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최우혁]

입시유감

한겨울의 매서운 칼 바람과 함께 입시철이 지났다. 이제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는 2월의 축제가 꽃샘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펼쳐질 차례이다. 초 중 고등학교의 입학과 졸업의 기쁨은 코끝이 찡하게 매운 꽃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설레임의 사건이고, 아이들은 차례로 통과하는 인생의 이러한 마디들을 지나며 어른이 되어간다. 그런데 대학의 문을 들어가고 나오는 것에 관해서는, 기쁘다! 하고 넘어가기에는 다시 생각할 것들과 짚고 넘어갈 것들이 여럿이라 발목을 잡는다.

대학입학이란 관문을 통과한 새내기들은 중고등 학교 6년, 혹은 재수 삼수까지 더해 입시전쟁을 통과한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반면, 대학생의 부모가 된 많은 이들은 합격의 기쁨과 함께 버거운 등록금의 무게를 함께 겪어야 하는 삶의 희비극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오는 젊은이들은 유난히 좁아졌다는 취업의 문을 통과했는가에 따라 또다른 희비극의 장면들을 연출하는 졸업식을 맞게 될 것이다. 셀 수 없는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며 연출되는 우리네 대학가 2월의 진풍경이다.

이달의 축제를 기쁨 또는 희극으로 맞이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그럼에도 이 축제의 계절에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거나, 취직이 되지 않아서 졸업과 함께 재수생이 되었거나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산업예비군으로 편입되는 이들을 생각하면 매서운 겨울바람에 덜컹 열려버린 문 앞에 선 듯이 마음이 시려온다. 그리고 그런 자식들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엄마들의 애타는 마음이 또한 남의 일 같지 않게 전해져 온다.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졸업과 함께 직장 없이 시작된 사회로의 첫발, 내가 겪어낸 그 혹독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대물림을 하며 악화되어온 교육제도와 실업의 악순환은 이제 명예퇴직이라는 조기정년제와 함께 고통스러운 인생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삼위일체의 축이 되었다. 그리고 이 수레바퀴 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돈' 뿐이고 가난은 창피한 무엇을 넘어 죄가 되었다. 새삼스레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계절에 자식농사에 실패해서(?) 죄인이 된 엄마들, 그 '엄마'라는 이율배반의 날선 칼 위를 걷고 있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아울러 그 엄마들의 욕심이 아이들과 이 나라의 교육을 망친다는 오래된 음모론의 뿌리 한 자락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 

모성유감

 

 

 

