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싸락눈이 겨울나무 사이로 내려오던 날, 혼자서 집 근처 대모산에 올랐다. 주변 지역이 점점 아파트로 변해버려 산은 흡사 볼모로 잡힌 꼴이었다. 긴 산줄기에 연결되어 지기(地氣)를 배태한 산들이 점점 도로로 아파트로 잘려나가며 산들은 올망졸망 산의 위용을 잃어가고 있다. 아무도 산에 오르지 않았는지 사람이 없어, 혼자서 약숫물을 마시며 싸락눈을 맞고 있자니 어느 해 지리산 정상에서 사방을 바라보던 산 첩첩 구름 층층했던 기억이 나 그 기억을 불러내 작은 야산에 덧입히며 잠시 행복했다.

천경자 화백의 수필에 보면, 성씨가 다른 자식들을 기르는 어머니의 소회가 자주 등장한다. 새 남편을 맞은 어느 날, 천 선생의 딸은 새 아빠에게 잘 보이고자 종이에 봉지담배를 말아 무릎을 꿇고 바친다. 새 아빠는 그걸 묵묵히 받아들어 피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 선생은 그 아이가 남편의 친딸이었다면 한 마디 칭찬도 없이 받아들어 피우기만 했을까, 하는 서운함을 피력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제도란 게 얼마나 공허한가

2008년 1월 1일부터 호적부가 폐지되고 새로운 가족관계 등록부가 신설됨에 따라 이혼한 자녀들을 데리고 재혼한다면 지금까지는 전(前) 남편의 성씨를 따라 재혼한 가정에서 아이들이 성씨(姓氏)가 달랐으나 이번 법률시행과 함께 새로운 남편의 성씨를 따를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제 제도적으로는 잘 봉합된 가정을 이룰 토대가 마련된 듯 보인다. 성숙하기 전, 아이들 세계에서 덜 상처받으며 성장하기 바라는 의미에서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캄프라치하는 느낌이 든다. 가장 훌륭한 헌법이라는 독일 바이마르 헌법이 실은 실행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구약시대 희년(喜年) 선포가 그 좋은 뜻을 가졌음에도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다니, 사람의 마음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제도란 게 얼마나 공허한가.

재혼이 많은 요즈음, 성(姓)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건 피할 수 없는 대세다. 이런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성형수술이나 화장을 하는 정도의 기능으로 보이는 제도개혁은 미봉책으로만 보인다.

한 가정은 한 성씨로 이루어진다는 고정관념을 변화시키지 못한 채, 제도를 고쳐 성씨 개명을 열어놓은 건, 오히려 고정관념을 고착화시키는 건 아닐까 한다. 부부는 맺어졌다 헤어질 수도 있지만, 친부모와의 인연은 그리 되기가 어렵지 않을까? 꼭 친부(親父)의 성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양부(養父)의 성씨로 바꾸는 게 좋아보이지도 않는다. 천륜을 (인간의) 제도가 흡수하는 데서 오는 한계를 잘 헤아려야 할 것 같다.

친부의 성씨를 도로 찾은 선배

지금 사십 후반인 선배언니는 어머니가 개가하셔서 새아버지 집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애초 친생부의 호적에도 오르지 않은 상태였는지 -예전엔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새아버지의 성씨를 받아 그 분의 친딸로 호적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언니는 초등학교 졸업 무렵, 그녀 스스로 성씨를 친부의 것으로 바꾸었다. 마을의 대서소를 찾아가 도움을 받으며 원래의 성씨를 회복했다. 그래서 그녀의 초등학교 졸업장에는 지난 6년 동안 불리던 성씨가 아닌 다른 성씨여서 친구들은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지만 그녀는 그녀 생애 유일한 졸업장에 친부의 성을 붙인 자신의 이름을 기재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복잡한 서류를 준비해서 원래의 성씨를 획득한 걸 보면, 그녀 안에 친부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던가 보다. 아니면 의붓아버지와의 삶이 그만큼 척박했던지. 그 언니는 지금도 자신의 아버지는 친부임을 분명히 한다.

지금도 친아빠가 친부임을 포기하지 않으면, 친부임을 그대로 둔 채 같이 살고 있는 새 아빠의 성씨로 바꾸거나, 친부임을 포기할 경우 입양절차를 통해서 새 아빠의 성을 물려받는다고 한다. 이혼한 전남편이 아이의 친부권을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어, 아이는 새아빠의 성씨만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점점 이혼한 부부도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서로 만나고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추세에, 성을 바꾸어 이전의 삶을 지워버리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새 아빠의 성으로 바꾸어 살면서 만나는 친아빠는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까? 생은 복잡다단한 사건과 정황을 안고 흘러간다. 좀 더 사려깊은 시선으로 이혼과 재혼으로 인한 어려움을 헤아리며, 피해자인 아이들에게 친부와 양부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줄여가는 길을 찾아야 될 것 같다.

이미 바뀐 제도에 대해 뭐라 하는 건 상식이 아닐지 모른다. 많은 모색 끝에 개정되었을 것이기에 시행하면서 보완해 나가야될 것이다. 다만 제도개혁보다 편견을 바꿔나가는 게 더 근원적인 해결책이고 앞으로 한층 다양해져갈 가족관계에서 살아가는 내성을 키워가는 방법이라고 본다.


