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부활 제2주일) 사도 4,32-35, 1요한 5,1-6, 요한 20,19-31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맞으면 서로 ‘부활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형제분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부활 인사를 축하한다고 할까요?” 나에게 직접적으로 무슨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매년 전례적으로 기념하는 대축일인데 왜 굳이 ‘축하한다’는 말을 쓸까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부활 대축일 저녁 미사를 마치고 들어온 사제관에서 이 질문은 하루 종일 제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왜 우리는 부활을 축하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부활 팔일 축제 내내 하나의 묵상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근원적 질문은 ‘나에게 부활이 다가왔는가’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맞이했던 부활 대축일에 드리는 두 번의 미사의 복음에서 공통적인 면을 하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파스카 성야 미사 복음에는 한 젊은이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이지요. 그리고 부활 대축일 낮 미사에 배치된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사전정보조차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던 구절은 바로 마지막 구절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내가 주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축하가 어색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성대하게 성삼일 전례를 거행하더라도 나 자신이 주님의 부활하심을 느끼지 못하면, 그 부활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부활은 나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세상의 무엇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지만 나에게는 그저 1년에 한 번씩 맞이하는 행사에 불가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나에게 다가온 주님의 부활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은총을 이번 부활시기 동안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오늘 복음 역시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인물이 강조됩니다. 바로 토마스입니다. 그런데 이 토마스의 모습이 부정적으로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을 제대로 체험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해 보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라는 제자들의 말에 직접 주님의 모습을 마주해야만 믿을 수 있다는 아주 인간적인 반응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토마스는 부활한 주님을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부활을 축하한다고, 그분의 부활을 마주한 기쁨을 표현하는데 ‘나는 아직’인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주님을 만나자마자 손가락을 대보고 손에 옆구리를 넣어보기도 전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합니다. 체험의 그 순간 모든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그래야만 합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아직’ 나에게 오지 않은 것만 같은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시기는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빛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앞으로 두 달 가량 되는 날들을 부활시기로 보냅니다. 이 긴 기간 동안 교회는 성찬예식을 시작하는 감사송 마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때에’ 라는 말을 특별히 덧붙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보내신 수난과 부활의 여정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등장하는 구절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 이라고 말한 요한복음서 저자의 노력 역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묵상을 마음에 품다 보니 제가 몸담고 있는 부산교구의 교구장이신 손삼석 요셉 주교님께서 발표하신 올해 부활 메시지의 제목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삶이 바뀌어야 부활이 옵니다” 많은 교우분들께서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지만 ‘아직’ 나에게 오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 삶이 그분의 부활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앞으로 길게 남은 이 부활시기가 내 삶이 부활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의 나날들로 채워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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