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성당에 잘 나가세요? 미사는 어디서 드리세요? 하는 질문을 하기가 왠지 민망하다. 예전 같으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 동네에 성당에 갔고, 거기서 싫든 좋든 신앙을 배워 갔다. 그래서 우리 성당 신부님이 제일 좋아 보였었다. 이제는 우리 본당 신부님의 강론이 거슬리면, 더 이상 그 성당으로 나가지 않고, 옆 동네의 성당으로 간다는 신자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과열된 성당의 봉사로 지치거나 본당 공동체에서 상처를 받으면, 큰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서 익명의 신자로 지내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런 신자들의 속내를 들어 보면, 누구보다 좋은 신앙 공동체를 가지고 싶어 한다. 한편으론, 내게 가장 맞는 그런 전례를 지내고, 내가 속 썩는 일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원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 한 켠에서 내 신앙이 둥지를 틀 생활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요즘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공동합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역 교회들을 물론 포함해서. 공동합의성은 과연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가지는 모든 진정한 소망을 담아낼 수 있을까?

21세기에 교회가 시노드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듣는 일이다. 그래서 미국 교회의 한 구성체의 대표로서, 미국수녀장상연합회(LCWR)는 각 수도 공동체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수렴하기로 했다. 우리 수녀원도 모임들을 가졌는데,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우리 수녀님들이 가장 먼저 쏟아 낸 이야기들은 아주 오래된 실망감과 기대 없음이었다. 두 시간가량 진행된 이 세션을 마치면서 내게 든 생각은, 공동합의성에 이르기 위해, 그동안 아팠던 교회의 일원들의 탄식을 들어야 하겠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우리 스스로 살아 내지 못한 데 대한 슬픔의 예식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하긴 요한 복음 5장을 보면, 벳자타 못가에 38년간 누워 있던 환자도, 예수님이 낫기를 원하는가를 물으시는데, 이것저것 자기 인생의 억울함과 아픔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게 치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캐나다에 사는 젊은 평신도 여성 신학자는 이번 시노드 준비로 의견을 내라고 할 때마다, 준비한 긴 내용을 열심히 적어낸다고도 했다. 그의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가 귀하게 보였다.

며칠 전 볼리비아에서 선교하는 친구 수녀와 공동합의성에 대해 이야기하다, 자기는 공동합의성이란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스페인 말로 엘 까미노 훈또스(el camino juntos), 함께 가는 길이라고 하니까 의미가 확 다가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표현이 정답고 참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노달한 교회(the Synodal Church)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먼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주 이야기하시는 엔꾸엔트로 (encouentro), 즉 만남이 마음에 더 확 들어온다. 여행길을 함께 가려면, 우리는 먼저 만나야 한다. 그리고 함께 가는 멤버들을 서로 좀 알아야 한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주일학교에서 여름 캠프를 할 때에도, 우리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계획을 짜면서, 즐거워하고, 그러면서 서로 친해졌던 일 인 것 같다. 각자의 열정 때문에 얼굴 붉히며 서로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준비하는 일이, 어쩌면 여행 자체보다 더 중요하고, 또 즐거운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 교회는 누구와 함께 이 여행을 가야 하는 건가를 생각하게 된다. 미국의 성당은 문이 닫혀 있는 곳도 많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 수도자들의 노령화로 미션들은 문을 닫고, 새로운 형태의 교회와 미션이 나와야 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미션 거리에 가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투쟁이 엿보인다. 미션 거리는 원래 가난한 멕시칸들이 주로 사는 거리였는데,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엄청나게 오르는 집세를 내지 못하고 결국 그곳을 떠나가게 되었고, 그에 대한 저항을 담아 그 지역의 문화적인 전통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을 담벼락에 그려내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비판하는 벽화로, 젊은 화가 시론 모리스(Sirron Morris)의 작품이다. ©박정은
샌프란시스코 벽에 그려진 콰달루페 성모님, 그 아래는 불법 이민으로 감금된 아이들의 보호를 바라는 의미로 나비를 붙여 놓았다.&nbsp;©박정은<br>
샌프란시스코 벽에 그려진 콰달루페 성모님, 그 아래는 불법 이민으로 감금된 아이들의 보호를 바라는 의미로 나비를 붙여 놓았다. ©박정은

이런 거리의 그림을 뮤럴(mural)이라고 하는데, 샌프란시스코 미션 거리는 이런 벽화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특히 미션 구역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벽에는 함께 가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살바도르 출신의 화가 이사이아스 마타(Isaias Mata)가 성당 벽에 그린 이 그림에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와, 과달루페 성모님, 그리고 현재 고통 받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 그리고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오스카 로메로 주교님 같은 저항운동 지도자들을 그렸다.

