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주민투표를 통해 본 한국반핵운동과 민주주의 2

이 글은 지난 11월 11일과 18일, 영덕핵발전소반대범군민연대와 핵재처리실험저지30km연대가 진행한 토론회에서 핵폐기를위한전국네트워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준한 신부(부산교구)가 발표한 내용으로, 한국의 반핵운동 역사와 의미, 그리고 핵재처리 반대 싸움의 과정을 짚고 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의 핵발전 관련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지금, 앞으로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발제문은 6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전편, 영덕 주민들의 반핵운동 내용에 이어)

운동의 진정성, 절박함으로 공감한다

앞선 내용의 결과로 2015년 11월, 영덕핵발전소유치찬반주민투표추진위원회가 진행한 역사적 주민투표 결과는 주민 1만 1209명 참여, 91.7퍼센트의 기적적 반대 의사를 모으게 됐습니다.

영덕의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한다면 무려 1만 1209명의 투표 참가와 91.7퍼센트의 반대의사를 관의 도움 없이 오직 주민들의 힘만으로 달성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런 기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활동가들의 진정성이 주민들에게 공감되어야 합니다.

2015년 4월 하반기부터 6개월간, 말 그대로 가가호호 방문하는 발품팔기의 노고는 활동가이면서 주민인 이들의 절박함이 많은 주민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함은 진정성을 먹이로 커져 반핵여론 확산을 주도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민투표는 하나의 결과이지 그 자체가 운동의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일부 이장님들이 마을방송까지 동원하며 투표독려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잡한 핵발전의 논리 이전에 활동가들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진정성이 피부에 와닿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대책위는 전국 단위의 탈핵버스 등으로 연대자를 받아들일 때도 기존의 집회 중심의 전형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대책위의 지역활동 연장선상에서 지역주민을 직접 만나 동의서를 받고 핵발전 반대를 설득하는 진정성을 보이도록 프로그램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이는 오늘의 반핵운동에서 대중적 운동을 펼치는데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민투표와 기존의 반핵운동이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은 영덕주민투표의 큰 성과 중 하나입니다.

명망가도 조직도 아니다, 주민이 직접 주도한다

영덕의 주민투표는 그 준비과정은 물론 투표 당일까지 참으로 많은 희생과 수고를 요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지자체가 침묵 정도로 그쳤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한수원과 지자체는 함께 힘을 모아 주민투표 반대운동을 노골적으로 전개하고 끊임없이 반핵여론 확산을 저지했습니다. 이에 맞선 반핵운동 진영은 지역의 어떤 명망가도 관의 도움도 조직적인 인원동원도 없이 맨바닥에서부터 한 땀 한 땀 결실을 맺어갔습니다.

영덕의 주민투표 조건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는 전북 부안, 삼척의 주민투표 운동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부안에서는 지역의 여러 단체와 전국의 연대단체가 대거 결합할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주민투표로 영덕 주민투표에 영향을 미친 삼척의 경우 2014년 10월 9일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에서 84.9퍼센트의 유치반대 의사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그에 앞서 삼척시가 시의회에 원전유치 철회를 위한 주민투표 동의안을 제출하고, 이어서 삼척시의회가 원전유치 철회를 위한 주민투표 동의안을 통과시키면서 관의 협력 속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됐습니다.

이런 면을 볼 때, 영덕의 주민투표는 가히 희생적 노고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민이 직접 주도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경우 우리가 흔히 조직과 인원동원이라는 전제조건에 묶여 운동의 성패 여부를 사전에 가늠하려는 타성에 대한 반성의 기억으로 남아야 할 것입니다.

2015년 8월, 영덕지역 종교인 25명과 전국 5개 종단 종교인들이 영덕 핵발전소 유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 지지를 선언했다. (사진 제공 = 영덕핵발전소반대 범군민연대)
2015년 8월, 영덕지역 종교인 25명과 전국 5개 종단 종교인들이 영덕 핵발전소 유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 지지를 선언했다. (사진 제공 = 영덕핵발전소반대 범군민연대)

문재인 정부의 탈핵공약은 최초로 풍선효과를 차단한 영덕 주민투표 결과를 도용했다

풍선효과, 마치 풍선의 한 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듯 한 곳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불거지는 현상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쩌면 이는 반핵운동의 오랜 고질병이자 딜레마입니다.

한 지역에서 핵폐기장이든 신규 핵발전소든 여타 핵시설 건설을 막아내면 ‘원자력 진흥세력’은 다시 더 약한 곳을 찾아내 그곳에 핵시설을 짓는 일이 무수히 반복되어 온 것이 우리나라 원자력 진흥의 역사입니다. 또 반핵운동은 한 지역에서 핵시설 건설 백지화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하여 본의 아니게 운동 지역이기주의로 귀결되곤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덕은 주민투표를 통해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기존의 세력구도를 탈핵과 찬핵, 탈핵과 핵마피아 등으로 부르던 것에서 이제는 원자력진흥세력과 반핵운동세력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핵진흥세력을 원자력진흥세력이라 하는 것은 원자력진흥위원회와 진흥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를 타파하기 위한 운동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다. 또 탈핵과 찬핵으로 나눌 경우 탈핵이라는 말의 범주가 과도하게 확장되고, 반핵운동세력에서는 대안적 에너지전환 등으로 희석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고, 반핵의 명확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 필자 주)

2012년 한수원 이사회는 원래 부산시의 신고리 7, 8호기를 대신해 영덕에 신규 핵발전소를 조기 착공할 계획을 통과시켰습니다. 전형적인 풍선효과입니다. 결국 영덕의 문제는 부산의 문제로 이전됐습니다. 하지만 부산의 짐을 떠안게 된 영덕은 지속적인 반핵활동과 주민투표로 신규 핵발전소 건설의 동력을 끊어 놓았습니다.

