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유년 시절, 동네 어른들은 도시에 볼 일이 생겨 외출을 하려면 생활형편이 여유가 있어 겨울 코트를 지닌 사람들을 찾아가 빌려 입고 도시 나들이를 했다. 그런 일들이 당연하게 통하던 시절이라 빌리는 사람이나 빌려주는 사람이나 농기계를 빌리듯 자연스러웠다. 더러 선을 보러 읍내에 나가는 사람도 옷을 빌려입곤 했다.

요즘보다 더 기온이 낮은데다 옷이 부실했던 옛날에 사람들에게 추위는 막강한 자연의 위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들의 옷에 대한 갈망은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한 겨울에 돌아가신 친구 분의 장례식을 다녀온 아버지는 집에서 입고 나가신 옷 위에 하얀 무명 두루마기를 덧입고 오셨다. 이유는 이러했다. 평소 겨울 외투를 하나 맞춰 입는 게 소원이던 故人이 그 원을 풀어보지 못한 채 돌아가신 게 회한이 되어, 상주들이 장지까지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하얀 두루마기식 외투를 입혀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지까지 걸어가며 모든 이들이, "호투! 호투!" 하며 고인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호투는 외투(코트)의 충청도식 사투리다.

고골리의 소설 <외투>는 짜르 통치하의 제정 러시아 관료사회의 고지식하고 엄격한 등급간 상하질서 제도와 냉랭한 시베리아 기류를 감지하며 읽어야 제맛이 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에 대해 "러시아의 모든 사실주의 작가는 고골리의 외투자락에서 나왔다"고 평했다. 이문열씨도 <외투>는 "러시아 문학을 덮어주는 외투"라고 하였으니 짧은 단편이지만 러시아의 통치질서에 대한 회의와 러시아 민중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알알이 잘 어우러진 작품임에 틀림없다.

막 새로 맞춰 입고 출근한 외투를 노상에서 강탈당한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옷을 되찾기 위해 파출소장을 거쳐 경찰서장을 찾아가나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외려 어디 좋지 않은 장소에서 밤을 지낸 냄새를 맡으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만년 9급 하급관리 아까끼예비치는 새 외투를 맞추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뤘다. 그의 연봉은 400루블이었고 그 돈으로 아내를 얻어 살기가 빠듯하여 혼자 살아가는 운명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렵게 새로 장만한 외투를 잃어버린 것이다.

경찰서장을 압박하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 아까끼예비치는 어느 고위직 관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만년 9급 하급관리의 외투강탈사건은 고위직 관리의 비위를 상하게 할 뿐이었다. 고급관리의 위상을 고려하여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서 민원을 접수하지 않은 괘씸죄에다 고급관리에게는 하등 중요할 것 없는 외투강탈사건이라니 자존심을 구기는 민원이었다. 그 고급관리는 외투를 강탈당한 사나이에게 매서운 질타를 퍼부었다.
고급관리로부터 마음을 흠씬 두들겨 맞은 이 하급관리는 외투도 없이 맨몸으로 뻬쩨르부르그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와 앓아 눕는다. 열병으로 그가 죽은 후, 어두운 거리 모퉁이에는 외투를 빼앗아 가는 유령이 출몰한다. 회한을 안고 죽어간 사람에 대한 공포가 유령이라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불러온 것이다. 그래서 털을 댄 괜찮은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귀가길을 서둘렀다는 걸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러시아 정치史를 가르치던 어느 교수님은 유난히 해당 시대의 소설을 읽기를 강조하셨다. 돌이켜 보면 그 시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역사를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을테니 마땅하신 충고였다. 그즈음 읽었던 소설인데, 다시 꺼내 읽어보니 거리의 모든 겨울외투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개신교회에 몸담고 있는 친구가 천주교의 신앙생활이 자신에게 더 맞는다며 옮겨오고 싶다는 의사를 보이다, 교황님, 주교님들의 의상이 너무 화려하여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을 훼손하는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장엄한 미사형식과 고위성직자의 화려한 의상은 진정한 신앙을 갈망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기도 하나보다.

이러한 양식은 무슨 필요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인간적인 결정과 필요가 스며들었으리라는 짐작은 간다.

옷은 그 사람의 성격, 지향, 직위를 나타내는 형식이 될 것이다. 내용이고저 하는 것이 형식이기에 그 형식을 쉽게 파기하자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실재-하느님-를 머리 속에 그리며 걸어가는 여정이 지상의 교회일 터이고, 교회의 의전양식은 보이지 않는 그 분을 형상화해보는 것일텐데, 많은 이들의 상상과 현실의 교회양식이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지... 나만의 생각일까?

