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희망' 26호 특별좌담회 요약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새 회칙 '모든 형제들'에 대한 좌담회를 진행했습니다. "기쁨과희망" 26호에 실린 좌담회 내용을 요약해서 싣습니다. -편집자 주

좌담회 참석자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이문동 본당), 함세웅 신부(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원장), 이영우 신부(서울대교구 봉천3동 선교본당), 한경호 신부(꼰솔라따선교수도회 본원장), 강현우 신부(서울대교구 삼양동 선교본당), 오민환(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연구실장)

'모든 형제들',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21. (표지 제공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모든 형제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지난 2월 8일 프란치스코 교황 새 회칙 ‘모든 형제들’ 한국어판이 발간됐습니다. 그에 앞서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은 영어판 번역을 읽고 새 회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영어판을 번역한 박동호 신부가 회칙의 구성과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회칙의 의미와 특징, 교황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해 봅니다.

박동호 : 우선 새 회칙은 전체 8장에 287항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장에서는 현대 세계의 상황을 성찰했고요. 2장은 루카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영적 독서 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장이 폐쇄된 현대 세계를 묘사했다면, 3장은 열린 세계를 구상하고 희망하면서, 그 세계를 싹트게 하기, 4장부터가 나름대로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을 제안한다고 할까요. 4장이 ‘전체 세계에 열려 있는 마음’, 5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정치를 언급하고, 특히 포퓰리즘을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대신에 ‘대중 운동’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경제 문제의 심각성도 언급하지요. 6장은 문화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장이 ‘새로워진 만남의 경로들’이라는 제목으로 평화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 줍니다. 8장으로 마무리하면서 세계를 향한 종교의 임무와 역할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새 회칙은 전반적으로 근대, 모더니즘의 인간관과 세계관 왜곡, 문화의 타락을 암울한 현대의 근본 원인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합니다. ‘사람이란 물건이 아니라 내 살점(혈육)이다’라는 인간관. 즉 사회는 야수들 투쟁의 장의 아니라, 서로 공생공존하는 우정의 장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문화적으로는 함께 돌아가야 할 인간관과 세계관을 지적하고, 경제 차원에서는 신자유주의의 경제를 곳곳에서 비판하면서 사회적 우애의 정신을 언급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재화의 사회적 성격, 공동체적 성격, 심지어는 공산사회적 성격을 갖는다고 합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 신자유주의 경제 대신 공유경제를 제안하고 있다고 해석되고, 정치는 권력 획득을 목표로 삼지 않고, 정치를 인간 존엄과 공동선 증진의 도구로 삼아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물으면서, 카리타스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가 최악이 될 수도 있고, 또 최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최선의 관점에서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의 사랑(caritas)의 성격을 강조합니다. ‘모든 형제들’은 이렇게 현실을 관찰하고 진단하면서 문제의 원인으로서 인간관과 세계관의 왜곡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써 정치, 경제, 문화 영역의 쇄신을 호소하면서, 이 모든 일을 함께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함께 꿈을 꾸자! 함께 새 세상을 구상하자!’라는 초대로 회칙을 내놓았다고 짧게나마 정리를 해 봅니다.

함세웅 : 저는 ‘모든 형제들’을 읽으면서 많은 걸 새로 느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도 자신의 사제적 체험에 기초해서 썼는데, 교황님 문서가 체험에 기초했기 때문에 강한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번 회칙을 보면서, 구성 면에서도 기존 교회 문헌의 스케마와 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교회 문건 대부분이 논문 형식을 취했었는데, 이 회칙은 대화 또는 강론 같았어요.