단순히 영덕에서의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원자력진흥세력의 핵발전소 건설 시도에 변곡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영덕이라는 작고 보잘것없는 지역에서도 막아낼 정도의 여력이라면 다른 지역에서도 신규 핵발전소는 더 이상 지을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과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아낸 것입니다. 그렇게 영덕 주민투표는 처음으로 풍선효과를 동반하지 않은 반핵운동의 성과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탈핵정부를 표방하면서 주요한 탈핵공약으로 신규 핵발전소 건설 중단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이미 2015년 영덕 주민투표를 통해 더는 어느 곳에서도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 열매를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롭지도 않고 시민사회의 운동의 성과를 도용하는 이런 공약은 결코 시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부가 아닌 주민의 지난한 운동으로 성취한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써 반핵운동이 이후로도 ‘풍선효과’라는 상존하는 위험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치열한 토론과 운동방향 등 새로운 모색을 위한 역사적 자료를 갖게 됐습니다.

전제조건에 얽매이지 마라,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

영덕 반핵운동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조건은 차고도 넘칩니다. 무엇보다도 인접한 울진군에 핵발전소가 들어서면서 누리게 된 혜택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핵발전 유치의 유혹은 참으로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낙후된 농촌 지역이기에 개발 욕구가 강할 것이라는 점, 적은 인구와 고령화된 주민이 다수라는 점, 대도시에 비해 사회운동 역량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자체와 원자력진흥세력의 압력이 너무나 강하다는 점에서 핵발전 유치를 막아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운동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영덕은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고 미리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민투표를 결의하고 전국적 환경단체 등의 연대를 요청하는 자리에서 대다수 단체들은 영덕 주민투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실현가능성이 낮다고 지적했습니다.

영덕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전국 단위의 협조가 없으면 주민투표가 불가능하기에 전국 단위의 회의석상에서 읍소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덕 주민의 결의와 각오를 보여주고 주민투표로 국면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가능하다면 협조를 구하려는 자리에서 훈수를 두며 의지를 꺾어버리는 처사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적인 차원에서 타성적으로 전제조건만을 검토하는 운동 성향이 운동의 추진력을 꺾어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진정한 운동의 전제조건은 물적 차원의 제반 조건이 아니라 현장에 기반을 둔 진정성 있는 활동과 주민들에 대한 공감력 있는 접근이라는 측면을 새롭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어딘가에서는 또다시 원자력진흥세력의 핵시설 건설 추진은 발흥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막아서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될 때 영덕의 경험이 우리의 길을 밝혀주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015년 10월에 진행한 영덕 핵발전소 유치찬반 주민투표는 주민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적법하게 치러지는 합법 투표였다. ⓒ장영식
2015년 10월에 진행한 영덕 핵발전소 유치찬반 주민투표는 주민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적법하게 치러지는 합법 투표였다. ⓒ장영식

오래된 구호, 변함없는 구호,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를 실현한다

우리나라의 원자력진흥세력의 본산은 정부입니다. 핵산업계와 학계, 언론계 등만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적으로 핵시설을 양산하고 이를 통해 내수와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을 도모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원자력진흥세력인 정부는 때로는 그 판로가 막힐 경우 필요한 경우 다른 개발사업으로 지역의 생활기반을 침범하기 마련입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진행되고 있는 에너지전환정책은 결코 대도시의 생활환경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도시 문명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는 시스템이며 그나마 지속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여지가 남아 있는 지역에마저 개발사업을 지속하려는 움직임은 때로는 신재생에너지나 전통적인 화력발전 등으로 유입되곤 합니다.

하지만 영덕의 반핵운동세력은 핵발전소의 대안적인 개발사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반핵운동의 가장 오래되고 변함없는 구호 그대로 지금까지의 생활환경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식의 개발사업도, 그것이 비록 지속가능한 에너지전환이라는 이름을 띈다고 할지라도 이는 지역을 성장시키기보다 결국 대도시의 에너지 공급 위성 지역으로 전락시키면서 독자적이고 고유한 생활환경 문화를 파괴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덕의 반핵운동세력은 핵발전소를 대체할 어떤 개발시설 유치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해상풍력 반대 운동, 2018년 1월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허가된 지품면 삼화리 화력발전소 건립 허가 반대 운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면면을 보면 직접적으로 반핵운동에 주도적으로 결합하지 않았던 주민들도 반핵운동의 경험으로 여타의 개발 사업을 반대하는 운동을 진행할 힘을 얻게 됐습니다.

물론 반핵운동은 어떤 식으로든 고립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섣부른 대안제시와 다른 개발 사업을 통한 타협은 반핵운동 자체에도 큰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반핵운동의 성과로 마련된, 있는 그대로의 지역생활문화를 차후에 파괴하는 일에 부시불식간에 동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준한 신부

부산교구 남산 성당 주임, 핵폐기를위한전국네트워크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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