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대신 유족과 싸우는 하청
“재조사 어렵다”는 고용노동부

2019년 부산 경동건설 신축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다 떨어져 숨진 하청 노동자 정순규 씨(57, 미카엘)의 사고 원인 재조사가 어렵게 됐다. 또 하청업체와의 법적 공방도 다시 시작됐다.

7일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고, 재해 발생 이후 추락 높이를 변경해야 하는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 없으며, 현재 공시 종료 등의 이유로 재조사에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

이는 경찰과 부산지방고용노동청 등 기관별로 사고에 대한 조사결과가 달라 지난해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재조사가 촉구됐고, 이어 12월 30일 유족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 부산운동본부’도 재조사와 함께 사망사고 관련 자료 공개를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국정감사 당시 강현철 부산지방고용노동청장은 “사고 원인과 관련해 시간이 많이 지났고 현장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재조사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검토해 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순규 씨의 아들 정석채 씨(35, 비오)는 지난 12월 29일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이 마련한 유족과의 간담회 자리에서도 "예상했던 뻔한 답변만 돌아왔고, 재조사에 대한 의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고 김태규 씨 누나 김도현 씨(왼쪽), 고 정순규 씨 아들 정석채 씨. (사진 제공 = 정석채)
고 김태규 씨 누나 김도현 씨(왼쪽), 고 정순규 씨 아들 정석채 씨. (사진 제공 = 정석채)

가족 잃었지만 “기업은 보호받고, 유족의 싸움은 처참해”

이런 가운데 정순규 씨가 소속됐던 하청 업체 ‘제이엠건설’은 유족의 친인척과 지인을 상대로 법적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제이엠건설은 2019년 정순규 씨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보상금 합의 과정이 유족 관계자들의 강요와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면서, 2020년 부산지방검찰청에서 무혐의 처분이 난 사안을 부산고등검찰청에 항고했고, 이에 대해 부산고검이 6일 ‘재기수사’ 처분을 내린 것이다.

2019년 유족과 보상 절차를 합의하려고 장례식장을 찾았던 제이엠건설 대표와 이사는 정작 유족을 만나지 않은 채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유족의 지인들이 이들을 붙잡아 사고 경위와 책임 등을 묻는 과정에서 있었던 언쟁과 실랑이를 두고 감금, 폭행, 폭언, 협박으로 고소한 것이다.

재기수사는 지방검찰청이나 지청에서 불기소처분을 받은 고소, 고발인이 이에 불복해 고등검찰청에 항고했을 때 이를 인정해 고검 검사가 사건을 직접 재수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부산지검은 2020년 7월  당시 CCTV, 참고인 진술 등을 고려하면 “강제로 각서를 작성하였다고 인정하기는 다소 어렵고, 중간에 유족이 항의하는 듯한 장면이 몇 차례 있지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피해자들에게 항의하는 것을 두고 위협한다거나 협박을 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면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정석채 씨는 “리인아파트와 관련해 경동건설과 법적 다툼을 벌이는 이들에 따르면, 경동건설은 잠깐 이야기하자고 손목을 잡아도 특수협박, 폭행으로 고소한다”면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시간을 끄는 경동건설의 수법인 것 같다. 원청인 경동건설의 지시가 없다면 하청도 항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13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그는 “경동건설 변호인 의견서를 보면, 자신들은 유족과 보상절차를 합의하려 했으나 유족이 감금, 폭행, 협박해 못했다고 하는데, 정작 항고 이유에는 유족 때문에 강제로 합의했다고 하니 앞뒤가 맞지도 않는다”면서 “선고를 코앞에 두고 항고한 것은 유족을 괴롭히고 흠집을 내 형사재판에 영향을 주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KBS '시사직격' 11회 방영분. 정순규 씨 장례식장에서 하청 업체와 유족 관계자들이 사고 경위와 보상문제 등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KBS '시사직격'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KBS '시사직격' 11회 방영분. 정순규 씨 장례식장에서 하청 업체와 유족 관계자들이 사고 경위와 보상문제 등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KBS '시사직격'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한편 사고 직후부터 장례까지 당시 모든 상황은 <KBS> ‘시사직격’ 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2019년 12월 13일 방송된 바 있다.

그는 고용노동청의 답변 결과에 대해서는 “부산의 모든 수사, 정부기관이 경동건설을 보호하는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보공개를 요청하고, 재조사 및 재수사를 해 달라 항의하며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장례식장 CCTV, <KBS> ‘시사직격’이 찍은 영상자료 등 증거가 다 있는데도 재기수사 처분이 난 것을 보면 경동건설 뒤에 얼마나 수많은 권력이 있나라는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한편 2019년 건설현장 추락으로 동생을 잃은 김도현 씨(31)가 13일 정석채 씨와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앞에서 “제대로 된 처벌”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함께했다.

김도현 씨의 네 살 아래 동생 김태규 씨는 지난 2019년 4월 16일 경기도 수원의 한 공사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다 추락방지망이 설치되지 않은 승강기와 벽 사이 틈새로 떨어져 숨졌다.

김도현 씨는 이번 재기수사 처분에 대해 “유가족에 대한 끊임없는 능멸과 기만”이라면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슬퍼할 틈도 없이 법원, 검찰청 앞에서 수없이 시위를 하고, 조사권 하나 없는데도 증거를 직접 찾아 제출하며 싸워야 하는 과정이 처참하다”고 13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이어 그는 “원청은 빠져나가고 하청도 책임을 지기 위한 어떤 움직임도 안 보이는 상황에 너무 화가 난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우리나라 법이고, 그 법을 집행하는 재판부가 양형규정을 통해 처벌 수위를 낮추면서 또 한번 법을 무력화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대재해법이 제정됐지만 누더기 법안이라 징역 안 살고 벌금 내면 그만이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개탄스럽다”면서 “기업의 의견은 따라주면서도 유족의 목소리는 왜 들어 주지 않는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한편 이날 정순규 씨 산재사망에 대한 선고공판이 예정돼 있었으나 변론재개 속행으로 취소됐으며, 다음 공판은 3월 3일이다.  지난해 10월 결심 공판에서 검사는 경동건설 현장소장과 하청업체 현장소장에 각 징역 1년 6개월, 경동건설 안전관리자에 금고 1년, 경동건설과 하청업체에는 각각 벌금 1000만 원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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