2장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모티브로 잡으셨는데, 그 많은 비유 중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회칙의 모티브를 잡았습니다. 제가 이 비유로 크게 감동받았던 것은, 사실 윤공희 대주교님의 고백을 듣고서였습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때 금남로 주교관 6층에 계셨던 주교님은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군인들이 학생들을 짓밟고 때리고 끌고 가는 모습을 보셨답니다. 그리고 가슴에 모신 십자가를 응시하면서도 당신은 무서워서 못 내려가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길가에서 어머니들이 군인들하고 싸우면서 물도 갖다 주시고 대항하면서 학생들을 숨기기도 해 주는 걸 목격하면서, 머리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얼마나 많이 읽고 강론하고 교우들에게 감동을 주었던가? 그런데 여태까지 스스로 그 강도 맞은 사람을 외면한 사제가 나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강도 맞은 사람을 놓고 피해간 사제, 레위인이 바로 나였구나라고 깨달으셨다는 것입니다. 회칙에서 교황님은 이론적으로 아주 세세하게 누가 사제이고 누가 레위인이고 누가 우리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인가, 계속 물음을 던지십니다. 아쉬운 것은 교회적 성찰, 사제적 성찰이 좀 적어요. 그런 것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더 뜨거운 메시지가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형제도에 관해 박 신부님이 설명해 주셨는데, 신학교 다닐 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당방위론, 말하자면 공동체의 정당방위를 위해 사형이 가능하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머릿속에 그 내용이 입력되어 있어서 지금까지도 선뜻 사형 반대에 앞장서지 못했어요. 저는 아직 사형 반대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지는 못해요. 억지로 뒤에서 따라가고만 있어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공동체 차원의 정당방위론에 대해서도 설명을 좀 하셨어야 했는데, 교부들의 말씀만 인용하셨습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까지 가톨릭교회는 사형을 찬성했거든요. 또 실제로 교회가 사형을 실행했어요. 회칙에서 교회가 사형시킨 것, 중세 때 마녀사냥, 종교재판, 화형 등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먼저 하셨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사형만 반대한다 하면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 다음 이민자와 관련해서, 국경개방 문제도 다 좋아요. 그렇다면 분명하게 이 지구는 그 누구의 땅도 아니다, 모두의 땅이다, 이렇게 더 강하게 말씀하셨어야 한다고 봐요.

또 감동한 것은 이슬람교 최고지도자를 만난 내용입니다. 다른 종교 지도자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교훈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아름다운 일이죠. 저도 사제로서 뒤늦게 깨달았는데 사실 가톨릭교회도 정통 가르침과 다른 것을 늘 배척했었어요. 그런 면에서 교황님의 ‘다름’을 인정하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공감했고 감동했습니다.

이주와 피난 - 보편 인권과 국경의 문제

오민환: ‘모든 형제들’은 텍스트 중간중간에 상징적인 코드가 많은 것 같은데, 아까 함 신부님 말씀하신 것처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800년 전에 이슬람 지도자 술탄을 만난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렇게 타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와 적대적이라 할 수 있는 이슬람 지도자를 성 프란치스코도 만났고, 교황도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모임에서인가 한경호 신부님이 말씀하셨듯이, 회칙 말미에 샤를 드 푸코는 교황의 말씀을 뒷받침하는 듯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 같더라고요.

한경호: 지난 12월 1일이 샤를 드 푸코의 축일이었거든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님들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저에게 미사 집전을 부탁하셔서 갔습니다. 좌담회에서 ‘모든 형제들’ 이야기를 할 건데, 샤를 드 푸코의 영성 차원에서 형제애가 무엇이냐고 물어봤어요. 존재(being)와 행동(doing)은 같다는 거죠. 같이 머무는 것, 함께 머무는 것이 나중에는 종교적으로, 또 우리 신앙으로는 순교까지, 푸코 같은 경우에는 일기에 항상 그렇게 쓰죠. 순교할 수 있는 영광,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최고의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분들은 가난한 사람들 옆에 있는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난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그 사람처럼 될 순 없잖아요. 현실적으로, 그 한계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그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애회에서 바라보는 형식이 조금은 다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나자렛, 아기 예수님, 일상의 삶, 그 안에 머무르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파키스탄 사제 재속회에서 쓴 책을 보라고 하더군요. 파키스탄에서 오래 사셨던 프랑스 분인데, 가장 힘들었던 게 무슬림 입장에서 보면 가톨릭 사제들도 개종시켜야 되는 사람으로 본다는 거죠. 회심시켜야 하는 사람이지요. 저도 선교사이기 때문에, 제 안에는 가톨릭으로 세례를 줘야 한다는 본심이 있거든요. 국경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보통 선교사들이 말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국경 지역에 있다는 표현을 쓰거든요. 그런데 교황님이 국경이라고 했을 때는 선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선을 다르게 해야 한다, 곧 형제애가 되어야 한다고 이해를 했거든요. 국경 그 자체가 형제애가 되어 있어야지 벽을 만들고 틀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형제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스스로 이게 가능한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되죠.