성서에서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처음 성전에 데리고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예언을 듣는다. 그 아이는 실패할 운명을 타고 태어났으며 그런 아들을 지켜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은 영혼이 뚫어지는 고통을 맛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와 그 엄마가 기대했던 축복은 늙은 예언자의 한마디에 여지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마리아는 성전 안의 여 예언자 한나에게 축복의 다른 예언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서는 한나의 예언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자세히 전해주지 않는다. 마치 점을 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찾아 다니거나 액땜을 하기 위해서 비방을 쓰는 것이 성전에 아이를 바치러 갔던 마리아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패할 것이라고 예정된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한 아이가 경쟁의 대열에 참여할 수 없을 때, 한 아이가 경쟁에 참여하는 순간 이미 꼴찌가 예정되어 있을 때, 또 한 아이가 경쟁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들은 "내 아이 만큼은…"이라는 신뢰 혹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 아이의 그 예정된 실패를 비껴가기 위해 무엇인가 하기 시작한다. 태어날 때 사고를 당해 지체아가 된 아이를 위해 이민을 떠난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의 무한 경쟁사회에서 아이가 제대로 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도 없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멀쩡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이민을 가고, 기러기 아빠들이 생겨나고, 그래서 가정파탄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엄마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아이를 위해? 인간으로 지켜야 할 기본을 넘어서는 일까지 자청해 하기도 한다. 지난해 상연된 <마더>란 영화는 자식에 대한 엄마의 맹목적 보호와 극단의 선택까지도 '모성'이란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엄마들과 그 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영화였고, 이해한다면 외면하고 싶은 영화였다. 결국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망치는 것도 '엄마'라는 존재의 역할인 것이 새삼 확인되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한계 없이 나서는 엄마들은 오늘날 이 땅에서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엄마들의 맡아야 하는 악역을 열연하고,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아이가 책임져야 할 몫까지도 처리해주는 엄마들 덕에 아이들은 편히 자란다: 온실 안의 화초가 되는 정도를 넘어서서 엄마의 '작품'이 되어간다. 아직도 태교를 당하는 뱃속의 아이들처럼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엄마의 손안에서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엄마'란 이름으로 사는 여성들은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기차처럼 전 속력을 내며 무한경쟁의 궤도를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달리는 엄마의 손을 잡고 초고속의 경쟁에 휘말려 있다. 많은 엄마들은 좀더 일찍 달리지 못한 것을, 좀더 확실하게 내 아이를 만들지 못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질주한다. 아이의 성장과 학력은 엄마의 경쟁력을 상징하고, 좀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엄마들은 공을 들인다. 똑똑한 아이, 높은 스펙을 쌓은 만능의 아이를 만들어서 확실한 작품성을 인정받으려는 엄마들의 노력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정확한 시간 계산, 투자와 수익을 따지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아이들은 키워진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전환한 전업엄마들은 마치 배당 받은 칩을 들고 투기를 하듯이 교육에 돌입한다. 잘나가는 엄마의 작품인 아이는 정글 같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학력과 재산을 차지할 수 있는 궤도에 진입하게 되고 이것은 곧 엄마의 성공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살기 힘들다고 아이를 버려두고 떠나는 엄마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해마다 그 해의 대학입시에 참여하는 엄마들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지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입시'를 분석하고 합격률을 계산하고 배팅을 한다. 드디어 공들여온 작품의 질을 평가 받는 것이다. 참으로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인 입시과정은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이루어지는 국가적 게임이다. 하지만 대학사회의 자율성과 공정성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 국가는 최소의 개입과 책임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늘 이야기하는 교육개혁이란 결국 게임을 즐기거나 게임에 휘말린 엄마들의 즐거움을 건드리지 않는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국가는 엄마들이 치뤄낸 개인적 희생과 손실을 보상할 의도가 없으며, 교육판에 투자하는 엄마들은 개인적 능력에 따라 방해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과 아이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무한경쟁을 즐기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시민사회의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일등의 자리에 올라서야, 성공해야 샴페인을 터드릴 수 있는 현실은 역설적으로 누구나 성공할 수 없다는 게임의 법칙을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엄마들은 실패하도록 예정되어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엄마들은 늘 불안하다. 더구나 빠져나올 수 없는 이 게임은 '생존'이라는 판돈을 걸고 있기에 치열하다 못해서 처절하다.

성공유감

▲ 서강대 로욜라 동산에 있는 성모자상
이상적인 교육은 개인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가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키워서 자신의 고유함을 꽃피운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사회적으로는 그 사회 혹은 국가의 가치관을 이어갈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한 사회의 힘과 꿈을 담아내는 과정이고 그 사회의 구조와 성격, 건강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뇌에 해당하는 예민한 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을 해야만 살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고, 성공한 소수만이 살아남는 구조를 익히 알고 있기에 성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성공'한 사람들 역시 계속되는 추락의 공포에 떨고 있다. 너무 높이 올라간 탓일까? 교육의 경쟁에서 성공하고, 대기업의 취직에 성공한 사십대들 역시 언제 닥칠지 모르는 명예퇴직의 불안감에 떨고 있다.

