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튀기’라고 불렸던 그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혈인’은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20년 11월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앤디 김’, ‘영 김’, ‘미셸 박 스틸’, 그리고 ‘메릴린 스트릭랜드’ 등 4명의 한국계 미국인이 당선되었다. 한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이들의 당선을 대서특필하면서 한국계의 미국 주류 정치 무대 진출을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메릴린 스트릭랜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언론을 비롯한 누구도 불과 얼마 전까지 혼혈인을 한국인 취급도 하지 않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새기진 않았다.

우리는 인종차별을 먼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한국은 서구 특히 미국처럼 피부색이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오랫동안 단일 민족으로 유지된 사회로 믿어 왔다. 그리고 현재의 다문화 사회는 대부분 중국과 같이 피부색이 같거나 기껏해야 베트남처럼 같은 계통의 아시아인으로 인종적 차이가 크지 않은 이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차별은 대부분 문화가 달라서 혹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일로 치부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기껏해야 아프리카계 외국인에게 일어나는 일화적인 사건이거나 미디어와 SNS에서 몰지각한 사람들이 유포하는 무지의 산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인종주의적 인식을 받아들여 왔고 그로 인한 인종차별이 존재해 왔다. 혼혈인의 이야기는 반세기에 걸쳐 자행되었던 숨겨진 인종차별의 역사다.

언제나 차별받고 심지어 버려지다시피 한

혼혈인은 서로 다른 인종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 말은 주로 외국인(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지칭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반세기에 걸친 주한미군의 주둔으로 혼혈 자녀의 수는 늘어났다. 하지만, 주한미군은 미국의 인종주의적 문화도 같이 들여왔고, 혼혈인과 그 가족은 한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빈곤과 차별을 견디며 살아왔다. 혼혈인의 모친은 그 배경이 어떠하든 간에 ‘기지촌’에서 혼외 관계로 외국인과 놀아난 ‘양공주’로 낙인 찍혔다. 그리고 그 낙인은 고스란히 자녀에게 대물림되었다. 게다가 혼혈인 자녀들은 외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그리고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종이 다른 동물의 새끼를 가리키는 ‘튀기’라는 말로 비하했다.

혼혈인에 씌워진 낙인과 정부의 무관심 속에 현재까지도 혼혈인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는 이들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를 한 적도 없다. 한 연구는 한국에서 태어난 혼혈인의 총인구가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6만 명 사이였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 중 상당수는 해외로 입양되거나 이민을 떠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인종을 숨기고 살아왔으리라 추측한다. 1999년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혼혈인은 1999년 기준 약 400-500명 정도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혼혈인에 대한 국가의 유일한 정책은 해외 입양이었다. 사실상 추방인 셈이었다. 1954년 이승만 정부는 ‘한국아동양호회’를 설립하고 미국 당국과 협의 하에 본격적으로 혼혈 아동의 해외 입양을 시행했다. 이후 1955년부터 2005년까지 해외로 입양된 혼혈 아동의 수는 약 6000-7000명에 달한다. 또한 1982년 미국이 아시아에 주둔했던 미군의 자녀에게 이민을 개방하면서 약 3000명의 성인 자녀들이 추가로 미국 이민을 택했다.

(이미지 출처 = Pexels)
(이미지 출처 = Pexels)

미래를 위해 고질적인 인종차별을 넘어서야 한다

한국에서 혼혈인들의 삶은 누구보다 비참했다. 2003년과 2006년에 각각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조사에서 이들의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학교와 사회에서 심각한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2006년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학교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이나 놀림을 당했다고 응답했을 정도로 차별은 이들에게 일상화된 현실이었다. 결국 이들 가운데 절반은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은 더욱 참담했다. 당시 조사에서 정규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경우 4분의 1에 불과했고 대부분 공장이나 공사장 같은 하층 노동 일을 하고 있었다. 직업을 구할 때 혼혈인이라고 거부당한 경험을 가진 이는 무려 절반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혼혈인들은 인종차별이 초래한 빈곤의 늪에서 고립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인순이, 박일준 같은 소수의 혼혈인만이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기대어 존재를 알리고 있었을 뿐이다.

1982년 이후 무려 수천 명의 성인 혼혈인들이 미국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그래서 이해할 만한 일이다. 입양과 이민을 통해 미국으로 옮겨간 혼혈인들은 국내 혼혈인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와 국민에게서 외면당해 왔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정부는 2000년대 이후 해외 교민에 관한 관심과 지원을 높여 왔지만, 혼혈인에 대한 지원과 관심은 없었다. 한때 미국 미식축구 리그의 스타 하인즈 워드가 한-흑 혼혈임이 알려지면서 잠시 대중의 관심이 일기도 했지만 그때뿐이다. 오히려 2006년 재미 혼혈인에 대한 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미국의 한인에게도 외면받는 등 여전히 한국인들로부터 따돌림당하고 있었다.

이제 혼혈이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인종차별적 의미를 내포한다는 이유다. 대신 다문화 자녀라는 국적 불명의 단어로 대체되었다. 한국에는 2020년 현재 약 27만 명의 다문화 자녀가 살고 있다. 용어를 바꾼다고 이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사라졌을까? 다문화 자녀들은 여전히 친구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놀림과 따돌림, 그리고 차별을 겪는다. 많은 수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 밖으로 내몰린다. 우리는 마치 다문화 자녀들의 경험을 예전에 미처 경험하지 못한 사회 문제로 생각하면서 금세 사그라들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해외 입양과 이민으로는 지울 수 없었던 혼혈인과 인종차별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손인서
비정규직 박사 노동자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소속.
미국 듀크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주민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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