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 제주도 강정에서 출발한 봄바람 길동무들이 3월 23일 오후에 밀양을 찾았습니다. 단장면 용회 마을 입구에서 만난 봄바람 길동무들은 제방길을 걸어 보라 마을에 있는 102번 송전탑까지 걸었습니다. 102번 송전탑은 2012년 1월에 분신하셨던 고 이치우 어르신 형제들의 논이 있던 곳입니다. 고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이라는 비극적 현장이지만, 끝내 765kV 송전탑은 세워졌습니다. 이 송전탑은 신고리 핵발전소 3, 4호기에서 생산된 전기가 눈물을 타고 흐르고 있었습니다.

고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하셨던 보라 마을의 102번 송전탑을 바라보고 있는 문정현 신부. 102번 송전탑은 고 이치우 어르신 형제들의 논이 있는 곳이다. 102번 너머로 산정에는 행정대집행 때, 마지막 농성장이었던 101번 송전탑이 보인다. ©장영식<br>
고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하셨던 보라 마을의 102번 송전탑을 바라보고 있는 문정현 신부. 102번 송전탑은 고 이치우 어르신 형제들의 논이 있는 곳이다. 102번 너머로 산정에는 행정대집행 때, 마지막 농성장이었던 101번 송전탑이 보인다. ©장영식

단장면 동화전 마을 권귀영 씨는 “처음부터 같이 싸우지는 않았어요. 근데 우리 마을 할머니들이 너무 당하시는 거에요. 그걸 보다 못해서 같이 하게 됐습니다. 송전탑 공사를 하는데 헬기로 실어 나르는데 정말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어요. 정말 억울하고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마을에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큰소리 치고 너무너무 속상해요. 그 사람들은 우리가 싸웠기 때문에 합의금을 받은 거 아입니까. 저는 그 돈을 절대 안 받을 낍니다”라고 말합니다. 권귀영 씨는 “송전탑 건설을 막아내기 위해 몇 번이나 죽을려고 했습니다. 약까지 먹었습니다. 한전은 돈으로 회유했습니다. 그동안 남편도 죽었고,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111가구가 한전의 돈을 거부하며, 합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밀양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밀양대책위 남어진 활동가는“저 산 위에&nbsp;101번 농성장이 있었습니다.&nbsp;전기도 물도 없어서 산에 오를 때마다 물을 지고 갔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nbsp;©장영식<br>
밀양대책위 남어진 활동가는“저 산 위에 101번 농성장이 있었습니다. 전기도 물도 없어서 산에 오를 때마다 물을 지고 갔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장영식

밀양대책위 남어진 활동가는“저 산 위에 101번 농성장이 있었습니다. 전기도 물도 없어서 산에 오를 때마다 물을 지고 갔습니다. 행정 대집행이 들어올 때 한전 직원들이 현장에 있던 나무들을 다 베어 버렸습니다. 그러고서는 작은 나무들을 새로 심었습니다. 그 나무들이 벌써 많이 자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녁 6시 30분. 밀양 영남루에서 촛불 집회가 열렸습니다. 밀양과 청도 그리고 강정이 만난 집회였습니다. 오랜만에 뵙게 된 밀양 어르신들은 야속한 시간의 흐름을 말해 주듯이 몰라볼 정도였습니다. 집회 도중에 어느 분은 하우스에서 일을 하다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오셨다가 잠시 쓰러지기도 하셨습니다.

단장면 동화전 마을 권귀영 씨는 "송전탑 건설을 막아내기 위해 몇 번이나 죽을려고 했습니다.&nbsp;약까지 먹었습니다.&nbsp;한전은 돈으로 회유했습니다.&nbsp;저는 그 돈을 절대 안 받을 낍니다"라고 말했다.&nbsp;©장영식<br>
단장면 동화전 마을 권귀영 씨는 "송전탑 건설을 막아내기 위해 몇 번이나 죽을려고 했습니다. 약까지 먹었습니다. 한전은 돈으로 회유했습니다. 저는 그 돈을 절대 안 받을 낍니다"라고 말했다. ©장영식

청도대책위 이은주 씨와 밀양의 김옥희 씨가 봄바람 길동무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은주 씨는 “정권이 바뀌어도 괜찮습니다. 언제 어느 정권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준 적이 있었나요. 우리는 우리끼리 연대하고, 버텨내면 됩니다. 강정도 밀양도 청도도 하나입니다”라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발언을 해 주셨습니다. 김옥희 씨는 “그냥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다가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끝까지 함께합시다”라고 말을 맺었지만, 그 발언 안에는 밀양의 아픔들이 녹아 있었습니다. 밀양과 청도의 118세대가 합의하지 않고 버티는 힘은 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밀양 투쟁의 상징인 영남루에서 밀양과 청도대책위 그리고 봄바람 길동무들이 주최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nbsp;©장영식<br>
밀양 투쟁의 상징인 영남루에서 밀양과 청도대책위 그리고 봄바람 길동무들이 주최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장영식

강정에서부터 동행하고 있는 딸기 씨는 “서울과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공장을 돌리기 위해 이 모든 일이 벌어집니다. 너무나 끔찍합니다. 전기가 눈물을 타고 흐른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누리는 일상은 다른 누군가의 눈물로 일궈진 결과입니다. 불편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입니다. 그리고 이 진실을 알게 된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내가 편리하고, 편안해질 수 있는 이 체제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합니다.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 사랑이었다.&nbsp;©장영식<br>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 사랑이었다. ©장영식

문정현 신부는 월성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 집에 세 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너무 슬펐습니다”라며 밀양 송전탑 102번의 사연과 권귀영 씨의 발언을 듣고도 참 슬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정현 신부는 봄바람 길동무들이 찾아가는 곳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연들과 아픔들을 듣고 보면서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 깨우침을 위해 늙은 사제는 안락한 삶보다는 길 위의 삶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언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문정현 신부는 ‘일강정의 노래’를 밀양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밀양 어르신들의 투쟁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헌가였습니다.

문정현 신부는 "일강정의 노래"를 밀양으로 개사해서 불렀다. 밀양과 청도&nbsp;어르신들의 투쟁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헌가였다.&nbsp;팔순이 넘은 늙은 사제가 입고 있는 조끼 뒤편에는&nbsp;“사랑이다”라는 글귀가 선명했다.&nbsp;©장영식<br>
문정현 신부는 '일강정의 노래'를 밀양으로 개사해서 불렀다. 밀양과 청도 어르신들의 투쟁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헌가였다. 팔순이 넘은 늙은 사제가 입고 있는 조끼 뒤편에는 “사랑이다”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장영식

팔순이 넘은 늙은 사제가 입고 있는 조끼 뒤편에는 “사랑이다”라는 글귀가 선명합니다. 봄바람 길동무들의 순례는 평화를 위한 연대입니다. 연대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영식(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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