만약 성공하지 않아도 사는 것에 문제가 없다면, 아니 '성공'이란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공을 향한 교육 역시 사라지게 될까? 내 아이가 일등을 하고 일류대학을 들어가도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남의 눈치 안보고 생긴 그대로 살아도 된다면, 내 주머니가 헐렁해도 생존을 위협받는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보장된다면, '성공'을 향한 달음질은 사라질까? '교육'이란 이름아래 돌아가는 이 거대하고 합법적인 도박판은 깨어질 수 있을까?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아이의 성공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엄마들은 이 중독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춤바람이 나거나 도박판에 끼었다가 단속에 걸린 엄마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똑똑하게 재산증식 잘하고 사교육의 판을 꿰고 아이를 일류로 키워내는 엄마를 손가락질 하는 시대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오지 않았다.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고 있는 이 나라의 '교육'판에서 실패한 엄마들만이 판에서 밀린 아픔을 곱씹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패한 작품이 된 아이는 엄마의 처분만을 바라며 웅크리고 있거나 자신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할 것이다.

판에서 밀리고 마음이 꿰뚫리는 좌절에 내몰린 엄마들은 '나쁜 엄마' 일까, '무능한 엄마' 일까, 혹은 끼지 말아야 할 판에 멋모르고 뛰어든 '멍청한 엄마' 일까? 하지만 대학입시에 성공한 엄마들도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아이를 확실하게 성공한 작품으로 만들려면 아직도 취직과 결혼의 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나름의 세상 보는 눈을 키우기 시작한 아이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대신에 "엄마 때문에... !" 라고 사사건건 토를 달기 시작할 것이다.

출생유감

캐나다의 여가수 샤니아 트웨인과 요르단의 라니아 알 압둘라 왕비가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의기투합 했단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성공한 여성 샤니아와 팔레스타인 혈통의 요르단 왕비 라니아가 합의한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가난하게 태어났든, 부자 부모 밑에서 자라든 모든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룰이고, 기회의 균등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돈 걱정 없이, 창피한 마음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가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가, 우리 모두가 함께 돌보아야 한다."

돌보아야 하는 것이 태어난 아이들이 누릴 권리이며 교육의 본질이라면, 우리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우리 아이들이 겪는 문제는 무엇인가. 아이가 태어날 때 엄마들은 출산의 고통을 겪는다. 한 인간을 자신의 몸으로부터 내보내는 고통인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한 인격체로 제 자신의 세계에 첫발을 딛게 된다. 엄마가 탯줄을 끊어야 아이는 스스로 호흡할 수 있다. 그리고 교육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성장과 적응의 과정인 것이다.

'교육'판이란 자기개발과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경험할 수 있는 사회의 묘판과 같은 기능을 해야 하며, 묘판에서 제대로 자란 나무가 땅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급한 일은 아이들이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태어났지만, 아직도 심리적 탯줄이 끊어지지 않는 아이들은 언제 태어나서 정신적인 이유식을 하고 두발로 걷게 될까? 실패에 대한 엄마의 두려움은 아이를 놓지 못해서 결국은 심리적 탯줄을 달고 다니는 미숙아로 남아있게 한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생을 호흡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결국 궁극적 실패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쯤 이야기하면 엄마들이 이 미친 교육판에서 손을 떼게 될까. 품에 끼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 놓을까.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처럼 김을 뿜으며 서서히 멈춰 서게 될까. 이 지독한 중독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니 모든 엄마들을 후끈하게 달구어진 이 교육판에 밀어 넣은 국가라 불리는 조직의 실체와 의도를 분석해서 밝혀야 한다. 이 나라에서 교육은 무엇을 의미하고 왜 교육을 하는지? 아이들과 엄마들은 왜 교육이 게임이 되고 투기가 되어버린 이 난장판에 볼모로 붙들려있는지? 아이들이 교육의 묘판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짓밟힐 것을 불안해하는 엄마들, 무자식이 상팔자인 것을 뼈아프게 실감한 엄마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이 나라가 세계 최저 출산율의 국가가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최우혁/ 미리암,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원, 로마 떼레지아눔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고 마리아눔에서 마리아론을 공부하고 최근 귀국했다. 현재 서강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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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씨시의 주교좌 성당에 모셔진 고통의 성모님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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