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이문열의 <삼국지> 마지막에 보면, 삼국 통일과정 전장(戰場)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삶의 의미를 묻는 게 나온다. 장수 하나가 이름을 드러내려면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수많은 병사들이 숨어있는 법. 그런데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스러져간 긴 세월의 전장에서 죽어간 뭇별 같은 주검의 값은 무엇일까 하는 스스로의 물음에 작가는, “천하통일이라는 대의(大義)에 나서서 목숨은 잃었지만 무위(無爲)보다는 낫지 않은가... ?” 하는 답을 내놓고 있다.

이득을 얻기 위한 대의명분

글쎄... 그럴까?
유비는 전한(前漢) 6대 황제인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유승은 '술을 즐기고 여색을 무척 탐한' 인물이었으며 아들을 120명이나 두었다고 한다. 그 아들 중 하나가 유비의 조상이었을 테니 사실 한(漢) 황실 종친으로 유비의 위치는 유일무이하지는 않다. 그런 탓인지 어린 시절 황족이었음에도 유비는 신발과 돗자리를 만들어 팔며 가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황실 종친이라는 점 때문에, 유비는 무너진 한(漢) 황실을 잇고자 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있어서 다른 제후들에 비해 유리했다. 그가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황실의 종친이라는 출신 성분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고 마지막 황제인 헌제 유협의 삼촌뻘이 된다는 점 때문에 세력이 강한 제후들도 유비를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유비가 천하통일을 이루려는 데는 당시대인으로서 분명한 명분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나 본분'이 라는 명분의 뜻에 맞게 황실의 종친인 유비는 한나라 황실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명분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 상반된 뜻을 품고 있다.

1.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나 본분.
2. 어떤 일을 꾀하는 데 내세우는 합당한 구실이나 이유.

역사 속 천하통일의 주역들이 심중에 1, 2번 중 어떤 (대의)명분을 품고 있었는지는 선명치 않다. 역사를 읽어가는 입장에서 보면 두 개의 욕망이 혼재되어 있어 그들의 분명한 의지를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들의 순결한 의지에 만만치 않은 현실이 덮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당시대에서 추구할 수 있는 이익의 극대치를 명분으로 삼은 경우가많았다. 이익을 추구하는 게 나쁘다고 볼 순 없지만 통치 권력자들이 그들만의 이득을 얻기 위해 대의명분을 덧입혀 천하통일을 이루거나 그 반대의 과정으로 불러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건 아닐까 싶어 코소보 사태를 지켜보며 발칸반도의 혼란스런 역사를 새겨보았다.

코소보 국기(파란 바탕에 별 6개 그림)를 들고 거리를 서성거리는 코소보인들

코소보 독립에 붙여

지난 2월 17일, 먼 나라 발칸반도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의 국회의사당에서 코소보 총리 "타치"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자치주에서 승격, 세계 193번째 독립국가로 탄생했다.

코소보가 위치한 발칸(balkan)반도는 ‘세계의 화약고’라는 옛 명칭에 이어 근 20 년 사이 새로운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 영어에 ‘balkanize(분열하다)’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는데 이는 발칸반도의 다민족 다종교 사회가 분열하며 내전을 겪는 걸 지켜보며 만들어졌다고 한다.

요시프 티토의 지도력 아래, 하나의 연방을 구성해온 유고슬라비아연방은 그의 사후, 원점으로 돌아가듯 나뉘어 여러 개의 공화국을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은 타민족을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라는 살육전으로 제거해나가는 것이어서 피(민족)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결성되던 시기에는 피가 물보다 흐렸던가? 그럴 리가 없다. 다만 그 시절에는 그 시절만의 사정이 있었을 터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이산가족이 생겨나는 혼란기가 있었던 것처럼 미처 민족을 챙기지 못할 만큼 정신없던 시기였을 것이다. 아니라면 '민족'이란 누군가의 음흉한 욕망을 투사하는 전시물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발칸반도 지역에 언어와 문화, 종교가 다른 종족이 섞여 살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동화와 분열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강성하던 기원전 3세기 무렵, 이 지역 대부분은 로마제국에 귀속되었다. 그래서 발칸인들에게 로마가톨릭이 뿌리내리게 된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동로마/서로마로 갈라지면서, 이곳은 동로마제국의 영향력 아래 살게 되어 동방정교회가 퍼져 나간다. 이어 서기 6세기 후반부터 슬라브족들이 따뜻한 남쪽(부동항)을 향해 내려와 살면서 그들은 남슬라브족 즉 세르비아인으로 불리며 발칸지역에 흩어져 살게 된다. 남슬라브 민족이 이 지역 인구분포의 가장 많은 퍼센트를 차지한다.