미사 때 이슬람 이민자가 미사 중에 올라와서 과격한 욕을 하면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신부님이 멈춰 달라고 하는 것이 지금 유럽의 상황이에요.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무슬림하고 갈등이 아주 심각해요. 그런데 이분들이 이주민들이라는 거죠. 유럽에서 20-30년 전부터 대두되었던 게 뭐냐면, 왜 너희들은 이민자들이나 불법체류자들이 왔을 때, 모스크를 지어 달라, 기도하게 해 달라고 해서 다 해 줬다. 그런데 왜 우리가 성당에 가서 미사를 못 하게 하느냐며 거꾸로 묻는 거예요. 이런 실질적 어려움이 있어요.

교황님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 현실 안에 사는 많은 사제는 지금 고개를 젓고 있습니다. 특히 이민자들의 수용 부분에 있어서 아주 강하게 반대합니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실제로 ‘카리타스’ 이런 곳에서 일하시는 신부님들 이야기 들어 보면 이민자들에 대한 불신이 많이 생겼대요. 처음에 좋은 뜻으로 해 줬는데, 나중에는 이민자들이 왔으면 이 나라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 그리고 언어라든지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끊임없이 하게 됐을 때.... 원래 살고 있던 스페인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나도 가난한데, 지금 일자리 없고 애들 밥 먹이기도 힘든데.... 그럼 내가 그들과 같이 원조받는 줄에 서서 도움을 받는 자체가 자존심이 무너진다는 거죠. 거기 갈 수 없다는 거에요. 이게 진짜 현실적인 부분이죠. 저는 ‘형제애’,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지만, 또 ‘착한 사마리아 사람’ 정말 좋은 예화이지만, 인간적으로 제가 앞서 말한 현실적 한계를 넘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됩니다.

생태난민, 그리고 그리스도교 유럽의 고민

박동호: 이민과 난민이라는 걸 이슬람 문제라고만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슬람과 관련된 것은 종교 갈등 얘기고, 이민과 난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복음의 기쁨’과 ‘찬미받으소서’에서 ‘생태부채’ 얘길 해요. 그러니까 북반구 나라가 가난한 남반구 나라에 외채를 줬잖아요. 그런데 역사를 200년 내지 또는 2차 세계대전 후 급속한 공업화 발전의 60-70년 역사를 보면, 북반구의 경제성장에 의해서 남반구가 처절하게 수탈당했다는 거에요. 근대화와 산업화의 그런 관점에서는 북반구가 남반구에게 빚을 졌다는 얘기지요. 그게 이른바 생태부채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느 지경까지 갔냐면 남반구의 특정 지역에는 더 이상 사람이 못 산다는 거지요. 이민, 난민이라고 말할 때 전쟁이나 내전에 의해서 위험으로부터 도피하는 난민도 있지만, 지금 상당수의 유럽으로 가는 난민은 환경 난민이라는 거예요.

오민환: 북반구 근대화, 산업화의 역사가 일종의 생태난민을 양산한 셈이군요.

박동호: 그런데 이분들이 왜 못살게 되었냐면 바로 잘사는 선진국이 지난 70-80년 짧게는 2차 세계대전 후, 좀 길게는 산업화 동안에, 특히 아프리카 같은 경우 ‘찬미받으소서’ 내용을 꼼꼼히 읽어 보면, 아프리카 땅 자체를 못 쓰게 만들었다는 거지요. 윤리적으로 문제인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른바 ‘환경 위해 산업’들은 전부 해외로 이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독극물 같은 것, 이런 것들은 공해상으로 버리다가 못 버리게 되니까 아프리카에 팔았다는 것에요. 그래서 아프리카 물 자체가 이미, 대수층 지하수 몇십 미터 파면 나오는 물 자체가 이미 오염돼서 마실 수 없게 되어 버렸고 생존할 수 없는 땅이 만들어진 거지요. 지금 유럽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난민들은 사실은 - 언론들은 내전 등의 이유라 보도하지만 - 환경 난민이에요. ‘찬미받으소서’에서는 선진 북반구는 남반구에 생태부채를 지고 있고, 이것을 갚아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 메시지가 나름대로 소통되는 사람이 독일 수상 메르켈 같아요. 메르켈은 EU를 주도하면서 난민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정책에 이러한 생각을 깔고 있지요. 다른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메르켈 수상에게 고맙다고 했지요.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인류에게 저지른 게 있잖아요. 그렇게 서로 소통하면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보상하는 방법은 고통받은 사람이 일어설 때까지 도움을 주려는 것이지요.