이 교회의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들을 한참 바라보다, 과연 교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교회는 사람들의 투쟁 가운데, 그리고 아픔 가운데 있는 걸까? 그렇다면 교회는 벽 바깥쪽, 거리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우리에게 정체성을 주고, 세상의 어지러운 현실과 떨어져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라면, 교회는 벽 안쪽, 그러니까 실내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벽이란 것이 안과 밖을 연결하는 매우 소중한 곳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교회의 중심은 어쩌면 벽을 중심으로 안을 보호하고, 또 바깥이 시작되는, 혹은 바깥과 연결되는 소중한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밖과 안을 어우르는 벽은 어쩌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임계 공간, 틈새의 공간이 될 지도 모르겠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회의 안과 밖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안은 자연스럽게 길거리로 연결되고, 거리의 적나라함은 교회의 따스함을 고스란히 안아 내어야 한다.

사실 나는 교회 안에 있는 그림을 묵상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 몇 년 전, 어느 무더운 여름, 이슬람 사원 마당에서 마주한 무슬림 형제들의 지친 얼굴과 그들이 나누어 먹는 초라한 밥을 보며, 그 적나라함에 마음이 아팠는데, 조금 더 걸어가 들어간 성당에서 마주친 최봉자 수녀님의 십자가의 길 9처는 무조건 받아들이신 침묵으로 나를 위로했었다. 바티칸 박물관의 벽에 그려진 그림들도 압권이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같은 벽화를 보면서 말을 잊었던 것 같다. 르네상스의 대가가 그린 작품의 크기와 함께, 서양 철학이 정리된 듯한 그림을 보면서,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조금 더 넣으려고 애썼던 기억도 있다. 그러면서 실내의 벽이란, 안쪽, 그러니까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 집중 된 관심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또 내게 가장 인상적인 벽화라면, 월곡동 꼭대기 어떤 조그만 교회 벽에 그린 벽화인데, 이사야서에서 말한, 아가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사자와 아기 양이 함께 뒹굴며 노는 그런 그림이었다. 나는 내 영혼에 깊은 인상을 남긴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알지 못한다. 더구나 그 그림이 교회 안쪽 벽에 그려졌는지, 밖의 벽에 그려졌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안과 밖이 구분이 안되는 뮤럴이 진정한 벽화일지도 모르겠다.

성 베드로 성당 벽에 그려진 벽화. 로메로 대주교을 비롯, 지도자들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현재 고통받은 사람들, 그리고 저항을 그렸다.&nbsp;©박정은<br>
성 베드로 성당 벽에 그려진 벽화. 로메로 대주교을 비롯, 지도자들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현재 고통받은 사람들, 그리고 저항을 그렸다. ©박정은

요즘 우리가 많은 소통하는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도 우리는 벽이란 말을 사용한다. 담벼락에 끄적거린 말이나 그림을 통해 요즘 우리는 외부와 소통한다. 또 벽이란 말을 들으면, 동서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던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억하게 되고, 또 트럼프가 쌓아 올린 미국-멕시코 국경의 벽을 생각하게 된다. 벽은 갈라놓고, 안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타인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시작점이다. 우리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여기저기 낙서 같은 메시지가 눈에 뜨인다. 누군가 열심히 그려 놓거나 인쇄한 것인데, “이 집에는 인종차별 같은 것이 없습니다”라든가, “블랙 라이브즈 메터”들이 주된 메시지다. 또 절기마다 집 앞을 장식한다. 이제 조금 후에 부활 시기가 오면 사람들은 집 앞에 병아리나 계란을 놓아 둘 것이고, 하얀 백합으로 문 앞을 장식할 것이다. 처음에 내가 미국에 와서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개념이 자기 집안이 아니라, 집 밖이나, 길거리를 장식하는 일인데, 그것도 어찌 보면, 모르는 사람들, 혹은 자기 집 앞을 지나는 사람에게 건네는 친절한 계절 인사이며, 일종의 소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공동합의성이란 것이 이런 뮤럴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끼리 먼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리는 그런 그림을 함께 그려 보자는 초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샌프란시스코의 거리 예술은 시대를 따라 변해 왔고, 요즘의 주제는 식민지 이전의 신앙과 고통받는 땅이 주된 것 같다. 또 원주민들이 겪은 학대, 특히 가톨릭교회가 원주민들에게 한 잔학 행위들을 많이 그린다. 그럼에도, 세월의 흐름을 따라 변하지 않는 주제는 언제나 고통받는 그리스도, 그리고 성모님이다. 과달루페 성모님이 물론 가장 많지만, 여러 다양한 성모님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공동합의성에 대한 우리에 노력의 한가운데에도, 고통받은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슬픔이 담겨질 것이다. 그렇게 교회 안에, 그리고 세상 안에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의 음성이 들려질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미사 때마다 드리는 공동합의성에 대한 기도 속에 나의 작은 소망을 담아 본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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