발칸반도의 끝없는 민족, 종교적 분열

14세기말 발칸반도는 격랑에 휩싸인다. 지금의 터어키 지역에 살던 오스만 투르크족이 발칸반도로 세력을 뻗쳐오면서 이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로 바뀌고 이후로 발칸반도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력과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이 부딪치는 최전방이 된다. 400년 동안 이어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며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근세로 오면, 오스만 투르크의 세력이 약해지며 발칸반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합스부르크 왕가)과 러시아 제국의 세력 쟁탈지역이 된다. 현재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어 있으나 자치주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외의 지역은 약간씩 다른 종교를 지닌 다른 민족을 품으며 소국(小國)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들 중, 남슬라브족의 세르비아가 가장 큰 국가를 이루고 있였다.

그런데 이 때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비밀리에 협상이 열려,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에 넘겨주는 대신, 보스프러스 해협을 러시아가 차지한다는 밀약이 체결된다. 미-일 간에 맺어진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흡사하다.

이를 알게 된 세르비아인들 사이에 민족감정이 일어나, 보스니아에 사는 세르비아인들과 세르비아內 세르비안들을 비롯한 발칸반도의 모든 세르비안들은 대(大)세르비아 민족국가를 염원하며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는 걸 거부한다.

그러나 1914년 6월 29일, 보스니아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드 부처가 보스니아의 군대를 사열하러 사라예보에 도착한다. 러시아 제국과의 밀약으로 이미 보스니아를 그들의 영토로 인정하는 행동이었다. 이에 세르비아의 열혈 청년 가브리엘로 프린치프는 황태자 부처를 저격한다. 이미 세력균형의 붕괴로 전운(戰雲)이 감돌던 유럽은 이 저격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를 침공한다. 1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대립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 정책인 3C(카리로, 캘커타, 케이프타운을 잇는 식민지 확보)정책과 독일의 3B(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을 연결하는 횡단정책)정책의 충돌이 1차 대전의 발발원인이다.

전쟁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하여 발칸 지역에는 1920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연합 왕국" 즉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세워진다.

티토의 민족 종교를 넘어선 통합 의지

티토(1892~1980)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쿰로베츠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이고 어머니는 슬로베니아인이었다. 그는 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 러시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알게 된다. 그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을 소련과 같은 형태의 사회공산주의 국가로 만드는 꿈을 꾼다. 그리고 2차 대전이 터지자, 티토는 '파르티잔 군대(Partisan)'-빨치산-를 조직해서 '사회공산주의 특유의 탈(脫)배타적인 사상'에 입각하여 민족적, 종교적 조건을 불문하고 그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방침을 취하여 세력을 규합해 나간다.

나치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고 세력을 밀어붙여 유고슬라비아 왕국까지 쳐들어온다. 이때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은 혁혁한 공을 세우며 세르비아인들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1941년 3월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크로아티아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받던 곳이라 로마가톨릭의 영향력을 받고 있었고 게르만 민족과 친밀한 슬라브 일족이라 나치독일에 협력하는 지역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곳에 히틀러의 비호아래 우스타샤(민병대의 성격) 조직이 만들어져 이들이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 캠페인을 벌여 약 35만 명에 이르는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들을 학살하였다.

한편 세르비아인들로 구성된 게릴라들은 우스타샤 정권의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10만 명 이상의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한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원한이 맺어진다. 1991년 크로아티아 내전(內戰)에서 세르비아측이 저지른 인종청소는 2차 대전 중 그들의 부모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살해당하는 걸 기억하는 어린이들이 성장하여 일으킨 학살이었다고 한다.

티토의 파르티잔이 나치에 승리하였을 때,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마치 연합국참전국과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되어 영국을 비롯한 서방측이나 심지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독자적 공산주의 국가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한다. 그러나 티토 사후에 여러 민족을 용광로 속에 넣고 하나로 묶었던 끈이 사라지자,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그동안 숨어있던 민족간 종교간 그리고 그들이 반목하며 지내온 긴 시간의 역사의 갈등이 터져 나왔다.

각각의 연방국들이 공화국으로 나뉘어 1920 년 이전의 소국(小國)으로 독립했다. 세르비아의 자치주로 남아있던 코소보마저 인구의 90%에 육박하는 알바니아인(이슬람교도)들이 1960년대부터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해오다, 지난 2월 17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유고연방은 완전해체되었다. 이 와중에 발칸지역은 네 번의 내전(內戰)-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에서 일어난-을 겪으며 반목의 세월을 보냈다.

천하통일(天下統―)이냐, 소국과민(小國寡民)이냐?

