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영적인 사람이다.”

최근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보도, 분석되고 있는 한 대통령 후보 부인의 기자와의 통화 녹취록에서 가장 눈에 띈 핵심 문장 중 하나입니다. 이와 함께 등장하는 어구들이 '무당', '도사', '삶의 의미', '사람을 잘 본다' 등입니다. '영적'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언어 생활에서도 익숙한 이 낱말을 여기에서 만났을 때 근본적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사용한 '영적'이라는 의미는 함께 사용된 낱말들과 맥락을 볼 때 철저히 샤머니즘에 근거했다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영(靈)'이라는 한자 구조 자체를 살펴보면 '巫가 세 개의 口로 신과 소통'한다는 의미를 가짐으로서, 정확히 고대 '샤먼'을 가리킵니다. 이 한자의 구조와 의미를 볼 때 언어의 특성상 그것이 형성된 시기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낱말도 인간 정신과 그 세계의 발전과 변화에 따라 의미와 쓰임이 달라지는 것은 상식에 해당합니다.

문명의 세계에서 여전히 고대어의 세계를 사는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제기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명 사회로 구성되고 그 사회를 보장할 국가를 이끌어나갈 책임을 갖는 이의 정신세계는 그 역할 차원에서 철저히 검증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로 든 후보의 부인은 자신만이 아닌 후보 당사자도 자신과 같이 '영적'이라고 언급했고, '내가 정권을 잡으면'이라고 하며 스스로가 이 권력의 주체가 될 것임을, 국가 권력을 사적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샤머니즘의 기본 원리는 '길흉화복'이고 '하늘의 뜻'에 걸린 인간의 '운명' 앞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철저히 무력하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형성합니다. '하늘의 뜻'을 '읽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제물'을 제공하고 '복'을 담보 받는 그 방식이, 왜 우리가 촛불로 어렵게 밀어낸 '우주의 기운'을 믿는 정권에 이어 밀물과 같이 돌아올까요. 엄밀히 '돌아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 정치계, 법조계, 문화계, 등을 지배하는 정신세계가 '샤머니즘'임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요.

'영(spirit)'의 의미를 문명의 발전을 거친 어원으로 다시 찾아보면 '물리적인 형체를 갖는 존재 안에 깃들고 이끄는 보이지 않는 원리 혹은 실체'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 자신과 이 사회, 국가,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원리를 의미합니다. 이 통화 내용의 공개를 허용한 법원의 판결과 같이 이것이 우리 자신과 사회에 내재한 어떠한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비방이 아닌 '공적'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의미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삶을 봐야겠습니다. 그 사회의 언어 쓰임이 정신세계를 드러낸다는 원리를 다시 확인한다면, 이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이해와 삶이 그 통화에서 나타난 '영적' 세계와 달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열흘간의 연피정을 다녀와서 그간의 밀린 뉴스를 간추려 보다가 만난 이 통화 내용과 관련 뉴스들은 제가 수도자로서 보장받는 기도의 시간에 내재되어 있던 공적 책임의 무게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깊은 죄스러움을 마주하도록 했습니다. 나의 정신세계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리에 근거해 있고, 그래서 내가 산 삶이 그 원리에 근거해 이루어졌다면 '영적'이라는 낱말이 저렇게 사용되고 저 정신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지속적으로 '대권'이라는 가장 책임이 큰 권한을 갖고자 하는 자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었을까, 질문하고 또 질문하게 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이끌다(눈먼 이의 비유)’,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1568) (이미지 출처 = 나폴리 카포 디 몬테 미술관 홈페이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이끌다(눈먼 이의 비유)’,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1568) (이미지 출처 = 나폴리 카포 디 몬테 미술관 홈페이지)

지난해 이 칼럼에서 브뤼헐의 그림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4) 직분으로서 지도자인 이들의 정신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합당한가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우리의 정신도 함께 검증하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믿고 싶습니다. 저 눈먼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눈을 뜬다면 저들의 길은 달라지며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서강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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