제도보다 먼저 편견을 없애야

(가족)제도는 이미 제도가 생김으로써 그 제도권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한 사회의 제도 및 상식에서 이탈된 사람들은 말 못할 사정을 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들의 성장과정에 이러한 요인들은 그들의 삶을 왜곡시키거나 무리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개인이든 무리의 역사든 있는 그대로의 여건을 수용하여 내적 확장력을 가져야 건강하게 지속된다. 조선시대 적자(嫡子) 중심의 가치체계는 많은 서자(庶子)들의 고통을 안고 흘러가다, 관행을 벗어나지 못한 채 폐쇄적인 틀을 더욱 축소시켜 세도정치(勢道政治)라는 몇몇 가문의 권력집중으로 막을 내린다.

먼 나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도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솔로몬의 통치 후, 유대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뉜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망하고 지배국의 혼혈정책에 따라 유대인의 순수혈통은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지켜본 남유다왕국은 북이스라엘을 배척, 따돌림으로 대응하여 혼혈의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그런데...우리가 읽어가는 신약의 복음서에는 유난히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선호(?)가 두드러진다. 루카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길에서 강도당한 이를 돕는다. 사제와 레위인도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만이 그를 거두고 돌본다. 그리고 예수님이 문둥병자 10명을 치유했으나 병이 나은 뒤, 엎드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고마움을 표시한 것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다.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다 어디에 갔느냐”고 묻는다.

어느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꿔 살아봤지만 탐탁치 않아 현재는 다른 정부(情夫)와 살고 있지만 마을 안에서 소문이 안 좋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우물가에 오지 않는 한낮의 시간을 이용하여 물을 길러 온다. 그녀는 홀로 소외되어 물을 길어 올리다 예수님을 만난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있어 ‘남편’이란 가슴이 뜨끔한 단어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자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신다. 감추고 싶은, 그녀를 구렁으로 몰아넣은 과오의 흔적인 ‘남편’을 데려오라니...

혼혈의 땅 사마리아 지역에서 만나는 행실이 좋지 않은(?) 사마리아 여인은 이중으로 의미가 겹치며, 예수님이 이러한 소외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여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지만 그녀의 아픔과 소망을 함께 해주는 진정한 남편은 없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복된 사람들

재혼, 혼인 외의 관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이룬 한 가정 안에서 그들 중의 일부는 자신들이 처한 협소한 입지에서 호흡하느라 다른 이들보다 더 세상을 꿰뚫어보는 명민함을 습득하게 된 경우가 많다. 첩의 자식들이 더 똑똑하다는 옛말은 그런 상황을 뭉뚱그린 말일 것이다. 그들은 가족관계에서부터 살얼음이 낀 듯한 거부감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되새김질하며 세상에의 적응력을 키워내느라 고통을 겪는다. 고뇌를 뜻하는 우(憂)는 그 앞에 사람 인(人)을 붙이면 우수하다 뛰어나다는 뜻을 지닌 우(優)자로 상승한다. 사마리아인들의 따뜻한 마음은 그들이 겪어온 소외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복잡한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 예수님은 너의 성(姓)이 무엇이냐고 물어오실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던 그 마음으로.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셨지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성령을 여인에게 부어주시어 구원하신 것처럼,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의 차별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체성을 덧입혀주실 것이다. 그분도 영성(靈性)에 둔감한 사람들로부터 사생아로 불리며 고통을 겪지 않았을까?

여고시절 친구들 사이에, 고등학교 후배인 방송인 허수경이 미스 맘으로 예쁜 아기를 얻었다는 뉴스를 소재로 설왕설래했다. 아이가 커가는 과정에 여러 사회적인 어려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던 일이었고 좋아하고 있다니 축하할 일이다. 8년 전, 혼자 아이를 낳아 어머니인 자신의 성을 주어 키우는 미스 맘이 주변에 있어, 허수경이 아이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갈 걸 믿으며 그녀를 멀리서나마 응원한다. 그녀들과 아이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호적이 정리되어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단단한 결속체로 살아간다.

영화 <화기소림>은 내용은 좀 엉성했지만 몇몇 장면은 영화만의 판타지를 제공했다. 등려군이 부른 주제곡도 좋았고. 오늘처럼 겨울나무 사이로 눈이 내리는 소림사 지붕 위로 오천련과 주윤발은 꿈속처럼 날아간다. 시골처녀의 상큼하고 당당한 매력을 지닌 오천련은 그녀가 터득한 초능력으로 주윤발과 자신을 하늘로 띄워 눈 속을 가벼이 날아가는데 내게 있어 영화의 매력은 바로 그런 것, 현실을 박차고 일어서는 힘이다. 요즘은 성당에도 나가지 않아 신자라 말하기도 뭐하지만, 예수님을 엔진으로 장착하고 복잡한 가정사의 애증을 초능력 에너지로 바꾸어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다. 싸륵싸륵 싸락눈이 내리는 날엔 더욱 더.

 

/이규원 2008-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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