사람들은 그간 얼마나 많은 의혹과 실망을 삼켰으며, 어떤 신앙의 깊이를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노 사제가 정성껏 마련한 성지 주일 제대. 은퇴를 앞둔 성실한 사제의 떨리는 손길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뒷모습을 본다. ©박정은<br>
노 사제가 정성껏 마련한 성지 주일 제대. 은퇴를 앞둔 성실한 사제의 떨리는 손길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뒷모습을 본다. ©박정은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신학이 아니라, 진보적인 신학, 그래서 세상 한가운데서 고통받은 민중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학, 민중신학을 내게 가르쳐 주시던 서 광선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한결같이, 유머러스하게, 늘 정답게, 그리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가셨던 그분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홍콩에서 한 달간 아시아 여러 곳에서 온 신학자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었다. 선생님은 1980년대 반정부 성향으로 인해 해직 교수가 된 후, 영등포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다가 성령을 체험했었다 이야기해 주셨다. 그리고 내게, “소피아는 수도자니까 특히 맘 아픈 사람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성령을 체험하는 그런 신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추도 예배를 보다가 나도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열심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지 하는 결심을 해 본다.

오늘 성지 주일 미사를 드리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은 유독 나이 들어 보이신다. 그렇게 지친 몸으로, 늙어가는 나의 예수, 그분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것이고, 느릿느릿하게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실 것이다. 미사 중에 우리는 루카 복음의 수난 사화 중간 중간을 끊어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나에게는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사실 살면서 내 것은 하나도 없는 데,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생각하고,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순간들이 내겐 참 많다. 마치 내 시간인 것처럼, 그리고 내 능력인 것처럼.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모두 십자가에 달린 도둑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왕이면 십자가 오른편에 매달렸던, 하늘나라 전체를 훔친 도둑이 되고 싶다. 나도 그처럼,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 죽음의 거룩한 순간을 훔치고 싶다.

미사를 마치고, 이제 시작되는 성주간을 잘 지내기 위해 수업을 다 취소하고 기도 속으로 들어가 볼 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는데, 대학원생 한 명이 주저주저하면서 내 주위를 빙빙 돈다. “왜 무슨 일 있니? 학기 말 페이퍼는 잘 되어 가니?” 하고 물으니, 그제서야 “바쁘신 거 잘 아는데, 혹시 페이퍼 쓰는 거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아니 바쁘시면 정말 안 도와주셔도 되고요” 한다. 지난번에 페이퍼 쓰는 걸 도와준 학생이다. 그래서 난 성금요일 전례 후에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게 바로 하늘나라를 마지막 순간에 훔치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걸려 온 전화 한 통. 그는 몇 해 동안 심리적으로 힘들어 해 왔는데, “나 이제 다 한 것 같다. 더 이상은 살고 싶지 않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서둘러 나가 그의 이야기를 듣는데, 두 아이를 혼자 돌보는 싱글 맘으로 지친 그는, 양육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이젠 평안히 죽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죽음은 무섭지 않다고, 하느님은 어디에도 계신 것 같지 않다고 하는데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외로운 엄마 예수를 뵙고 나니, 맘이 얼얼하다. 그래서 그를 다독이며 돌아오는 길에, “주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소서. 제가 당신을 부축해 드릴게요” 하고 기도했다. 코로나 시대의 싱글 맘이 죽음의 달콤함을 이야기한다. 돌아오는 길, 바람에 벚꽃이 날린다. 낙화.... 마지막 순간에 천국을 훔친 누군가처럼, 나도 누군가의 십자가 같은 시간에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 세상은 온통 꽃이 피었고, 또 바람에 꽃은 떨어진다. 그 속에서 푸른 잎이 나오도록, 우리는 또 가슴 조이며, 함께 울며, 그렇게 늙어간다. 내 영혼의 예수님이 늙어 가듯이 나도 늙어 간다. 그렇게 또 잔인한 4월에 꽃이 피고, 지면, 신록이 시작될 것이다.

흐드러진 벚꽃. 바람이 불면 주저없이 떨어진다. 그 낙화가 지나가면 신록이 시작 될 터.&nbsp;©박정은
흐드러진 벚꽃. 바람이 불면 주저없이 떨어진다. 그 낙화가 지나가면 신록이 시작 될 터.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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