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나는 장이머우의 영화를 대체로 좋아했다. 적어도 <인생>에서 <집으로 가는 길>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영웅>, <연인> 등을 통해 중국의 위험한 국가주의를 선동하고, 헐리우드 액션에 가담한 그에게서 마음이 한참 멀어졌다. 몇몇 평자들은 생의 의지가 절대적이었던 그에게서 이미 예전부터 그런 조짐이 보였다고도 하나 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다분히 사후 약방문적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튼 그의 영화를 순차적으로 보자면 여러 변화가 있음에는 틀림없다.

봐줄 만한 장이머우의 마지막 영화인 <집으로 가는 길>에서 대략 두 가지를 엿보았다. 하나는 기다림이고, 또 하나는 공감과 향수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고향을 찾은 주인공의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량한 중국의 한 농촌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새 교사가 부임한다. 이때 시골처녀(장쯔이)는 그 교사에게 한눈에 반해 무척 좋아했고 정성을 다했다. 그녀가 지극히 연모했던 교사는 결국 다른 마을의 학교로 떠나가고, 시골처녀는 그리움에 시름시름 앓는다. 앞을 못 보는 그녀의 어머니는 어떻게 딸의 애절한 마음을 알았을까. 딸이 그 교사를 위해 너무도 정성스럽게 음식을 담아주었던 그러나 깨져버린 그릇을 곱게 간직해둔다. 어머니는 그릇 수선공을 불러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그 그릇을 잇게 한다. 그릇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꿰매는 그 장면은 정말로 경이로워 달인 프로그램에 나올 만했다. 하여튼 그렇게 딸의 추억을 간직해주면서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사랑이 강하게 느껴진다.

시골처녀의 기다림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참 힘겹다. 표면상으로 볼 때 그 기다림은 얼마나 수동적인가. 그러나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힘을 요구하는 것이 또한 기다림이던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끝끝내 고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도, 기다려야만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면, 이는 만만치 않은 공력을 요구하는 행위라고밖에 할 수 없다. 따라서 보기에 따라 기다림은 매우 적극적이고 강한 의지의 발현일지 모른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이처럼 지루하고 애절한 기다림의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깨진 그릇의 이어짐은 하나의 복선이었을까. 그렇게 힘겨운 기다림 끝에 교사는 다시 마을로 돌아오고, 그 처녀와 백년해로를 맺는다. 세월은 그 두 사람의 머리를 하얗게 했고, 남자는 먼저 세상과 작별한다.

그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은 아버지의 소원이었던 교사가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집을 떠나기 전에 마을아이들을 모아 놓고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다. 아버지의 목소리와 아들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이러한 장면 때문인지 장이머우가 아버지 세대와 타협했다는 비판을 받았나 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아버지 세대와의 타협보다는 공감과 이해의 측면을 더 강하게 느낀다. 화자 아들은 아련하게 어머니와 아버지를 되짚어가며 앞 세대 삶을 그윽하게 응시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고, 공감할 것이 적지 않은 것이 아버지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자식을 또는 자식이 아버지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겠다. 어찌 보면 상당히 모순적이지만, 서로가 서로 안에 깊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별개의 개체이나, 또한 완전히 별개가 아닌 것이 부모와 자식이 아니던가. 단, 아버지 세대와의 대화와 공감을 넘어서서, 타협이 더 급진화되어 아버지세대를 흉내내거나 똑같은 실수을 범한다고 하면 문제가 되겠다. 이런 상태를 정치적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반동’이 적절하겠다. 이 영화 자체로는 장이머우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후 장이머우의 영화는 그런 류의 비판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 황량한 벌판에서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한 여인의 애절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기다림의 배경이 너무도 황량했고, 그 기다리는 여인이 너무도 이뻤던 장쯔이라서 더욱 그러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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