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농촌공동체를 복원하는 양만규 달고개모시마을 추진위원장

농촌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이야기이다. 농촌 총각은 결혼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이미 옛날이야기이고 더 이상 농촌에는 젊은이들도 많지 않다. 그래서 농민은 자신이 낙오자이며 고립돼있다고 느끼기 쉽다. 하지만 농민이 못나고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시골에 남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인 생명적 가치를 지키는 이들이라며 농촌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월산리에 있는 ‘달고개 모시마을’의 양만규 추진위원장을 만나 그의 ‘마을 만들기’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가 마을 만들기 사업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공동체 복원과 도농교류를 통해 농촌에서 생활하는 농민으로서 자긍심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Q: 농촌에 사는 분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 농촌의 겨울은 한가하다지만 서천달고개모시마을의 마을만들기 사업 추진위원장인 양만규 씨는 여러 가지 마을 일로 바쁘다.
A: 옛날에는 어려워도 자식들이 돌봐주고 힘들어도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은 농촌의 자녀들도 도시로 나가 근로자로 사는데, 최하위 근로자들 아니에요? 힘들지요. 애들 키우고 지들 살기도 어려운데, 부모 모시기도 힘들어 같이 살수도 없잖아요. 그게 제일 힘들죠. 그래도 옛날에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모시는 걸 최상의 가치로 알고 살았는데. 

그런데 정부가 내놓는 농업 문제의 해결책은 규모화와 기계화예요. FTA를 극복하겠다는 것도 경쟁력을 키워가는 의미로 우리나라 농업을 본다고. 우리나라에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죠. 소농 가정농은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경쟁력을 가진 농업이 지속가능한 것인지 의문이에요. 그러한 규모화, 기계화 자체가 농촌 구조 자체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농촌 사람들이 땅이 없고 그래서 다 쫓겨나고 이런 게 근본적으로 문제 아닙니까?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제가 생각해낸 게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는 마을 만들기 사업입니다.

Q: 마을 만들기 사업은 어떤 내용으로 이뤄져 있나요?

A: 우리가 ‘농촌관광’ 해서 농촌에 관광객이 몇 명 왔냐. 관광비는 얼마를 타냈냐 하면서 그걸로 순위를 매겨 잘 되는 마을 뽑습니다. 공무원들의 자기 실적을 내세우기 위해서 그런 잣대를 쓸 수밖에 없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농촌 사람들 스스로가 농사일을 통해서 직업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자기만족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진정 풍요롭고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저는 옛날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공동체를 복원 하는 것이 우리가 잘 사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전체 콘셉트가 ‘사랑과 정이 넘치는 마을’이예요.

제가 구호를 ‘사랑합니다’라고 만들자고 해서 그 후로 인사도 ‘사랑합니다’라고 하고, 지금도 같이 모이면 모임 장소에서 (손으로 하트를 만들며)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잔치를 합니다. 매월 합동 생일잔치를 합니다. 다달이 그 달에 생일인 분들을 모시고 간단하게 생일 잔치를 하고 음식도 같이 돌리고 하루를 지내지요.

그런 분위기와 더불어서 정부에서 돈을 대주고 뭘 해주는 것 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재밌게 잘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마을을 만드는 성공의 발판이기도 하고 모든 사업의 발판이예요. 그것 자체가 우리 목표입니다. 딴 동네에서 보면 맨날 잔치만 하는 겁니다, 맨날. 우리 마을은 지금도 그렇고 맨날 잔치를 합니다. 

▲ 양만규 위원장은 "2009년에는 우리밀을 3만 6천 평 정도로 늘려서 파종을 했고, 금년 2월 27일 우리밀밭 밟기 축제를 크게 할 것"이라며 포부를 밝힌다.


Q: 그래도 ‘어메니티 마을’이나 ‘농촌전통테마마을’에 선정되기 위해서 특별히 시도한 것은 없었는지요?

