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기 전 아버지가 머물던 옛집을 찾았다. 벽에는 빛바랜 사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아버지처럼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의 사진 사이로 이제는 장성한 가족들의 돌 혹은 백일 사진들이 천진한 모습을 간직한 채 액자에 담겨 있었다. 흡사 복음서의 족보를 읽어 내려가는 기분이 들며, 새삼 가족의 의미가 핏줄과 핏줄로 연결되어 이 세상을 무사히 건너는 생명구조대로 읽혀졌다.

그런데 어림잡아 수 십 명을 담고 있는 사진틀 속에 나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회갑연의 자리에서 온 가족이 찍은 사진 안에서도 나를 발견할 수 없었다. ...부모와의 엷은 인연(?)으로 나는 많은 시간을 외가에서 보내야만 했다.

북당의 아이들

청나라 말기, 북경에 소재한 천주교 성전인 북당(北堂)에 머물던 신부님들의 일화를 읽으며 나는 하느님 마음이 바로 부모님 마음이라는 진실을 확인하며 뿌듯한 사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중국사회는 그리스도교 선교를 금하던 시기여서, 성당에 머물던 신부님들은 저마다 익힌 서양의 근대 기술문명을 청나라 궁정에 기여하며 선교의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그래서 뚜렷한 서양지식과 기술이 없는 분들은 추방당하거나 순교로 일생을 마치는 분들도 계셨다. 이미 북경에 동서남북에 각각 성당을 건립한 후였지만 통치권자의 권익에 따라 전교활동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조선천주교회의 첫 세례자 이승훈이 예수회 그라몽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북당에는 고아원이 딸려 있었는데, 이들 고아를 돌보는 신부님들은 성당 옆에 작은 공장을 지어 베네치아 사람들이 터득한 유리공예 기술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신부님들은 부모도 없는 아이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이단자(異端者)로 살아갈 것을 염려하여 입교시켜 신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사회에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세 가지 계율을 내려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첫째 도둑질 하지 마라. 둘째 병사가 되지 마라. 셋째 아이를 버리지 마라."

신부님들은 베네치안 글라스 제조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그들이 성장하여, 중국내 어디선가 아름다운 글라스를 만들며 충실한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기를 기원했다. 그들이 살아가며 외국인 신부들과의 만남을 아름답게 기억해준다면 중국사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셈이 될 것이다.

어느 무명 순교자의 일화

비슷한 시기, 천주학이 조선에 들어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흐름은 중국도 비슷했다. 북당의 신부님들이 고아들을 이끄신 방법은 예외의 경우일 것이다.

갈매못 성지를 다녀오며, 그 곳에서 순교한 어느 무명 순교자의 일화는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젖먹이 아이를 두고 포졸들에게 끌려오던 젊은 엄마는 아기울음 소리에 배교하여 순교지에 도착하기 전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간 아기엄마는 마음을 바꿔 다시 갈매못으로 찾아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순교했다고 한다.

젖먹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더 크게 듣는

사순이 지나고 부활을 맞는 이 시간, 험한 시절 신앙이 생사를 가름하는 숨막히는 시간을 살았던 분들이 걸었던 두 가지 길을 묵상해 본다.

부모님과의 허약한 인연을 되새겨 보는 버릇이 있는 나는 갈매못 무명순교자의 봉헌보다 젖먹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더 크게 듣는다(신앙의 오류여부를 떠나).

오래 전, 베이징의 북당에 머무시던 신부님들이 걸었던 성직의 길은 하느님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전해준다. 근대의 생활여건은 청나라나 조선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기아와 전염병에 노출되어 고아들의 생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이 집어삼킬 기회만 노리는 나라의 형국과 고아들의 생존은 다를 바 없었으리라. 이 위급한 형편에 처한 생명들을 맞아 선교사 신부님들은 하느님의 모성에서 오는 봄바람 같은 숨결로 고아들의 소생(蘇生)을 도왔을 것이다.

 

한 겨울 벚나무 가지를 꺾어 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 없었다.
봄날, 연분홍 꽃잎이 천지를 덮고 있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가...?
(일본의 하이쿠)

 

 

 

/이규원 2008-03-24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