유럽의 기존 정서에서는 ‘왜 외국인을 받아들이냐 우리도 먹기 힘든데’ 하는 논리가 여전히 있어요. 그런데 윤리적 관점에서, 그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선진국들의 지난 몇십 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황청 ‘온전한 인간 발전 촉진부’를 설립할 때도 이민과 관련한 부서는 교황이 직접 담당하고 있는 거예요. 아직까지는. 유럽에서 논의되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문명 사이의 문제에서, 종교와 테러리즘이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고, 난민과 관련해선 환경난민 방향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해하는 것 같아요.

이번 회칙에서는 세계 경제가 됐든 문화가 됐든 인터넷이 됐든 국제사회의 그 배후에는 강력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다는 거지요. 교황은 어떤 자리에서는 특별히 아예 대놓고 식량산업이나 무기산업 이런 걸 노골적으로 언급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내전이라든가 종족 간의 분쟁이라든가 국지전 같은 경우, 거기서 생기는 난민들도 따지고 보면 북반구에 잘사는 특정 그룹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작동된 거니까, 그들한테만 고통이나 무거운 짐을 오로지 짊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할 다면체로서의 세계

오민환: 새 회칙을 두고 어떤 언론에서 ‘온정주의자의 도발’이라는 제목을 붙여 칼럼을 적은 걸 보았습니다. 온정주의(paternalism)는 형제자매애와 연결된 일종의 가족주의라 하더군요. 이를테면 사용자의 온정에 따른 노동자 보호, 그리고 이에 보답하려 노동자가 협조하는 것으로, 경직된 계약관계가 아닌 서로의 정감에 호소하여 노사관계를 원활히 하려는 노무관리의 기조라 합니다. 아무튼 형제들끼리는 서로 싸우다 나중에 화해하지 않나요. 정감의 측면을 강조한다는 것에서 온정주의자의 도발을 말하는 가 봅니다.

박동호: 우리 세계는 북반구, 남반구라는 이런 양극이라 보잖아요.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이 세계가 다극의 세계로 전이가 된 거에요. 동서 냉전이 해체되면서 북반구와 남반구 경제적 격차가 뚜렷했는데, 어느덧 가만히 보니까 북반구에서도 불평등의 지수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렸습니다. 이른바 더 많은 고통과 죽음을 나누는 영역이 있는데, 바로 경제와 금융 부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극의 사회에서는 원심력과 구심력에서 어디도 끼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이 곳곳에서 벼랑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연출된다고 해석하는 것 같아요.