A: 우리 마을이 행정구역상 월산리-달 월자에 뫼 산자인데, 행정구역 개편이 되기 전 이름이 월영이에요. 그걸 그대로 풀어서 '달고개'라는 마을 이름의 앞부분을 지었고. 마을의 특징이 뭔가 살펴봤는데, 특별하게 이 마을에 자원이 없어요. 산이 있고, 계곡이 있고, 냇물이 있고 그런 게 아니고. 특별하게 우리 집 손님들한테 보여줄만 한 그런 풍경이나 자원이 별도로 없어요. 그런데 한산 세모시 하면 세계적이잖아요. 세모시의 우아함이라든지 섬세함이라든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요.(중국 모시에 밀려서 그것도 사양길에 들었지만...) 그렇게 자원을 정해갔습니다만, 그것 보다는 도농교류 쪽에 무게를 두고 사업 목표를 세웠어요.

어려워지는 농촌, 농촌에 남아 농사짓는 남은 사람들의 허탈감, 아니면 뭐랄까 사람들이 뭔가 수탈감 같은 걸 느껴요, 농민들이. 그것을 도회지에 있는 소비자들이 함께 농사를 지으면, 당신들이 결코 못나고 못 배우고 뭔가 부족해서 농사짓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하느님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서 또는 생명 농업의 주역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당신들이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소비자들이 도와주고 인정해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가톨릭농민회가 ‘우리농 마을’ 만들면서 하고 있는 생각인데, 우리 마을에서도 한번 그걸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 밀밭밟기축제에서 밀밭을 밟는 체험을 하는 사람들 (사진출처 / 서천달고개모시마을 홈페이지)


Q: 도농교류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하신 마을 사업은 어떤 것이 있나요?

A: 처음에 시범으로 계획했던 것이 ‘텃밭 나누기’였어요. 이 마을이 보시다시피 하우스 한 동도 없어요. 논만 있는 쌀 단작 지대여. 쌀이 단작인데, 이건 농토 특성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쌀 단위면적당 쌀 수확량이 최고로 높은 데가 이 지역입니다. 그래서 친환경접근을 잘 못해요. 친환경 하면 농약도 비료도 안 써야 되고 그러면 수확량이 반절 이하로 떨어질 텐데, 쌀농사 밖에 안 져본 사람들이 그거 망하면 여기는 먹고 살 길도 없으니까 친환경농사를 못 하지요.

그래도 내가 먹는 텃밭에는 자기가 먹는 거니까 안전하게 지으려고 하잖아요. 텃밭에서 나는 먹거리를 도회지 사람들하고 한번 나눠보자 생각했어요. 대전교구 대사동 성당 신부님께 이런 계획을 말씀 드리고 신자들과 나누는 걸 한번 해봅시다 했지요. 우리 텃밭에서 나는 것을 직통버스 우등차에다 실어주면 한 시간 반이면 가거든요. 우리가 실명제로 누구꺼 누구꺼 적어서 보내주면 그쪽 버스 터미널에 성당 봉사자들이 나와서 그걸 갖다 나눠 먹습니다. 값은 거기서 알아서 정해 그냥 돈 보내주고, 우리 텃밭에서 나는 거니까 크게 돈에 대해 생각도 안 하고 해봤어요.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진짜 재밌겠다, 그런 거에요. 심사하는 사람들이 반해버렸어 거기에. 10명이 심사를 했는데, 그중에 ‘이장’의 임경수 박사라고 임 박사가 심사를 했더라고요. 그게 이장의 콘셉트하고 맞았는지 최우수 마을로 선정이 됐어요, 우리 마을이 그렇게 1억을 받았고, 그 다음 2006년도에 농촌테마마을로 선정돼서 2억을 받았지요.

우리는 그렇게 농산물을 통해서 생산하는 농민들과 소비자들이 만나는 형태의 마을을 만들려고 모든 사업계획을 그쪽으로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우리밀을 심었어요. 작년에 한 6천평 시범사업으로 파종을 해, ‘우리밀밭 밟기’ 축제를 2월 29일에 했고, 밀서리 축제도 했습니다. 밀을 심으면서 우리가 식량의 안전과 식량 자급률을 지킨다는 것을 우리 마을 사람들이 서로 공유했고, 그런 사업을 통해서 소비자와 만나고 도농교류를 해나가게 된 것이지요.

