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부활 제6주일) 사도 10,25-26.34-35.44-48; 1요한 4,7-10; 요한 15,9-17

사랑이라는 말에 익숙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경상도에서만 살았다 보니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시공간을 따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가끔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흔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어린 왕자"를 지은 생택쥐페리가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봐도 모자란 세상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요. 사랑. 정말 좋은 말이지만 동시에 어려운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은 무엇인가요?

오늘 2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사랑입니다. 2독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요한 4,7 참조)을 이야기하고, 복음은 예수님 사랑 안의 머뭄(요한 15,9)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추상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2독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제가 처음으로 떠올렸던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 3,5)

구약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무언가 과정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의 이집트 탈출과정이지요.“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신명 7,8)라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뽑으신 백성들을 바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일련의 과정들을 마련하셨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그냥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을 언제나 마련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갑자기 우리에게 좋은 것이 주어지면 당황하거나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것을 제대로 누리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지요. 좋은 것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언제나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 잠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단련의 과정들을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비기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 3,12)

예수의 사랑. (이미지 출처 = PIxabay)
예수의 사랑.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지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만큼 가장 구체적인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역시 언제나 구체적이었습니다. 술이 모자라는 혼인잔치에 물을 술로 변화시켜 주시고, 배고픈 군중들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셨지요.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시는 장면들, 그리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구체적인 사랑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보여 주신 그 구체적인 사랑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의 말씀을 마주했을 때 사랑은 그저 그냥 좋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반복해서 깨닫게 되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신학교 저학년 시절 어느 책에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갑자기 마음속에 와닿게 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부활 시기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부활  시기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부활 제2주일 강론 때 ‘나에게 부활은 다가왔는가’라는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던졌습니다. 그리고 부활 시기는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빛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직 이 부활 시기가 그저 그런 날들이었다면 남아 있는 짧은 시기라도 주님 부활의 빛을 찾을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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