함세웅: 교황께서 전쟁을 반대하시면서, 핵폭탄의 비극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말씀하셨지요. 제가 하와이에 있는 수도원에서 두어 달 지낸 적이 있는데, 그곳에 2세 일본인 수사가 있었어요. 8월 중순쯤 되니까 나가사키, 히로시마의 핵폭탄 떨어진 이야기를 식당에서 하면서 일본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거에요. 이에 저는 이의를 제기하며 항변했어요. 핵폭탄이 왜 떨어졌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일본의 침략과 수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기억해야 한다고 지적했어요. 교황님이 핵무기에 대해 반대하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핵폭탄의 피해국이기 이전에 침략국, 전범국이었음을 분명히 지적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민환: 제가 지난주 금요일에 본 칼럼에서 ‘공통감각’(sensus communis)에 관한 이야기가 있더군요.(이광석, 안전 사회를 위한 슬기로운 백신 ‘공동의 감각’, 경향신문 2020.12.4. 참조) 생태감각, 연대감각, 기술감각 이런 걸 아우르는 공통감각을 말하는데, 가톨릭에서 말하는 신앙감각(sensus fidei)과 연관된다고 생각했어요. 복음적 진리에 대한 초자연적 본능이라고나 할까, 그 신앙감각은 바로 오늘날 타자(자연/우주)와 나를 연결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생태, 연대, 기술의 감수성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동호: 지금 의식(sense)을 얘기했는데, ‘모든 형제들’에도 의식에 관해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주로 타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 나온 뒤부터는 그 상대를 항상 사람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사람, 단체, 자연까지 타자로 해석하게 되는데, 그것은 서로 하나가 엮여 있다는 의식, 하나의 운명, 전체 공동체, 공동의 가정에 귀속된다는 의식, 서로 연대한다는 의식, 보조한다는 의식 등등 의식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런 점에서 보면 근대를 이야기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더니즘의 혜택 가운데 하나가 과학기술의 발전이라고 봅니다. 그건 모두가 인정하는 거지요. 그런데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문학적 가치와 결합되어야 하는데, 인간보다는 과학기술이 압도한 거죠. 그것을 ‘복음의 기쁨’에서는 과학기술 관료주의라면서, 과학기술 분야들의 속성상 전문화 되면서 파편화된다고 하지요. 깊이는 있지만 파편화되어, 옆에서 벌어지는 일이 뭔지 모르게 되는데, 결국은 사람과 사회가 그렇게 과학기술 영역 안에서 갈라집니다. 그런데 이 과학기술이 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결되는 순간 사람과 사회는 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진단을 내린 게 ‘복음의 기쁨’이거든요. ‘찬미받으소서’는 그걸 자연까지 확대 확장한 거고요. 그러니까 기술 의식(감각)이란 과학기술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에 시장 자유가 결합이 되면, 시장과 과학기술은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환상을 심어 준다고 보고 있는 거에요. 어쩌면 겉으로는 의식(감각)을 내세우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말이 생각이 난 게 아닐까요. 우리가 의식을 상실했다, 꿈을 잃었다, 이런 표현을 쓰거든요. 그건 이제 공동체 의식, 귀속 의식, 연대 의식, 하나라는 의식, 그다음에 상호 책임 의식을 잃어버리고 파편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거라 봅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에 살고 싶고,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오민환: 신부님 말씀과 연결해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또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가? 이런 고민 이 ‘모든 형제들’의 근본적인 물음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회칙이 코로나 시국에서 쓰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애와 정의를 결합해 보다 나은 세계가 되기 위해서 정치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계속 제기하는 것 같습니다.

박동호: 그렇다고 봐야죠.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달린 회칙입니다.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지만, 형제애는 정치를 말하고, 사회적 우애는 경제를 말하는데요. 나쁜 정치는 적을 만드는 거고요, 좋은 정치는 형제 중에 가장 약한 사람 하나를 살리고 그를 돌보는 일을 말합니다. 경제는 소유하고 독점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적 우애는 단지 사회적 차원의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재화의 공정한 분배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우애는 경제 문제를 말한다고 봐야겠지요.

‘사회적 시인들’ 그리고 깨어 있는 시민들의 연대

박동호: 시선은 단지 작은 이들의 존재에 머물지 않고, 작지만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의 결집된 구체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도 말합니다. ‘모든 형제들’에서 대중운동 하는 사람들이 2014년쯤 바티칸에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그때 쓴 연설을 많이 인용합니다. 여기에 참석한 이들은 이른바 큰 조직적 대중운동가들이 아니고,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풀뿌리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교황은 그들을 사회적 시인(social poet), 사회 차원의 시인이라 표현합니다. 시인은 여러 아름다운 시어들을 모아 한 편의 시를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유명한 시민사회 조직가가 아니라, 마치 시인처럼 개개인이 지닌 선한 것을 잘 엮어 하나의 집단의 힘으로 창작해내는 사람들, 곧 사회적 시인이라는 것입니다. 개별 행위의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서 칭송하면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결합해서 하나의 큰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건 분명 물리적 힘과는 구별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조금 전에 말한 선한 한 사람을 모델로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큰 힘으로 가는 각각의 사람들의 연대한 힘이라고 할까요.

오민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든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앙가주망(적극적 사회참여)으로서 이웃사랑의 행위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신학적으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고요.

