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속썩이는 가족을 향한 미움을 달래기 위해, 옛날앨범을 뒤져, 그들의 아기 적 사진을 떼어내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천진한 모습을 보니 예쁘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아무튼 미움을 줄이는 특효약을 발견했다.

“Felix Kulpa"는 "행복한 겁벌"로 옮겨볼 수 있는데,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의미를 압축요약한 키워드이다.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의 나른한(?) 행복-안일한 현실-의 안주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로 가야할지, 그 곳에 무엇이 기다릴지도 모르는 미래의 불안 속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출발을 실낙원 설화는 말해주고 있다. 전통교회의 해석과는 많이 다른 해석이지만. 이 연인들이 따먹은 과일이 지혜나무 열매였고, 현실과 자기로부터의 떠남은 지혜와 쌍생아 관계이며 성장소설의 전형이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고대의 삼황오제가 신화와 역사의 경계선상에서 빚어진 사람들 의식의 산물인 것처럼, 성경의 에덴동산도 그러한 범주의 이야기가 아닐까...?)

같은 맥락으로 아브라함이 살던 우르 지방은 가나안보다 지질학적으로 더 비옥한 곡창지대였다. 그런데 하느님은 노구(老軀)의 아브라함을 그 곳에서 이끌어 내신다. 아브라함이 죄를 지어 그 곳을 떠난 건 아니었으니 아담과 이브도 꼭 죄를 지어 낙원을 벗어나게 된 것이라고 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떡시루를 안겨주는 게 좋은 것도 아니고.

"좁은 길로 가라"는 말씀은, 많은 이가 두려워하고 가지 않는 길을 기꺼이 가라는 충고였을까. 예수님이 일생을 두고 걸었고 격려했던 이 주제는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그리스도교가 인류문화에 끼친 공헌 중 첫자리를 차지해야하는 이유로 마땅할 것이다. 미지의 물질문명과 정신적 미개척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영혼의 힘은 이러한 방향제시에서 가능성이 증폭되었을 것이다. 구약의 실낙원 설화-Felix Kulpa-가 하나의 신화에서 내게 신앙이 되어준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풀어지며 의미가 덧입혀진 결과였다.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은 첫등반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중세의 마법과 징벌이 숨겨진 공포와 미혹의 장소였다. 그러나 1760년,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소쉬르는 샤모니의 산자락에 올라, 맞은 편에 우뚝 선 몽블랑의 장엄함에 감동하여 이제까지 아무도 오른 적 없는 신비스러운 산의 정체를 밝히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소쉬르는 “누구든지 이 산에 처음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며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 악마가 눈사태를 일으켜 사람들을 해친다고 믿었고 아무 장비도 없이 오를 수 없는 산이었기에, 현상금은 26년 동안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러다 차츰 빚에 쫓겨 알프스 산중에 숨어살던 사나이들이 대거 참여하며 활기를 띠었다.

마침내 1786년, 파카르와 발마 두 사람이 협동하여 몽블랑 등정에 성공한다. 파카르는 샤모니에 정착한 첫 번째 의사로서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여러 산들을 두루 오른 청년이고, 발마는 샤모니의 수정 채굴꾼이었다. 변변한 장비나 지도도 없고, 기상 관측도 불가능한 시대였다. 등산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에 이들은 무수한 장벽을 헤치고 정상 등정에 성공했지만 설맹과 동상으로 심한 고생을 했다.

그들이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당연히 ‘세상을 뒤흔들만한’ 빅뉴스였다.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온 그들을 둘러싸고, “악마를 만났는가?” “거기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지는 않던가?” 하는 질문을 퍼부었다. 발마와 파카르는 기진맥진한 채로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소. 저 위엔 눈과 얼음과 바위뿐이요.” “엄청나게 추워서 동상에 걸렸소.” “하지만 경치만은 정말 멋졌소!” 라고.

등반 지원대장 드 소쉬르에 실제 등반자인 파카르와 발마 세 사람은 알프스 산맥에 깃들인 유럽인들의 알프스에 대한 중세적 환상을 깨고 몽블랑의 실체를 인식시켜주었다. 파카르는 상금을 모두 발마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몽블랑 정상에 섰다는 기억만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금단의 나무에 달린 지혜의 열매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말해주는 신화로 읽혀진다. 고대의 타부의식이 성경 속에 삽입된 에피소드일 것이다.
그 타부의식을 조금씩 헤쳐가는 게 사람들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대의 한계, 근원적 결핍감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여건을 넘어서려는 도전을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공동체 구성원들 중 일부는 넘어서는 안될(?) 경계를 넘어선다. 타부와 광기의 한 부분이 상식으로 편입되기 위해선 몰입과 도약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고, 그 순간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간의 지평은 넓혀져 왔다. ...'하느님이 육화하시어 우리들 곁으로 다가온 것만큼 광기와 비현실이 있을까... .'

경계를 넘어서는 도전은 때로 하느님의 개입을 뚜렷이 보여준다.
어느 순간, 누구나 야곱이 그러했듯 야뽁강가에서(더러는 몽블랑 등정에서) 그들만의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아 씨름하게 된다. 자신과 피붙이들의 목숨, 장구한 시간을 견디며 이룩한 재산을 곧 형 에사오의 손에 맡겨야만 하는 위기상황에 맞서, 야곱은 어두운 강가에서 지난 날의 과오와 애태움들을 곱씹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걸 던지며, 그는 하느님과 겨룬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리모델링해본다. 밤새 하느님과 겨루다 그는 환도뼈를 다친 상처를 안고서야 새날을 맞을 수 있었다. 닭이 울고 새벽이 올 때, 야곱의 마음은 어제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제 밤만 해도 그를 지탱하며 생명이라고 여기던 것들이 물러가고 새로운 것들이 그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소멸되어진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사라진 것들이 차지하던 자리로 차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아가 깨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의 빈자리로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었을 것이다.
결국 나를 찾아가는 길은 나를 벗어나는 길과 맞닿아 있다. 사람들은 간절한 욕망이 이루어지며 드러내는 욕망의 앙상함에 놀라거나 이루지 못한 욕망이 스러지는 자리에서 느끼는 자신의 앙상함에 홀연히 제3의 길을 엿보게 된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떠나가는 그 모습이야말로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버지를 떠나는 탕아가 주는 울림을 던져준다. 복락원을 꿈꾸는 우리가 겪는 시련은 어쩌면 탕아가 돼지를 치며 주어먹는 쥐엄나무 열매의 맛과 같을 것이다. 또한 형 에사오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선 야뽁강가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 중 일부는 금기시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으며 더러는 환도뼈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었고, 어떤 이들은 균형감각을 잃고 미쳤다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이러한 상처를 안고서야 인간은 동물의 경계를 넘어 하느님의 아들로 신원이 바뀌는 것 아닌지... . 긍정적인 떠남이든 부정적인 가출이든 우리는 주어진 조건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도약이 가능했다.

지난 날 왕성한 의지로 사람들을 상처 입히며 미운 짓을 하던 나를 하느님은 어린아이려니 하며 보아주었을 것이다. 작은 한 사람을 사랑하며 품에 안기가 험산준령을 넘는 듯하다.
에덴동산을 벗어나고 몽블랑 정상에 서며, 야뽁강에서의 어둔 밤을 견디는 에너지는 더 높이 도약하려는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한다. 몸부림치며 성장통을 앓는 아이들을 보며, 봄흙에 내리는 봄비처럼, 생명을 키워내는 성령의 기운을 생각한다.

 

/이규원 2008-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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