더러 수녀님들이 단체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그 의상에서 비둘기들이 떼지어 소곤거리는 것 같다.
의상의 색채감이 그렇고 여학생들의 무리처럼 아기자기한 게 그러하다. 이제는 여학생 교복도 다양하게 그들의 마음을 담으려 애쓴 것들이 많다.
수녀님들의 수도복도 무채색 일색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옷으로 바뀌어 가면 안될까? 어느 독일 수녀님과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은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셨는데 그 모습이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성직자의 의상이 지상에서의 죽음을 상징한다지만 지상적 죽음도 중요하지만 천상적 삶이 더 신앙의 핵심에 가까울텐데 그런 의미를 담는 배려도 있었으면 한다.
고위 성직자의 화려한 장식의 옷과 수녀님들의 수도복은 너무 대조적이다. 좀더 사람의 평범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의상으로는 성직자 분들의 지향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신앙에 맛을 들이며 수녀원에 들어가는 걸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20대 중반 무렵이었다. 그 때 내 발목을 잡고 머뭇거리게 만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수녀님들의 수도복이었다. 흰색에서 회색 검정색에 감청색으로 제한되어진 수도복은 생기 넘치던 20대의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여학생 시절의 교복이야 졸업과 동시에 벗으므로 홀가분함과 더불어 추억으로 아련해지지만 일생을 무채색 옷만 입어야 하는 수녀원 생활은 다른 무엇보다 희생으로 다가왔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 화려한 의상을 선호하지 않음에도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옷을, 규율에 정해진 대로 일생 동안 입어야 한다는 게 버거웠다. 멋진 남자와의 데이트보다 여자들은 백화점을 돌며 쇼핑하는 걸 더 원한다고 한다. 수녀님들이 그러한 여자의 본성을 뛰어 넘으며 헌신하는 신앙을 모욕하는 게 아닌지 조심스럽다.

17,8세기의 고전영화들은 왕을 비롯한 고위직 관료들이 한결같이 가발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음악가 헨델의 가발은 조선시대 사극에서 보는 중전마마의 가채를 연상시킨다.
빅토리아 여왕의 권위적인 의상을 거쳐, 이제 영국 여왕의 패션은 샤넬라인의 투피스와 원피스를 즐겨 입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은 점점 더 계율과 권위로 이끌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지난 세기까지의 리더쉽이 바로 계율과 권위로 가능했다고 보인다. 누구나 시작할 때야 계율과 권위가 일정 부분 도움을 주지만, 결국 그 범주를 넘어서야 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일 것이다. 더구나 모든 부자유한 것을 넘어 진정한 자유를 지향하는 종교야 더욱 무애의 경지를 사모할 것이다.

고흐의 그림 <슬픔>은 크리스틴이라는 창녀를 모델로 그렸다고 한다.
많은 화가들이 젊은 여자들의 에로틱한 누드를 주로 그린 데 반해, 고흐의 그림은 사실주의에 따라
그려진 독특한 누드화다. 축 처진 가슴과 임신중임을 드러내는 배, 그리고 머리카락의 생기없음은 모델이 몸과 마음 모두 영양결핍상태임을 보여준다. 고흐는 이 그림 <슬픔>을 자신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들어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외투를 잃어버린 아까끼예비치의 마음을 그리면 고흐의 <슬픔>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마릴린 먼로 누드의 부드럽고 화려한 모습도 떠오른다. 잠잘 때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샤넬향수 넘버 5를 조금 뿌리고 잤다는 그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었다는 그녀는 죽기 전, 한밤중 누군가와 긴 통화를 했었다고 한다. 긴 통화로도 화려한 향수로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수면제로 채우려들었던 건 아닐까... .

시베리아 북풍을 막아줄 외투를 잃어버리고 끝내 죽음에 이른 <외투>의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삶이 보여주는 것과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옷의 2차적인 기능이랄 수 있는 사회적인 제약과 권위를 벗어던지고 혹은 사회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홀로 선 마릴린 먼로의 생애와 고흐의 <슬픔>은 우리에게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 처한 실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 옷의 2차적인 기능이랄 수 있는 사회적 권위와 제약의 역기능은 조금씩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한다. 법관의 검은 까운이나 성직자의 의상은 자칫 그들 자신은 물론 보는 이들에게 덧입혀진 허위의식을 강요한다. 그 순기능을 외면하지는 못하지만, 주어진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지점에서 우러나오는 유대감이 더 따뜻하며 진정성이 내재된 위로가 될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스테디 셀러 <사랑의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은 일생을 혼자 사시는 만년총각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으레히 하얀 면바지를 입으셨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하얀바지를 입으면 곧 봄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황량한 누드의 겨울은 아름답다. 봄이 오는 길, 자연의 옷입음과 벗음은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우리들 생애의 반은 겉치레 허영의 옷을 입고 사는 것만 같다. 아롱이 다롱이, 문제 많은 아이들을 사랑의 지혜로 이끌어주시던 소설 속 선생님이 입으셨던 하얀 바지가 참으로 멋있었다. 그 만큼만 멋을 내며 살고 싶다. 아직도 겨울 외투-기본적인 삶의 도구-가 없거나 강탈당한 사람들이 많다. 지나간 시절만의, 소설 속의 꾸며진 이야기만이 아닐 것이다.

 

 

/이규원 200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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