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신앙인의 선택 3] 2월 20일 연중 제7주일 복음 묵상

2월 4일(금)부터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전까지 5주간 '선거와 신앙인의 선택'을 주제로 주일 복음 묵상을 연재합니다. 집필해 주신 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좌파와 우파 등 이분법적 흑백 논리로 가득합니다. 의견과 입장이 다르면 ‘악’으로 규정하고 무차별 공격하는 세상입니다. 자본을 섬기는 맘몬의 신도들이 더 많은 자본을 갖기 위해 권력을 탐하고, 권력을 가진 자가 더 많은 부를 불법으로 취득하는 악순환의 고리 안에서 약자인 피조물들과 가난한 이들은 더 내몰리고 있습니다. 신음하는 지구 생태계와 가난한 이들의 절규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절규를 듣고 보고, 마음 아파하시며 모세를 보내셨던 하느님의 선택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제1독서 1사무 26,2.7-9.12-13.22-23)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병사들과 함께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여러 번입니다. 사울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그는 원래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잘 돌보는 성실하고 고귀한 왕이었으나, 자만심과 두려움, 질투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멀어지고 끝내 파멸하는 인물입니다. 겸손과 성실, 애국심까지 가졌던 왕 사울이 공동선보다 자신의 권력에 집착하여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권력에 집착하게 되자 주변의 모든 이가 자신의 왕권을 탐하는 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그의 삶은 고통과 불안뿐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면 척결하는 포악한 왕이 되어 갔습니다.

반면 다윗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했고 하느님께 의지하며 하느님의 뜻을 묻는 사람입니다. 볼이 붉은 소년이었던 다윗이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 전장을 거치면서 장수로 성장하게 되자 백성들이 환호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 18,7) 사울의 질투는 극에 달했습니다. 하느님께 향한 시선을 거두고 자기의 꿈을 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결국 수차례에 걸쳐 다윗을 죽이고자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광야를 헤매고 있는 사울에게는 국가도, 백성도, 하느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집착, 그리고 증오만이 증폭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 때문에 그를 존중했고, 죽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고, 군사들의 굶주림을 걱정하는 따뜻한 리더였습니다. 왕이 되어서도 하느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간청하고 의지하였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승리', 프란체스코 페셀리노.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다윗과 사울의 승리', 프란체스코 페셀리노.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두 번째 아담,(1코린 15,45-4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한쪽 뺨을 맞거든 다른 뺨을 대주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루카 6,27-38) 참 불편합니다. 누군가 내 뺨을 치면, 다른 뺨을 대 주어야 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바이러스 시대에 오면서 전 세계는 ‘STOP-멈추라!’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의 파괴와 폭력도 'STOP-멈춤!'이고, 우리 사는 세상에 작동하는 모든 것에도 'STOP-멈춤!'입니다. 이 멈춤은 자연적으로 우리 걷는 길을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 발밑,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세상도 제대로, 잘 보게 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강해지려고 힘을 기르고 부를 축적하고 지식을 높이고, 권력을 쟁취하는 이 바벨탑의 현장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누군가는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으면서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선언을 해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세상에로의 ‘출발!’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비규환의 현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지금 아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본을 축적하고 권력을 쥔 자들도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행복하다면 이런 세상을 가중하는 짓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다른 세상을,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꿔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은 ‘다른 삶’을 보여 주셨고, 걸어가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대선 정국에도 오늘의 말씀처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기득권이 옹호하고 환호하는 사람이 있고, 기득권에 철저히 배척당하며 짓밟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장 가난한 이로 태어나셨고 기득권들에게 배척당하고 모욕을 당하다가 마침내 처형당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 관심과 편파적 애정을 보이셨고, 소외되고 배제당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폭압적 지배의 세상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서로에게 가하던 폭력을 멈추고 ‘다른 세상’을 살아가도록 가르쳤고, 당신 삶과 죽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오늘 우리는 두 사람을 봅니다.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한 이를 돌보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대동세상(大同世上)을 꿈꾸는 한 사람. 또, 기득권의 갖은 혜택을 누리며, 가난은 그림책에서나 보았을 사람, 자신의 칼은 어떻게 휘둘러도 정의와 공정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고 모든 이가 각자의 꿈을 이루도록 지원하고 이끌어 갈 권한을 얻으려 하는 사람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탐하며 더 큰 부를 채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권력에만 집중하고 집착하는 사람에겐 공동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울이 그랬듯이 오직 탐욕으로 가득 찬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 공정과 정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중심으로 사고하며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거칠 것 없는 제왕의 자리를 탐하는 사람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 빼곡하게 채워진 삶의 경력과 이력서를 가진 그가 사람을 보살피고 다독일 것입니다. 이제 그와 함께 엄혹한 현실 경험에 기반을 두면서 인간사회의 참된 발전을 꿈꾸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권위의 원형을 보여 주신 것처럼, 지금 우리 세상에서도 보듬고, 통합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갈 통합적이고 실천적 서번트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인격의 가늠은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상식을 무시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제국주의적 제왕 리더십을 꿈꾸는 사람에게 시민이란 그저 표몰이를 위한 ‘1회용품’일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을 위해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정책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좋은 ‘사도’입니다.

조진선 수녀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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