작년에는 먹거리를 통한 교류와 나눔으로서 친환경 배나무를 30주 정도 분양했어요. 30 가족이지요. 그 사람들이 봄에 배 봉지 씌울 때 와서 같이 일도 하고, 꾸준히 와서 가을에는 수확 체험을 같이 하고, 자기들이 책임 져서 가져가고 그래요. 작년부터 배추, 김장배추 나누기도 했습니다. 금년에도 한 2,500 포기 정도 심어서 했는데, 대전, 서울 지역과 함께 했습니다. 이런 걸 자꾸 넓혀나가고, 농사를 통해서 도시 소비자들과 만나는 그런 쪽의 사업을 계획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올해까지 한 것들을 발판으로 해서 그런 사업들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불특정 다수의 관광객이 아닌, 특별하게 마을을 생각하는 아주 우호적인 파트너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한테 자긍심을 심어주고 농사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삶에 대한 가치를 높여주는 그것이 소득과 같이 어울릴 때 농사꾼으로서 자긍심을 갖는 시너지 효과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에요.

▲ 마을 곳곳에 밀밭이 있다. 작년 12월에 찍은 사진으로 지금은 더욱 많이 커있을 것이다.


Q: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면서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A: 전국농민회나 가톨릭농민회처럼 바깥에서 조직 활동을 해봤던 사람들이 마을에서 이런 걸 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밖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뭔 조직을 하고 활동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쉬운 일이예요. 그런데 마을에서 활동 한다는 것은 삶을 나누는 것이지요. 감정을 나누고, 삶을 나눠야 하는데, 이것이 쉬운 것 같아도 몇 대를 같이 살아온 사람들의 섞여있는 감정이라는 건 아주 복잡하고 미묘하거든요. 그런데서 한 목표를 두고 뭔 일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예요. 어떤 사람들은 마을 운동을 하는 사람이 ‘삼 대가 잘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합니다.

공동체를 보면 전에 우리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사문화의 공동체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내가 보니까. 왜 그러냐면 지금같이 기계화가 되지 않은 옛날의 농사라는 것은 손으로 해야 하고 사람이 했거든요. 그래서 손이 모자르고 항상 힘들고 어렵고. 그러니까 품앗이를 하지 않으면, 서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고. 그것이 농사일이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품앗이 할래도 그렇고, 두 사람이 꼭 필요하니까 오늘 머리 터지게 싸웠어도 내일 또 일을 하려면 한 잔 먹고 또 풀어야지, 그냥 안 되거든요. 낫도 모자라면 빌려다 써야하고, 지게도 모자라면 빌려다 써야 하고, 심지어 돈도 모자라면 날마다 꿔다 썼어요.

요즘은 어때요? 오늘은 이 집 쓰고 내일은 저 집 쓰고 그래서 경운기 한 5대만 있으면 마을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집집이 다 있어요. 한 집에 두 대, 석 대도 있고, 차가 뭐 한 두 대씩 있지. 어떤 집은 포크레인이 두 대 있는 집도 있지. 모 내는 기계 이앙기 집집이 다 있지. 트랙터 콤바인 다 있지. 그러니까 남의 손을 안 빌리고도 얼마든지 자기가 일 다 할 수 있어. 돈 필요하면 농협에 가서 도장만 찍어주면 되지요. 오히려 돈 안 가져가서 야단이에요. 심심한거? 옛날엔 심심하니까 만나서 사랑방에도 가고 얘기하고, 우물가에 가야 얘기도 나누고 했지만, 지금은 문 다 걸어 잠그고 혼자 있어도 집안에 티비 있지, 비디오 있지, 아쉽고 필요한 게 없어. 그러니 사람이 필요없는 거요.