박동호: 문제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 정치, 경제, 문화에 전 근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남아 있는 거고요. 인민, 공민, 시민, 즉 내가 책임 있게 무엇을 한다는 주체 의식이 전개되는 것이 근대인데, 우리 같은 경우 정치는 국회의원들이 다 하는 거고, 경제는 기업가들이 다 하는 거고, 또 문화는 예술가들이 다하는 거고, 시민은 그저 일상의 생업에 충실하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치, 경제, 문화 영역에 책임 있는 주체로서 시민이 자신이 삶의 본질적인 차원을 지니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대상이 되거나 종속됩니다. ‘복음의 기쁨’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데, 교회가 할 일은 베네딕도 16세도 얘기했듯이, 교육과 카리타스에 더하여 삶의 핵심인 정치에도 교회는 임무가 있다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얘기들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정치라는 것은 근대 시민사회에서는 삶의 한 영역인데, 우리는 그것을 어떤 특화된 집단이 수행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데 익숙합니다. 우리 교회가 정치적인 현안을 말하면 금기하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모든 시민은 그 사회의 정치적 현안에 관해 자기 책임하에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을 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분리하는 데 너무 익숙해진 거죠.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웃사랑이 카리타스의 가장 큰 영역인 정치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인을 업고 강을 건너는 것도 카리타스 행위이고, 정치인이 강 위에 다리를 놓는 것도 카리타스 행위라는 거죠. 다리를 놓는 것은 자원분배부터 이해관계는 어떻게 조정 할 건지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는 카리타스 행위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을 비판하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인식하니까, 자꾸 정치에서 멀어지고, 정치를 자꾸 별개의 것으로 보게 만들죠. 정치가 정쟁이 되어 버릴 위험이 높아집니다.

교회의 정치참여와 책임

오민환: ‘모든 형제들’ 276항에서 종교 교역자 이야기를 해요. 사제일 수 있겠지요. 이들은 평신도에게 적합한 영역인 정당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지만, 공동선에 대한 부단한 주의와 온전한 인간발전에 관한 관심을 수발하는 삶, 그 자체의 정치적 차원을 단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앙가주망이겠지요.

한경호: 제가 브라질에서 일할 때, 그곳 교구 신부님이셨는데 오랫동안 시장으로 일을 했어요. 브라질에선 정치, 종교, 축구 얘기는 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예민한 분야죠.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까, 주민들이 그 신부님이 시장이 되어야 한다고 밀었어요. 우리로 보면 자그마한 마을에서 시장을 한 10년 동안 하셨어요.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데, 다른 신부님들은 ‘시장으로 출마하려면 옷 벗고 나가라’ 그러고, 신자들은 ‘사제로서의 시장을 원했지, 사제를 그만두고 와서 정치하라는 건 아니다’ 그러는 거에요. 그분이 시장직을 마치고 나면 본당을 못 맡아요. 정당 소속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거에요. 그런 아이러니한 현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신부님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신부님은 인간으로서 한계점을 많이 느꼈다고 합니다. 정치를 더 해 달라고 요청이 왔지만, 신부님은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교구 소속 사제이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지요. 그 신부님에게 미사를 부탁하거나 교리를 배우면 신자들이 분열된다는 이유이지요.

함세웅: 한 신부님의 말씀에서 느끼는 점이 있는데, 정치라는 영역은 통합이 안 되고 항상 분열되어 있다는 겁니다. 어디 정치 영역뿐이겠습니까? 인간의 영역 전체가 모두 분열적이지요. 분열의 뿌리는 바로 원죄이며, 이게 인간의 제2본성이기도 합니다. 특히 노사분쟁의 경우, 저는 가끔 어깃장 식으로 말합니다. 노동쟁의는 예수님이 오셔도, 부처님이 오셔도 해결이 안 돼요. 저는 언젠가 전태일 열사 묘소 앞에서 민주노총 간부들에게 직언한 적이 있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똑같이 일하면서도 임금은 절반 정도밖에 못 받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봉급에서 일부를 떼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나누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래야 기업인들도 정부 당국자들도 감동을 받아 노동문화, 노사문화가 아름답게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과 정규직 노동자들은 나눌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심 때문이지요.

박동호: 노조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독일의 경우 노조하고 기업이 극단적인 관계로 치닫다가 그게 서로 좋지 않다는 경험을 한 후, 기업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도 노조와 함께하고 경영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내릴 때도 노조가 반드시 참여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 두 가지가 전혀 내재되어 있지 않지요. 노사가 완전히 대립적이죠. 여기서 문화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노사가 극단적인 대립의 관계로 갔을 때와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문화 말입니다.

좀 전에 말씀하신 그 신부님의 경우 사제로서 시장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정치를 정말 잘해서 집단이 가진 자원이 정치를 통해 점점 나아지는 세상이 되고, 그동안에 불균등했으면 좀 더 균등하고 평등하게 나가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가는 일들을 신부님이 했다면, 다만 그것에 관해 평가해 주면 되는 것이라 봐요. 정치 문화나 경제 문화가 추락하는 곳에서의 몸부림과 이것을 개선하려는 과정에서의 몸부림은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죠.

