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유해 순교 230년만
전북 순교자 묘지로 구전되던 초남이성지 인근
고고학, 해부학, 유전학적, 문헌 등 검증 일치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 세 복자의 유해가 발견됐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1일 기자회견을 열고, 과학적 연구 결과와 고고학적 분석 결과, 교회의 역사적 문헌 등 증거물 검토를 통해 교구특별법원이 지난 8월 18일 세 복자의 유해임을 선언했다고 밝히고, 유해 발견부터 수습, 분석 과정까지 자세하게 공개했다.

세 복자의 유해가 발견된 곳은 전북 완주군 초남이성지에서 북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바우배기 일대다. 이곳은 1914년 전주 치명자산성지로 옮겨지기 전까지 복자 유항검 일가의 묘지터로 추정되는 곳이자, 순교자 묘소라는 이야기가 마을에 구전돼 왔다. 

유해가 발견된 장소인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성지의 바우배기. (이미지 제공 = 전주교구)

초남이성지에는 유항검 복자의 생가터와 교리당이 있었고, 동정 부부 순교자로 복자에 오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가 4년 동안 살던 곳이다. 이에 2005년 초남이성지 초대 담당인 김환철 신부는 일대의 봉분을 돋우고 십자가와 표지판을 세워 관리했다.

현재 담당인 김성봉 신부는 “천주교 전주교구사”와 관련 서적들을 쓴 김진소 신부, 바우배기 성지 개발을 시작한 김환철 신부의 증언을 바탕으로 성지 개발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유해는 지난 3월 일대에 있던 분묘를 개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순교자 유해는 유해의 인적사항이 적힌 백자사발지석과 함께 발견됐다. 이에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는 윤덕향 전 교수(전북대 고고인류문화학과)와 묘소의 정밀조사 및 유물 연구, 송창호 교수(전북대 의대 해부학)와 유해의 해부학적 조사 및 유전 정보 연구에 돌입했다.

그 결과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 세 복자의 유해임을 확인했다. 

묘소의 정밀조사 및 출토물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출토물의 연대기가 윤지충과 권상연 두 복자가 순교한 1791년에 부합하고, 백자사발지석의 명문 내용이 두 복자의 인적사항과 각각 일치함이 확인됐다.

세 복자 분묘에서 각각 출토된 백자사발지석.  (사진 제공 = 전주교구)
세 복자 분묘에서 각각 출토된 백자사발지석.  (사진 제공 = 전주교구)

또 유해에 대한 성별 검사,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 검사 결과 모두 남성으로 복자들의 순교 당시 나이에 부합했고, Y염색체 부계 확인검사(Y-STR) 결과 각각 해남 윤 씨와 안동 권 씨 친족 남성 5명과 유전정보가 같았다.

특히 유해에 대한 해부학적 조사에서는 참수형에 해당하는 특이 소견이 발견됐다. 이에 대해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는 “조선시대 형벌의 하나인 능지처사의 흔적이 선명”하며, “복자 윤지충 바오로의 유해와 해부학적으로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복자 윤지충과 윤지헌의 유해에는 참수와 능지처참(능지처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복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윤지헌 복자는 1801년 같은 곳에서 유항검 복자와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윤지충 복자의 유해에서는 숨질 무렵 날카로운 도구로 비스듬하게 목뼈가 절단된 흔적이 드러났다. 윤지헌 복자의 유해에서는 목뼈는 물론 양쪽 위팔 뼈와 왼쪽 넙다리뼈에서도 숨질 무렵 가해진 예기 손상이관찰됐다.

분묘 발굴 현장. (사진 제공 = 전주교구)<br>
분묘 발굴 현장. (사진 제공 = 전주교구)
숨질 당시 날카로운 도구로 손상된 흔적이 남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뼈. (사진 제공 = 전주교구)<br>
숨질 당시 날카로운 도구로 손상된 흔적이 남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뼈. (사진 제공 = 전주교구)

전주교구는 유해를 수습한 이장업체의 증언을 빌어 수습 당시 “두 순교자 모두 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이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머리와 몸통이 분리돼 따로 묻혔을 경우 가능할 수 있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능지처참은 조선시대에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내리던 극형으로, 죄인을 죽인 뒤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을 말한다.

한편 이번 유해 발견은 한국 천주교회사적 가치는 물론 순교 당시를 가늠할 수 있는 조선 후기 문화사적 가치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선태 주교(전주교구장)는 담화문을 통해 굳은 연대와 형제애를 보여준 순교자들의 신앙과 모범을 “우리 자신과 이 시대를 쇄신할 수 있는 중요한 순교 영성”으로 이어나가길 당부했다.

분묘 개장 전 모습. (사진 출처 = 전주교구 홈페이지)<br>
분묘 개장 전 모습. (사진 출처 = 전주교구 홈페이지)

 

복자 윤지충 바오로(1759-91) :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

해남 윤 씨 일가로 고산 윤선도의 6대 후손이다. 1759년 태어나 26살인 1784년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접했다. 고종사촌인 정약용의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했고,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에게 세례받았다.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 윤지충은 1791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으며,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천주교 예법으로 치렀다. 소문이 퍼지자 잠시 피신했다 진산관아에 자수한 윤지충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는 설득과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아 곧 전라감영으로 압송됐고 문초 끝에 12월 8일 32살의 나이로 전주 남문 밖(전동성당 터)에서 순교했다. 매장은 처형 9일 만에 허락됐다.

 

복자 권상연 야고보(1751-91) :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

윤지충 바오로와 고종사촌 사이로 1751년 태어났다. 윤지충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부터는 기존 학문을 버리고 입교했으며 1787년 이종사촌인 복자 유항검에게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했던 권상연은 윤지충과 함께 조선교회 제사 금지령을 함께 실천하고 같은 날 40살의 나이로 순교했다.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1764-1801) :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

윤지충의 동생으로 형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됐다. 형과 사촌 권상연의 순교 뒤 더는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돼 고산 저구리(완주군)로 옮겨가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1795년 봄, 주문모 신부가 고산 저구리 이존창의 집에 잠시 머물 때 보례(약식으로 거행한 세례식이나 결혼식을 나중에 보충하는 예식)와 성사를 받았다. 선교사 영입 운동인 ‘대박청래운동’ 당시 교회의 밀사를 북경에 보내는 일에 동참해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됐다. 조정에서는 교회의 밀사 파견 내용을 캐내고자 했으나 그는 끝까지 함구했고 이에 의금부는 그가 반역을 꾀한 일에 동참했다며 사형 판결을 내렸다. 유항검과 함께 전주로 압송된 그는 1801년 10월 24일 형이 순교한 자리에서 37살 나이로 능지처참 당했다. 그가 순교한 뒤 그의 아내, 두 딸과 두 아들에게 유배형이 내려졌고 이들은 각지로 흩어져 관노나 관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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