중국역사 최초의 통일대제국 진(秦)나라는 짧은 15년간의 통치로 끝났지만, 이 짧은 시기동안 진시황은 유가(儒家)에 관련된 학자들을 죽이고 서적을 불사르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렀다. 법가(法家) 사상을 채택하여 강력한 통치로 많은 이들을 떨게 했는데, 정작 이것보다 더 중대한 만행(?)은 이 시대 진시황제에 의해 형성된 천하통일이라는 개념에 있지 않을까 하는 데 있다.

B.C. 221년에 시황제가 최초로 중국의 헤게모니인 중원(中原)을 통일하고 단일지배체제를 수립하여 중국 전제왕정을 열어놓은 것은 중국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이후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천하통일의 개념이 단단히 새겨졌다. 처음으로 평천하(平天下)를 현실로 이루어낸 인물이었다.

그는 만리장성을 쌓아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냄으로써,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인의 정체성을 확보했으며 이후 중국인들은 통일중국을 지극히 정상(正常)이라 생각하고 분열된 중국을 비정상(非正常)으로 보게 되는 관념을 갖게 하였다. 이처럼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위대한 일을 해내었기에 스스로 ‘황제(皇帝)’라는 존호(尊號)를, 그것도 그가 최초의 인물이라 하여 ‘시황제(始皇帝)’라 붙였음은 한편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다.

도쿠카와 이에야스
일본; 천하통일만이 부처님의 뜻에 맞는 생명보호의 길이라

치밀한 역사인식은 아니지만 간략하나마 통합과 분열하는 역사의 장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일본의 근현대사에는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해소하는 세 번의 전쟁이 떠오른다.

처음의 전쟁은 1600년 일본이 분권국가로 나뉘어서 천하통일을 염원하며 일어선 세키가하라(혼슈 섬 기후현 세키가하라 지방) 전쟁이다. 이 전쟁은 1600년 9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쇼군으로 세우자는 동군(東軍)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주군으로 모시자는 일파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모여 이룬 서군(西軍)의 싸움이었다.

전(全) 일본의 다이묘(지방영주)들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쇼군을 세우기 위한 전장(戰場)이었다. 당시에 천황이 있었지만 명목뿐인 존재여서, 세끼가하라 전투는 천하를 통일하여 그 주도권을 틀어쥐기 위한 결전장이었다.

이들 동(東軍)과 서군(西軍)은 지방분권으로 나뉘어 싸움으로 지고새는 전국(戰國) 시대를 종식시키겠다는 염원을 대의명분으로 취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음으로 해서, 제후국들 간에 전쟁이 수시로 일어나 백성들의 생명이 늘 바람 앞에 등불 같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천하통일만이 부처님의 뜻에 맞는 생명보호의 길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생산자이며 담보자인 고승(高僧)들이 양족 진영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에 이 스님들은 물밑작업으로 전쟁 없이 천하통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이 뜻은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전쟁을 치러야 했다.

주군(主君)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던 다이묘들은 주군으로부터 아들 히데요리를 간절히 부탁받은 터였으므로, 천하를 히데요리에게 맡기며 그를 보필하며 천하를 통일해야 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주군을 모시다 배신자로 돌아서 천하를 훔치려는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절단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천하를 하룻강아지 같은 히데요리에게 맡긴다면, 호랑이 같은 다이묘들이 결코 승복하지 않을 것이고, 그로인해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의 고난은 끝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배신자의 누명을 쓰고라도 천하를 자신의 통치하로 이끌어야만 백성들의 귀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임진왜란 때, 도쿠카와 이에야쓰가 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의 역량은 짐작이 되며 그의 대의명분이 겉치레는 아닌듯하다.

결국, 이 전투는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진영, 동군(東軍)의 승리로 끝이 난다.
따라서 도쿠카와 막부가 동경(東京)을 중심으로 일본을 지배하는 300 여 년의 세월이 평화롭게 흘러간다.
이 전투에서 패한 서군(西軍)은 대다수 하급무사로 전락하여 서쪽지방의 변방으로 밀려나 300년 가까이 비주류문화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들 패군의 후손들이 한을 품고 와신상담하며 힘을 키워 일으킨 게, 1868년 메이지 유신이다. 에도막부(동경의 도쿠카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입헌군주제를 내걸고, 사스마, 조슈, 도사 세 지역의 하급무사들이 일본의 근대국가의 틀을 만들어낸 것이다.

중세적인 막부체제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들의 거주지인 관서지방에 대한 차별을 부숴버린 쿠데타였다. 이후는 이들이 정/재계를 주름잡아 간다.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이들이 물러나고 미군정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이 입각하며 어느 정도 동서차별이 사라졌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마지막 세 번째 전쟁으로 일본 내의 지방색을 거의 소멸시킨 셈이다.