한경호: 옛날에 돈으로 투표권을 매수하는 일이 있었잖아요. 브라질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돈 주고 표를 사는 작업이 뉴스에 나온 거에요. 그런 걸 일반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니까, 좀 깨끗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중에 사제가 가장 낫다는 결론이 난 거죠. 한국에서도 신자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장경제는 경제인들이 알아서 해야지 정치인이 들어오면 안 된다. 정치도 일반 사람이 관여하면 안 된다 하는 경우가 강해요. 그럼 우리 신앙인들의 입장에선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까요? 신자들한테는 신자유주의니 포퓰리즘이니 이런 말은 안 먹혀요. 어느 지역에서 봉사자분들이 오시는데, 그분들은 부동산 해서 몇십 억씩 번대요. 그리고 나중에 그걸 후원금으로 보낸다는 거에요. 어찌해야 할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경제비판

박동호: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전의 교황들하고 차이가 분명한 것, 즉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경제 분야에요. 사회교리와 관련해서 보면, ‘복음의 기쁨’은 사회교리 문헌이 아니라고 본인이 밝힘에도 분명히 얘기를 하는 부분이 경제이거든요. 그때만 해도 신자유주의라는 표현을 안 썼어요. 돈을 우상으로 섬기네, 시장의 자유 등 여기까지만 말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회칙에서는 아예 대놓고 아까 말한 4장에서 정치를 언급합니다. 나쁜 정치 얘기할 때 두 가지를 꼽는데, 포퓰리즘과 신자유주의를 말하거든요. 그런데 이분만 말한 게 아니라 2007년,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왔을 때 이미 신자유주의는 수명을 다했다고 간주합니다. 신자유주의 모델은 이미 효용 가치가 없다고 일종의 모라토리움이 선언됐는데, 그걸 끝까지 붙들고 있는 나라가 일본, 한국이라고 평가받는 거에요. 그 대표적인 표지로 GDP 대비 자기 나라 시민들한테 쓰는 돈, 좋게 말하면 사회복지 비용과 관련한 지표죠. 그 지표가 제일 낮은 나라가 미국, 한국, 일본이에요. 이 세 나라가 시장 경제를 통해 돈은 굉장히 벌어 국부는 엄청나게 벌어들이지만, 이 파이가 국민에게 가지 않고 소수에게 쏠려 갑니다. 그러니까 인민의 삶의 질이 계속 추락하고 있는 거지요. 이번에 특히 ‘모든 형제들’에서 말하듯 코로나19가 적나라하게 그 속살을 다 보여 줍니다. ‘시장에 참여하지 마라’, ‘끼지 말라’는 언사들은 이미 세계적으로 철 지난 논리입니다.

가난과 공유사상, 그리고 사제의 고민

한경호: 신부님들이 강론 때 가난에 관해 이야기 안 합니다. 한국에 온 지 6년 됐는데, 한국 사회는 극단적으로 반으로 나뉘어 있어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저희는 사제에 속하잖아요. 강론 때 울림을 줘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죠. 성경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말은 울림을 줍니다. 그의 호통이기보다 호소였습니다.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우리는 어떻게 다가가야 하고 궁극적으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어려운 부분입니다. 강론 때 그 이야기를 하면 젊은이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박동호: 신자들의 생활과 관련해서, 가난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과 우리가 어떻게 동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건데, ‘모든 형제들’ 문서 자체가 사회회칙이잖아요. 그래서 답은 간단해요. 정치 잘하라! 이거에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회 회칙의 속성은 사회를 어떤 행위의 주체로 보는 거죠. 좋은 사회, 건전한 사회, 건강한 사회라는 표현을 쓰는데, 빈곤과 관련된 거라면 물질적인 자원을 증대하는 영역인 경제와 또 과학기술까지 더해서 점점 증대된 자원을 어떻게 정의롭게 분배할 것이냐의 문제, 곧 정치의 몫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사회회칙에서 경제를 말할 때 통상적으로 분배정의를 언급하고, 정치를 말할 때는 공동선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걸 자기실현을 위한 충만하고 용이한 조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곧, 정치, 경제, 문화적 조건이 모두 좋아야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완성에 더 잘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동네 촌장님이 알아서 했는데 근대 시민국가에 와서는 제도, 질서, 국가, 기관을 통해서 정돈되는 거죠. 그걸 공정하게 만들어 놓으면 인간 존엄과 공동선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거죠. 교회가 청년들에게 개인적 부분을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 회칙의 내용, 곧 정치나 경제 혹은 사회 질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한경호: 사실 사업을 하는 본당 신자 중에는 교황님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청년들과 처음부터 사회교리 이야기를 하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그래서 성경과 교황님 이야기로 접근을 합니다.

