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 알게 된 것들", 정인한, 사우, 2021

"너를 만나 알게 된 것들", 정인한, 사우, 2021. (표지 제공 = 사우)<br>
"너를 만나 알게 된 것들", 정인한, 사우, 2021. (표지 제공 = 사우)

우리의 여름은 빠르게 소멸했다. 머리 위를 타오르듯 뜨겁게 비추던 태양도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여벌 옷을 더 끼어 입어야 하는 스산한 계절이 왔다. 단풍은 아마도 이번 주쯤이면 절정을 이루고 그 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런 계절에는 정치나 과학, 경제 서적보다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어도 무방할 그저 익명의 누군가의 소박한 삶을 엿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나요.... 어떤 여름을 보냈고 지금 어떤 가을을 맞고 있나요'라고 작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된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계절, 누군가의 일상을, 누군가의 눈동자를, 그런 필자의 마음에 마치 기다렸다며 응답이라도 하듯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바리스타이자 두 딸아이의 아빠인 정인한 님이 책을 냈다. 책을 내주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오래 기다렸던 그의 문장들이다.

개인적으로 SNS 상 랜선 친구이기는 하나, 우리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오랜 시간 서로 간단한 인사나 안부를 나누며, 거리는 멀리 있지만 마음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제는 굳이 일일이 댓글을 쓰지 않아도 어느 날 올라와 있는 글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게 되는 그런 친구. 수많은 사람이 글을 쓰는 공간에서 정말 몇 안 되게 마음에 쏙 드는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지식이나 교양을 뽐내기 위해 지나치게 관념적인 문장과 추상적인 단어의 나열만을 시현하는 구태의연한 글들에 염증이 이는 내게 정인한 작가의 글은 때로는 타는 목마름의 일상 속에서 길어낸 한 잔의 시원한 물과도 같았고, 추운 겨울 대가 없이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 같은 것이었다. 지금껏 글 잘 쓰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그처럼 이토록 글을 조곤조곤 속삭이듯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다정한 글쓰기’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에게도 글쓰기란 나를 위로하는 일이자, 당신을 위로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건네는 말이다. 그런 말이 다정하다면 더없이 좋을 일이다.

책 속에는 평범한 한 사람의 일상이 그대로 녹아 있다. 불안한 이십 대의 청춘 시절과 부채처럼 가난을 끌어안고 함께 결혼해 준 아내와의 삶, 결혼 후 부모가 되는 환희와 기쁨, 눈물과 아픔의 과정들을 순간순간 솔직하게 담아냈다.

김해라는 작은 도시에서 '좋아서 하는 카페'라는 이름을 내고 하는 자신의 카페.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에 많은 빚을 내서 시작했지만 오직 자신이 가진 젊은 몸을 움직여 딸아이들을 키워내야겠다는 작은 결심은 이제 견고하고 단단해져 한 가정을 지키는 묵직하고 크나큰 울타리가 되었다. 그는 딸들과 아내에게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마당 같은, 마음껏 매달릴 수 있는 크고 울창한 나무 같은 아빠이자 남편이다.

자신이 예전에 다니던 카페들 대부분 바리스타의 시선 속에 자신이 노출되어 마음 편히 쉬지 못했던 경험을 되살려 손님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쉬었다 갈 수 있는 구조로 카페를 만들었다. 그들이 은폐된 장소에서 마음껏 머물다 가길 바라는 심정으로 ‘안방’을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덕분에 손님들 사이에서는 ‘친정 같은 카페’라고 소문이 났다. 요즘같이 화려하고 예쁜 것을 찾는 감성적인 커피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구석이라곤 없는 자신만의 작은 카페를 8년이나 지켜낸 힘은 이런 다정함과 편안함, 신선한 크레마와 작가와 같이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직원들의 친절과 정성 어린 마음일 것이다.

딸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이 대책 없이 다정한 아빠는 대도시의 백화점 입점이라고 하는 절호의 기회 마저도 고민 끝에 저버린다. 별을 볼 수 없다는 이유다. 별과 같은 두 딸과 주말이면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딸들과 놀다 아내와 다 같이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말한다.

“또 걸었다. 오지 않은 여유로운 미래를 기다리며 살기는 싫다. 몇 년이 지나면 오늘이 저릿하게 그리우리라. 그저 함께 걷는 이 길에서 작은 것을 찾길 원할 뿐이다.”

젊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삶의 조언들을 뒤로하고 나름 성공할 수 있는 여러 사업적 제안들 앞에서도 자신과 함께할 가족의 눈빛을 가장 먼저 우선으로 떠올리는 일.

그것은 미래에 아직 오지 않은 행복을 위해 지금을 저당 잡히고 행복을 유예하는 현대인의 삶과는 한참은 멀어 보인다. 그가 선택하는 삶의 순간순간이 빛나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행복이 그의 삶에 숨어서 별처럼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느끼는 삶의 결과 깊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향기를 품고 깊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 마저 들었다.

그 역시도 어느 날은 우울하고 좌절하고 밤을 새워 고민한다. 직원들을 책임지고 아내와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사장과 남편, 아빠의 자리에서 결코 녹록지 않은 파고 높은 바닷속을 홀로 외로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큰 것을 욕심 내지 않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의 마음은 그 자신보다 먼저 사랑에 가닿아 있다. 그런 마음들이 선택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가만히 눈을 감으면 그려질 듯하다.

거칠거칠한 삶의 면면을 자신만의 손길로 매일 정성껏 다듬고 매만져 부드러운 곡선의 나무처럼 만들고 보드라운 살처럼 만드는 사람의 모습. 그 모습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자꾸 뒤를 돌아다보게 되었다. 이미 이곳에 먼저 와 버린 내가 놓쳐 버린 것이 있는 사람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빈 호주머니를 뒤지게 된다. 아직 내게도 남아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여전히 나의 따뜻함과 다정함이라는 희망이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일깨워 준 고마운 책이다. 고마운 문장들이다.

어디 있더라?

“언젠가 작가님이 오시면 맛있는 커피 한잔 꼭 대접하겠습니다.” 마치 저 너머에서 메아리처럼 건넨 그의 명랑한 목소리가 담긴 글이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좋아서 하는 카페'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셔야겠다. 아니 추워지면 추워진 대로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작가가 운영하는 카페에 더 가 볼 일이다.

스산해진 날씨에 문득 선택지가 많지 않던 젊은 날의 기억에 발길이 멈추일 때, 사는 일이 유독 춥고 고독할 때, 가슴속에 큰 구멍이 뚫려 그 안으로 매서운 바람이 속수무책으로 불어올 때 "너를 만나 알게 된 것들"을 읽으며 벽난로가 있는 따뜻한 소파에 몸을 묻고 오래도록 작가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문장들을 음미해 보시길 추천드린다. 어느새 맑은 물에 마음을 담근 듯 더없이 고요하고 맑아져 있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12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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