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의 기도

언젠가 기도를 해 줄 수 있겠냐는 그리스도인의 청을 받고 달라이 라마는 서슴없이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렸다. 십 년도 훨씬 전에 한 종교 서적에서 본 이 달라이 라마의 기도문은 내 식으로 살짝 가공되어 그 이후로 묵주기도 때마다 늘 구원송과 함께 바치는 기도가 되었다.

예수님
가난한 이들이 부유함을 얻고
슬픔에 싸인 힘없는 이들이 기쁨을 얻게 하소서
겁에 질린 이들이 더 이상 두려워 않고
묶인 이들이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약한 이들이 힘을 얻고
이들의 가슴과 가슴이 하나 되게 하소서

아직도 눈앞에서 수십만, 수백만 개의 촛불이 일렁이건만 마음은 오랜 가뭄으로 갈라진 흙먼지 피어오르는 논바닥처럼 메마르다. 대선이 끝나고 오래 곰삭혀 둔 생각들을 꺼내 정리해 볼까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력감 때문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에 걸려 열흘을 좋이 앓고 나니, 3월 첫 주에 마감을 받아 놓은 칼럼을 말일에나 넘길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 어려운 시국에는 차라리 입을 닫고 몸가짐을 똑바로 해야 할 때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쏠린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 어설픈 감성팔이나 양비론으로 신도들을 기만하는 ‘고급 속물들’을 경계해 온 지 오래이므로 어줍지 않은 감상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한편으로는 혹여 선거 이후 상심에 찬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되지 말자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본전 생각’(?)이 안 나는 것도 아니지만, 갈피 없는 마음이 어디 나 하나일까. 앞으로 5년, 수많은 이들이 흘릴 피눈물을 생각하면 저 달라이 라마의 기도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그것이 정녕 절실하고 절박한 매일의 삶의 기도가 되지 못했기에 이런 때늦은 후회로 혀를 차고 또 차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그것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습관화된 면죄부가 아니었는가.... 아, 이런 식으로 더 나가다가는 신파 아니면 주접이 붙을까 저어되니 여기서 말머리를 돌려야겠다. 일필휘지의 필력도, 상상력도 없으니 대선 바로 전에 쓴 내 글을 인용하면서 천천히 다시 숨을 골라 보자.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마르코스의 영광을 다시 한번’

오는 5월에 있을 필리핀 대선 후보로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들이 들고 나온 선거 모토다. 수백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한 1986년 1차 ‘민중의 힘 혁명’으로 쫓겨나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군사독재자의 아들이 이번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다. 수많은 이를 죽이고 인구의 대다수를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게 만든 장본인인 마르코스의 장기집권을 ‘필리핀의 황금기’라고 선전해대는 그 아들이 여론조사에서 과반의 지지를 넘고 있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건 마치 작금의 한국 대선 결과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스러워 하는 상황과 흡사해 보인다.

필리핀은 1차 민중의 힘 혁명만이 아니라 2001년 2차 대규모 시위를 통해 당시 각종 뇌물 스캔들에 휩싸여 있던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아로요, 아키노, 또 ‘마약과의 전쟁’을 명분 삼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수만 명을 살해한 현 두테르테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필리핀 정치는 백성들 대부분을 처참한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시위라는 실력 행사로 두 대통령을 권좌에서 내쫓아버렸음에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정치는 민주주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하고 국민은 두 세대 가깝게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가?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가 보고 듣고 체험한 바에 따르면, 가장 큰 원인은 적게 잡으면 30개 정도에서 많이 잡으면 150개나 되는 특정 가문(family)이 필리핀의 정치와 경제를 다 말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 마르코스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민중의 힘 혁명에 힘입어 권좌에 올랐고 심지어 노벨평화상까지 탄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가문이, 실은 농노들의 노동력으로 부를 축적한 대지주였다는 사실. 거기에 더해 그 아들 베그니뇨 아키노가 다시 대통령에 집권했지만, 엄청난 요구가 있었음에도 그는 ‘토지개혁’에 소극적이다가 막바지에서조차 자신의 집안에 묶여 일하던 농노를 해방시키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렇듯 소수의 족벌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족벌정치를 끊어내지 않고는 필리핀의 미래는 없다.”1)

엘리트 카르텔과 교회

한국은 필리핀과 같은 족벌 세력은 없지만 기득권 세력, 특히 파워 엘리트의 매우 강고한 카르텔이 사회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어서 필리핀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해방 이후 “어떤 정권 아래서도 생존해 온 적폐 1호인 정치검찰, 쓰레기보다 못한 찌라시 정치언론, 돈과 권력이라면 언제든지 몸과 영혼을 팔 준비가 돼 있는 매판 지식인 등의 기득권 세력”2), 또 신자유주의 최대 수혜자이자 첨병인 투기금융, 그것과의 ‘케미’인 재벌, 또 분단체제를 숙주로 기생해 온 수많은 수구 반공단체, 그것과의 케미인 지역 토호 세력 및 적폐 정치인, 등이 이번 대선에서 보았듯 촛불로 이뤄 낸 민주주의를 무참히 짓밟고 전복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어쩌면 이번 대선은 이 촛불 정신을 지키고 더욱 불타오르게 하여 더 많은,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발판을 공고히 할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의 깊고 고통스러운 나락으로 떨어져 내릴 것인가의 시험대였다.

수많은 정치평론가와 학자들이 패인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정세에 말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싸움이 더 고달파지고 길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필리핀의 상황도 녹록치 않다.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들과 살인마 두테르테의 딸이 비타협적 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뒤엎고 이번 대선에서 대타협함으로써 정치적 생존을 넘어 가장 막강한 대선 정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대선 꼴 나는 건 시간 문제다. 치밀한 계산 아래 준비된 이합집산이라거나 정치적 감각이 탁월해서라기보다는 저들은 우리에게는 없는 어떤 게 있는 듯하다. ‘이번이 아니면 다 죽는다’는 그런 절실함과 절박함 말이다. 생존을 위한 이런 필생필사의 절실함이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도 저 기득권 세력의 일부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약해 보이는 것들을 내리누르고 달라 보이는 것들을 온갖 갑질로 차별해 내는 기득권 부류 어디쯤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걸쳐 놓고는 아닌 척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더 찬찬히 또 꼼꼼히 살피고 닦고 또 닦아서 갈 길을 비추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에 굵은 족적을 남긴 한국 교회나 국민의 다수가 가톨릭인 필리핀 교회에게도 똑같은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보인다. 삶의 모든 차원을 거덜나게 하여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땀과 피조차 고갈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교회는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교회는 개인적 신앙과 영성을 강조한 반면 신앙의 사회적 차원을 방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체제 아래 강요된 고통을 동조 내지는 묵인하였음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패거리나 집단의식을 거부하면서도 서구 근대적 개인을 넘어서는 진정한 새로운 개인의 출현을 위해, 그 창조적 원천으로서의 신앙을 위해 교회는 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것은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과 난민, 온갖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과 빈민, 모든 억압 아래 있는 여성과 여아, 청소년과 청년  등 이 세상의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상처를 보듬고 이들의 목소리가 되는 데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교회의 남는 것만이 아니라 요긴한 것을 팔아서라도”3) 이 길에 나설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선명하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 황경훈, '촛불 혁명과 대통령 선거', <정의평화> 157호, 2022년 3월호, 2-3.
2) 위의 글.
3)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7, 31항, 한상봉, '영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 선교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0.16. 재인용.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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