이런 상황이니 처음에는 마을 만들기 사업을 설명하는데 돈에만 관심을 보였어요. 군에서 1억 준다, 정부에서 농촌관광마을에 2억 준다 그러면 그게 관심이었습니다. 마을회의도 안 되는 마을이었으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합동생일잔치를 추석 전날에 도시에서 온 자녀들과 함께 지내자고 하니, 모처럼 고향에 온 자식들까지 마을 행사에 동원한다고 반대도 많이 했어요. 겨우겨우 설득해서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모두 동참했는데 4,5백 명 정도가 모였어요. 막상 그렇게 장을 열어놓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구요. 사람들이 “명절이라고 시골에 내려와봐야 잘하면 식구들끼리 밖에 나가서 노래방이라도 갔다 오고 그 다음날에는 언제 차가 덜 막히나 눈치 봐서 도망가기가 일이여”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우리 마을은 이제 분위기가 잘 잡혀서 추석 때 도시 자녀들과 함께 하는 합동생일잔치가 벌써 3번째에요. 하지만 모든 마을이 이렇게 잘 되지는 않지요. 힘든게 뭐냐면 그 아무렇지도 않던 마을도 돈이 들어가서 마을사업을 시작하면 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테마마을도 중지해 렸어요. 마을이 자꾸 시끄러워지니까 마을사업으로 안 하고 ‘교육농장’이라고 개인중심의 사업으로 돌려버렸어요. 그러면 우리 농민들도 개인 사업 따려고 발품 팔고 욕심 부리고 다니는데, 그런 건 잘 되거든. 그래서 저는 진흥청 담당자와 많이 싸웠습니다. 결국은 교육농장을 마을 사업으로 돌려서 돈을 넣었습니다. 나이가 젊은 70대 초반 정도의 사람들은 하루 품삯으로 3만원은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80대 넘은 분들은 그나마 어디 일도 못가고, 돈을 만져볼 기회도 없잖아요. 그런 사람들 교육농장에 참가시켜서 떡 빚을 때 떡이라도 빚어주고 돈 만원이라도 주면 나 같은 놈도 써먹고 돈 받았다고 그렇게 좋아해요. 

▲ 젊은 친구들이 뒤를 이어 계속 즐거운 마을을 만들어갔으면 한다는 양만규 위원장은 고민이 많다.


Q: 마을 주민들과 농촌진흥청 담당 공무원까지 설득하는데 위원장님의 역할이 굉장히 큰 것 같은데, 언제까지 계속하실 건가요?

A: 사실은 조금 힘들어요. 내가 작년에 뇌경상이 왔어요.다행히 신체적으로 병증은 안 나타났는데, 미리 발견해 약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을 규약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규약이 틀을 만들어주고, 그 규약에 의해서 조직들이 움직이면, 굳이 내가 아니래도 조직이 움직이는 거지요. 지금까지 마을들을 보면 묵시적인 합의에 의해서 마을이 그냥 저절로 돌아가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런데 이제는 명문화해서 서로 합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시베리아의 철새인 가창오리가 달고개 모시마을 입구에 있는 금강으로 찾아 든다. 그런데 그 수가 수십만 마리가 돼서 가관을 이룬다. 시베리아에서도 그렇게 많은 수가 모이지 않는데, 이곳에 그렇게 많이 모이는 이유를 아직 학자들도 밝히지 못했다고 한다. 양만규 위원장은 그 이유를 자신이 안다고 했다. “수십만 마리의 가창오리가 무리지어서 나는 걸 봐요. 그렇게 떼로 날아도 서로 부딪히지 않고 하나의 모습을 이룬답니다. 저는 그 새들이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서로 섬기는 모습으로 공동체를 이루라고 깨우쳐주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다고 우리 마을을 찾은 손님들에게 말한답니다.”
양만규 위원장은 마을의 공동체성이 회복되고 농사짓고 살아가는 자긍심만 생긴다면 굳이 정부가 사람들에게 농촌에 가라고 안 해도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 수십만 마리가 함께 하늘을 나는 가창오리 떼는 우리에게 공동체를 고민하게 만든다.

 

▲ 달고개 모시마을에 있는 월영공소. 2주일에 한 번 사제가 찾아와 미사를 집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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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격월간 잡지 <삶이 보이는 창>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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