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 칼럼]

뜬금없는 사랑 타령이다. 때 이른 봄볕 환한 오늘은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도 사람과 사람, 남자와 여자 사이의 눈물 나게 아름답고도 아픈 사랑 말이다. 날이 갈수록 사람 냄새는 희미해지고 핏발선 눈들의 아귀다툼만 만연한 이 땅의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따스함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어서다.

어느 날, 언뜻 보기에도 참 아름다운 자태의 낯선 여교우 한 분이 내게 찾아와 하얀 편지봉투 한 장을 내놓았다. 만년필로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편지 형식의 글이었다. 나는 그 봉투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여기 그것을 공개한다. 물론 신원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본인의 허락을 받았다.

-이전 생략- 고해를 해야겠습니다.
제가 신부님 한 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욕심은 없고 다만 그분이 건강하게 착한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분이 너무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당신의 소명을 다할 수 없게 마시고....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을 딛고, 함께 숨 쉬고 있음만도 행복하고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분이 수술하시고 병원에 계시는 동안 저는 누워서 잠자지 않겠다고 주님께 말씀드렸지요. 그분이 퇴원하시던 날 밤, 저는 부은 다리를 펴고 길게 누워 잠자리에 들면서 누워서 잠잘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간구했습니다. 그분의 지병을 제게 주시고 그분은 병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그분에게는 참으로 가난한 많은 영혼들이 의지하고 있고,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쓰일 곳 없는 제가 대신 앓고 싶다고. 그리고 주님께 여쭈었지요. 주님! 제가 당신보다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는지요? 당신은 질투하는 신이시니 제가 당신을 질투하게 했나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하신 주님! 제 일터의 현관문을 힘겹게 밀고 들어오는 가난한 이들보다 그분을 더 사랑했으니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지겠다고 하지 않고 그분의 고통만 대신 받겠다고 하니 이건 잘못된 신앙이지요.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고 있으니... 그래서 고해하고 싶은 겁니다. 편지 쓰는 동안 밖에는 첫눈이 함박눈 되어 쌓이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그 신부님이 누군지 나는 모른다.(그분은 내게 끝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 나는 그가 한없이 부러웠다. 그가 병상에 있는 동안엔 잠도 누워서 안 잤다니 세상에 이런 사랑도 있던가! 글 내용을 보면 보통 열심한 분이 아닌 것 같은데 하느님보다, 자기가 돌봐야 하는 아픈 이웃들보다 신부를 더 사랑한다고, 그게 가책이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 여인을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하기야 나도 사랑의 시를 쓴 적이 있었다. 내 가슴에 사랑의 감정이 펄펄 끓었다. 이런 감정이 내 안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형편없는 졸작인데다 누가 사제답지 못하다고 흉볼 것만 같아 조심스럽기도 하다. 부끄러움으로 옮겨본다.

서해와는 또 다른 사랑이예요
남해에 부는 바람은
서해는 긴 터널이었어요
외로운 사랑이었지요
그리움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사랑 
끝내는 골깊은 상처만 남은
애초부터 구차하게 매달리려는 건 아니었어요 
어느 날 문득 반백의 머리 서글퍼지면서
사그라지는 젊음을 붙잡아두려
분별없이 허우적거리던 몸부림은
얼마나 헛된 욕심이었는지요
보아요 눈부신 햇살은 
길가의 동백잎을 보석처럼 반짝이게 하고
여기엔 성난 파도도 개울음도 없어요 
추위나 어둠이 스며들 틈 없어요 
별밤마저 따뜻해요
오늘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릅니다 
흐르는 눈물 그대로 흐르는 채
살포시 웃는 눈물 콧물 얼룩진 얼굴
무슨 이유로든 다시는 놓고 싶지 않은 손
그대는 비록 너무 멀리 있어도
맞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알았으니 서둘러 돌아가야지요
가서 오랫동안 문 밖에 버려두었던
시를 다시 쓸 거예요
 내 가슴 더 야위어 식기 전에 
그대의 사랑으로 하여 (‘남해 기행’ 전문)

우리의 동료였던 사제 이용길이 얼마 전 사제직을 버리고 한 여인과 짝을 맺었다. 한 여인에 대한 한 사나이의 아름답고도 아픈 사랑이 영원하기를 간절히 빈다.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고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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