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 칼럼]

▲ 호인수 신부
점심으로 떡국을 먹으면서 보좌 이세연 신부님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여러 은인들에게 빨간 내복 대신 빨간 성경책을 사드렸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별안간 내복은 뭐고 성경책은 뭔가 했지만 곧바로 나는 아, 그 얘기구나 하고 속으로 무릎을 쳤다.

이 신부님은 지난 1월에 사제품을 받은 새 신부님이다. 첫 부임지인 우리 본당에 와서 2월에 첫 월급을 받았다. 월급봉투를 건네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학교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타면 대개들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사다드린다는데 신부님도 그렇게 할 거예요?” (요즘에도 빨간 내복이 있기는 있나?)

이 신부님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월급봉투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나는 34년 전에 어땠었지? 인천 주안본당은 분명한데 얼마를 어떻게 받았는지, 그때의 내 느낌이 어땠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아, 빨간 내복 얘기구먼. 내복 대신 성경책을 사드렸다고요? 부모님만이 아니고 다른 분들에게도 다?”
“예. 신부될 때까지 저를 도와주신 은인들이 여러분 계시거든요. 그분들께도 드렸습니다.”
“아이구, 잘 했네요. 부모님도 은인들도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아마 새 신부님들 중에 첫 월급 타서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한테 고맙다고 일일이 인사한 분은 신부님밖에 없을 걸요?”
“그럼요.”
옆에서 가타리나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아무려면 우리 보좌신부님밖에 없을까. 이 신부님은 또 소리 없이 웃었다.

우리 사제들은 참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받고 산다. 지난 설 명절에도 나는 본당 교우에게서 세뱃돈으로 쓰라고 빳빳한 천 원짜리 새 돈 한 다발을 받았다. 별 일도 다 많다. 사제도 사람인데 어찌 고마움을 모르랴. 그러나 한 번, 두 번 자꾸 받다보면 받는 데 익숙해지고 받는 걸 당연시 여기게 되고 급기야 누가 주지 않으면 서운한 생각까지 들게 마련이다. 주는 사람들은 주면서도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작아서, 변변치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수 없이 되풀이한다. 세상에 이런 광경은 우리 교회가 아니면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게다.

부모와 형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 많이 사랑할 줄 안다고 했거늘 어쩐 일인지 받는 데 익숙한 우리는 주는 걸 잘 못한다. 교우들과 식당에라도 갈라치면 음식이나 술값은 으레 교우들 몫이다. 먼저 일어나 계산서를 챙기는 사제는 가물에 콩이다. 모인 모든 사람이 추렴을 해도 사제는 건너뛴다. 오히려 참석해줘서,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는다.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서 보통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는 축의금이나 조의금도 우리는 생략하기 일쑤다. 사제는 그런 거 안 해도 된단다. 집들이에 초대를 받아도 맨손이다. 받아본 사람이 줄 줄 안다는 당연한 논리가 유독 사제에게만은 해당이 안 되나보다. (오해 마시라. 모든 사제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잘못돼도 뭔가 크게 잘못됐다.

지금은 은퇴하신 선배 신부님이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월급을 받아도 쓸 데가 없어. 가만히 있어도 교우들이 알아서 먹을 거 입을 거 다 갖다 주니 부족한 게 있어야지.” 일면 수긍이 가지만 입맛이 썼다. 물론 사람이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사제임에랴. 하지만 쓸(줄) 줄 모르는 건 자랑일 수 없다. 다행히 전에 비해서 요즘은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첫 월급을 탄 우리 본당의 새 신부님이 빨간 성경책을 사들고 고마운 분들을 찾아 인사드릴 줄 아니까.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고강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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