청년 이야기했으니,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이나 권고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이 빈도로 따지면 이주민, 난민이에요. 그 다음으로 노인, 청년이 있어요, 관점이 뭐냐면, 표현이 아주 재밌는데, 노인은 더 이상 쓸모없어서 내다 버리는 거고, 청년은 아직 쓸모없어서 내다 버린다는 거죠. 지난 200년 동안 산업화, 기계화하면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극단으로 줄여서 길게는 200년 짧게는 70년이 왔다는 거지요. 더는 미래에 청년들에게 줄 일자리가 없어진 거지요. 가장 약한 존재가 일종의 컷오프 된거죠.

박동호: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미받으소서’에서 미래 세대까지도 단절시켜 버렸다, 뿌리를 뽑아 버렸다는 표현을 그렇게 했어요. 역사나 문화 차원에서의 ‘뿌리뽑기’는 중의적인 표현인데, 아예 이 세상에 들어올 틈도 안 준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가장 약한 존재가 구약에선 고아, 과부, 이방인이라면, ‘모든 형제들’에서는 넘버 투를 꼽으라면 노인하고 청년이에요. 속수무책으로 미래세대들을 뿌리내릴 수 없도록 만들고 있어요.

오민환: 마지막으로 함세웅 신부님께서 마무리 말씀해 주시죠.

함세웅: 2013년 3월 13일에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민자 가정의 비유럽 출신으로 또 가난한 이의 상징인 아시시의 성인을 교황 이름으로 택했기에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바티칸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첫 인사를 할 때, 무릎을 꿇고 신자들에게 기도를 청했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그다음 날, 추기경단과의 미사에서도 군림하는 교황이 아닌 형제로서, 교회 공동체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봉사자로서의 자세를 확인하고 선언한 강론 등은 솔선수범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 강론, 대화 등 일거수일투족이 교회 공동체와 세상의 새로운 길잡이가 되었지요. 특히 2013년 7월 5일의 첫 회칙 ‘신앙의 빛’, 두 번째 회칙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세 번째 이 회칙 ‘모든 형제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길잡이이며 이정표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봉헌의 자세로 온 세상과 자연, 우주 만물을 사랑하며 환경을 되살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 정치, 경제, 사회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성찰하고 확신한 이 세 번째 회칙은 그리스도인의 현실적 책무를 새롭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실 공동체 사회 안에서 필연적으로 종교적이며 동시에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존재입니다.

성경의 구원사를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경제, 곧 구원 경륜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구원 정치, 구원 교육이기도 합니다. 사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종교는 인간공동체 실체의 한 면일 뿐입니다. 사람과 공동체는 그 누구나 언제나 정치적, 경제적, 교육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정치를 빼면 남는 게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가 바로 하느님 구원 실현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과정에서 교회 공동체의 미흡함 때문에 교회도 많은 잘못과 실수를 범했고, 그 과정에서 정교분리라는 기형적 논리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구분될 뿐,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한 실체의 양면일 뿐입니다. 이천여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과감하게 정치권력자들과 그들의 지배체제에 대해 말씀하시고 지적하셨기에 정치범으로 그리고 종교적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골고타 언덕 십자가 사형터가 바로 교회의 첫자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신학적 이해와 신념 그리고 믿음으로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일 미사 강론대 앞에서 사제들은 모름지기 이러한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재해석하고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호소를 되새기고 복음 말씀을 과감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불의한 정치인들, 경제인들, 종교인들을 꾸짖는 우리 시대의 예언자, 곧 ‘말씀의 몽치’(이사 11,4)가 되어야 합니다. 저 스스로 깊이 성찰하며 교황님의 모든 말씀과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며 함께 실천을 다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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