제국주의적 종속성이 삶 속으로 배여든 결과물, 천하통일

천하통일은 어떻게 가능하고 한편 왜 다시 분할되는 운명을 겪어가는 것인지 그 역사의 추이가 인간의 본질 혹은 성숙과도 연결되며 흥미롭다. 모든 것을 하나의 일반적 유형으로 귀착시키는 사고는 분명 전근대적이다. 천하통일을 이루어야 만사가 안녕하고 완성되었다는 안도감은 발칸반도의 발카나이즈(balkanize)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조금 무너진다. 제국주의적 종속성이 삶 속으로 배여든 결과물이 천하통일에 대한 염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해본다. 이러한 염원의 배경을 알아채자마자, (서구)사람들의 생각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틀을 만들어 나간 것인지 모르겠다.

<삼국지>를 통해서 중국의 통일과 분열 과정 속에서 죽어간 많은 이름 없는 병사들의 주검을 보았다. 일본의 통일과정 동안에도 수없는 전쟁들이 있었다.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 알렉산더의 그리스, 로마제국, 그리고 미국... 광활한 영역에 걸쳐 있는 영토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은 영웅호걸의 등장으로만 볼 수 없는 인간사고의 왜곡된 이상향에의 도전이 아닌가 싶다. 천하통일 소국과민, 어느 것이 인간의 이상일까?

코소보, 소국과민으로 가는 진통의 땅

세르비아의 자치주 코소보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가 천하통일이라는 틀에서 소국과민의 틀로 바꾸는 진통으로 다가온다. 천하를 통일하여 얻고자 하는 건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자존(自存) 의 극치를 맛보려는 행위일 것이다. 약자로 살면서 삭혀야 되는 억울함을 겪다보면 자위를 넘어서 타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정치 현실을 떠나면, 천하가 가로막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천하통일 운운하는 건 자기 방식으로 재정비하려는 음험한 저의를 감춘 자들의 도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무리를 저지르며 이루어낸 천하통일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와해의 과정을 걷게 되는지 모른다.

역사책을 들여다보면 원죄(原罪)라는 개념이 이해가 된다. 한 시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맺고 풀어내는 관계의 왜곡과 미성숙이 쌓이고 쌓이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사건과 상황들... 그러다 터져 나오는 원한의 감정들... 그 죄업이 바로 원죄일 것이다. 사람은 역사의 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누구도 윈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까이 연좌법이 그러했고 한/일간 역사가 그런 감정을 품고 있다.
적벽대전에서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의 죽음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이를 번역한 이문열의 <삼국지>에서 소설의 가장 큰 요건은 한(漢) 황실의 재건이라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다. 그러나 중국의 정사(正史)에 한나라의 멸망으로 분열된 삼국(위.촉.오)시대는 진나라로 통일되었으니, 유비의 대의명분에 입각한 천하통일의 의미는 역사 안에서는 무의미로 종결되었다. 후한의 멸망 후, 한(漢)나라는 중국사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선지 천하통일을 꿈꾸는 패자들의 대의명분이 자꾸 ‘어떤 일을 꾀하는 데 내세우는 합당한 구실이나 이유’처럼 들린다. 글쎄, 유비의 대의명분은 고결했을 것이다. 상황을 벗어난 인간은 누구나 거개가 유리알처럼 투명할 테니. 대의명분에 인간의 욕망이 뒤섞이며 혼재되어 후세들이 그들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살피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떻든 실패한 대의명분이었다.

그럼 적벽대전에서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의 죽음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분열된 소국(小國)들을 하나로 연합하는 과정에서 죽어간 발칸인들, 다시 시간이 흘러 유고슬라비아연방국이 분열되어 다시 공화국으로 독립하며 치룬 내전(內戰)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인종청소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피바람이었는데... .

역사의 분열과 통합을 이루며 그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을 읽다보면 <전도서>의 저자가 토해내던 “헛되도다!” 하는 표현이 입안에 맴돈다. 그러나 너무 무책임한 언사가 아닐까 한다. 이 시공간에서 욕망을 실현하는 것과 욕망을 버리는 것. 천하통일과 소국과민... 눈 오는 날 외로운 사람에게 거는 한 통의 전화... 이 모든 것이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역사의 페이지를 메꾸어 나갈 것이다. 세르비아의 자치주에서 독립국가로 발돋움하는 코소보와 코소보 땅은 국가의 성지(聖地)라서 뺏길 수 없다는 세르비아의 격한 갈등에 신의 부드러운 손길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이규원 200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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