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기다린 영화다. 이 영화 '미나리'를 지난해 1월에 열린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처음 들었다. 미드 '워킹 데드'로 유명해진 재미교포 배우 스티븐 연은 '옥자'와 '버닝'으로 한국 영화에 출연하며 익숙해졌는데, 한국인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에서 연기한다고 하니, 낯설지는 않았다. 한국말 제목 ‘미나리’는 포스터만 봐도 어느 보통 재미교포 가족의 흔한 미국 정착기일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선댄스에서 이 영화는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필자는 ‘관객상’에 꽂혔다. 선댄스 대상보다 관객상에 더 눈길이 간 것은, 역대 선댄스 관객상 영화가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미스 리틀 선샤인', '원스', '서칭 포 슈가맨', '위플래쉬', '서치', '더 길티' 등 관객상 리스트 면면이 화려하다.

그리고 이후, '미나리'의 행보는 더 활짝 피어났다. 70개가 넘는 영화상 수상, 그중 26개의 여우조연상, 아카데미상 전초전이라고 불리는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았고, 곧 미국 배우 조합상과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 발표가 남아 있어 앞으로 더 수상의 여지가 있다. 4월 25일 열리는 대망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과연 몇 개 부문에 이 영화가 오르고, 윤여정이 아시아 여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영화제 연기상에 지명될지가 연일 화제다.

'미나리', 정이삭, 2020. (포스터 출처 = 판씨네마㈜)
'미나리', 정이삭, 2020. (포스터 출처 = 판씨네마㈜)

'기생충'이 칸과 오스카 양대 산맥을 뛰어넘고, BTS가 빌보드 최정상을 밟자, '미나리'의 수상은 큰 뉴스가 아닌 것처럼 무덤덤해지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이 영화의 수상 행진은 한국 문화사적으로 굵직한 사건이다. 미국 자본으로 제작되고, 미국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미국 국적 영화로써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 시각에서, 이 영화를 과연 한국 문화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다움’(Koreaness)은 남한, 북한, 해외동포의 문화와 활동을 포함한다. 조금씩 다르지만 역사, 문화, 습관,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코리아’를 생각할 때, 영화 내용 대부분이 한국말, 한국 사람, 한국 문화와 습관으로 채워진 만큼, 광범위하게 K-컬처의 또 하나의 자랑으로 봐도 될 터이다.

코리안이 쓰는 미 개척사

영화에서 가장 미국다운 장르가 ‘서부극’이다. 서부극은 프론티어 정신으로 무장한 미국인의 서부개척사다. 한국인의 미국 개척사처럼 보이는 '미나리'에는 서부극처럼 황량한 대지와 고독한 남자가 있다. 그러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인은 없다. 그저 나쁜 상황이 있을 뿐이다. 오래 걸리지만 어디든 쉽게 뿌리를 내리고, 물을 정화시킨다는 미나리는 영화에서 낯선 땅에서도 억척같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한국인을 상징한다.

1980년대 레이건이 대통령이던 시절, 젊은 부부는 미국으로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이주한다. 처음 간 곳은 캘리포니아였지만, 아마도 이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아버지 제이콥(스티븐 연)은 남부 시골인 아칸소 주 땅에 바퀴 달린 트레일러 하나 박아 놓고 농장을 가꾸기로 결심한다. 병아리 감별사라는 기술직으로 먹고사는 데 크게 암울함이 없던 아내 모니카(한예리)는 심장병이 있는 아들 데이빗(앨런 킴)을 데리고 병원도 없는 시골마을에서 살 수 없어 불만이 가득하지만,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해내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일념으로 고집을 피우는 남편을 무너뜨릴 재간은 없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 외할머니(윤여정)가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딸네 집으로 온다. 여기서 영화는 한차례 전환점을 맞는다. 데이빗의 눈에 할머니는 생각했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다. 요리도 하지 않고, 나쁜 말을 쓰고, 남자 팬티를 입고, 나쁜 냄새가 나고, 몸에 좋은 것은 자기가 먹는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영어를 구사하는 어린 데이빗과 한국 외할머니의 사소한 문화적 충돌은 웃음을 자아낸다. 한국식으로 아이를 돌보는 할머니의 방식은 때론 뻔뻔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미나리'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판씨네마㈜)
'미나리'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판씨네마㈜)

묵묵히 엄마의 손을 거드는 의젓한 큰딸 앤(노엘 조)까지 다섯 식구의 일상은 이민자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모습이 아니라, 어떤 가족이라도 경험한 직한 보편적인 에피소드를 담는다. 이 영화를 ‘이민자 가족의 정착기’라기보다는 ‘보편적 가족 드라마’로 보고 싶은 이유다. 이 이유가 외국 관객에게도 호소력으로 작용한다.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은 80년대 미국으로 이민 온 자신의 어린 시절 수많은 기억을 이 영화에 녹였다고 한다. 그는 골든 글로브 수상 소감에서 “딸에게 보여 주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으며, 마음의 언어를 배우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를 ‘외국어 영화’ 부문이라는 협소한 카테고리에 한정할 수 없는 이유다.

이야기, 스타일, 성찰성

'미나리'는 초저예산 영화이고, 미국 인디영화 정신을 계승한다. 자연광, 인공적이지 않은 로케이션, 일상의 서사, 계산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기, 열린 결말을 통해 얻어지는 깊은 여운 등 테렌스 맬릭, 리처드 링클레이터 같은 인디영화의 거장들이 연상된다. 좋은 영화란 서사, 스타일, 그리고 영화를 통해 성찰하게 되는 힘이다.

'미나리'에서 '기생충' 같은 끝내주는 재미와 예술적 성취의 조화를 상상하고 실망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작고 소중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꾸며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포착하는 장면들이 주는 에너지에 경탄할 것이다. 그리고 비극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 이 가족의 자포자기한 모습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며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강가에 가득 핀 미나리의 생명력처럼 이 가족은 끈질기게 살아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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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판씨네마㈜)

레슬링이 유행하던 80년대는 레이거니즘이라는 신자유주의가 출발한 시대였다. 개인주의와 경쟁제일주의가 극단으로 흐르는 신자유주의 세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불태운 한 남자와 가족의 울타리가 되었던 한 여자, 고통으로 점철된 삶일지언정 일상의 유희를 즐길 줄 알던 한 노인, 그리고 그들에게 거울이 되었던 아이들. 이 가족은 바로 나의 가족의 모습이기도 하다.

거리두기와 자가 격리, 안전 제일이 일상화된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가족의 의미와 새삼스레 만났다. 한 팀이 되어 삶을 헤쳐 나간 '미나리'의 가족 드라마는 이 상황에서 더 큰 의미가 될 수밖에.

국내에서 제작된 콘텐츠와 외국에서 코리안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콘텐츠 모두 K-컬처, K-콘텐츠다. 21세기 다문화, 다인종, 다양성에 거리낌이 없는 세계인들이 K-컬처를 보고 함께 즐기고 공명하는 하나의 네트워크 사회라는 점이 다행스럽다. 국뽕이라서가 아니라 좋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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