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김보일]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Vs 협력의 진화

어짊은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논어>의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유학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 공자는 이에 "그것은 바로 용서의 '서(恕)'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답하였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타인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외양은 물론 성격마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인 심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시당할 때, 유쾌한 감정을 느낄 수가 없고, 자신의 존재가 쓸모없어졌다고 느낄 때 역시 유쾌한 감정을 느낄 수가 없겠죠. 바로 그런 보편적인 심성을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겠지요.

공자님의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씀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마음의 구조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조용한 교실에서 누군가 속닥거리는 소음이 내 귀에 거슬린다면 남들도 거슬릴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나에게 고통스러운 것이 남에게도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믿음, 바로 이런 믿음이 인간의 도덕성의 바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런 믿음 때문에 우리는 나에게 고통스러운 것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게 되지요.

물론 타인은 나와는 다른 차원의 감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고통스러운 것이 타인에게 고통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그가 인간이라면, 타인과 공유하는 어떤 공통적인 감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죠. 물론 생쥐와 인간은 전혀 다른 감각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상 속에서의 우리의 판단입니다. 종이 다르면 감각도 달라진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동물을 실험대상으로 합니다. 생쥐나 비둘기들이 가엾은 희생양이 되는 거죠. 동물실험은 인간의 이기주의가 분명합니다. 왜냐고요? 답은 간단합니다. 공자님의 어법을 빌어 말하자면 인간에게 싫은 것을 동물들에게 행했기 때문이겠죠.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고, 나아가 동물들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공자님께서 말씀하시는 ‘어짊’ 곧 ‘인(仁)’이겠죠.

양주(楊朱)는 과연 이기주의자인가

그런데 ‘어짊’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학자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양주(楊朱)라는 분입니다. 그는 “내 터럭 하나를 뽑아 온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죠. 나를 위한다는 위아(爲我)사상의 극단적인 표현인 셈이죠. 맹자는 양주를 남을 위해 희생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평가하였고, 그의 ‘위아(爲我)’ 사상은 후대사람들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되었죠.

그러나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에서 저자인 김시천은 양주를 적극적으로 변호합니다. 저자는 <열자>와 <여씨춘추>, <한비자> 등에 남아 있는 양주 사상을 종합해 그가 개인을 발견한 최초의 동양철학자라고 주장합니다. <여씨춘추>에선 양주의 위아 사상에 대해 “지금 나의 생명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그 귀천을 논하자면 지위가 천자가 되더라도 비할 바가 못 된다”라고 씌어 있다는 것이죠. 그렇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내 몸, 내 생명이 없으면 그만인 거겠죠. ‘세계의 행복’이라는 거창한 명제도 결국 한 개인의 행복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테죠. 나의 행복이 없으면 세계의 행복도 없다는 것이 양주의 주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주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동양의 이기주의는 실상 공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바람직한 인간상은 군자,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인간상은 소인이라는 이분법은 공자의 견해가 아니라는 것이죠. 공자는 천하를 다루는 대인의 자리에서 소인처럼 자기 이익만 탐하는 인간을 맹비난한 것이지,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한 소인들, 바꿔 말해 일반 서민들을 나무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대인의 길과 소인의 길은 다른 법”이며 “대인이 자신을 위하는 도를 ‘큰 이기주의’라 할 수 있다면, 소인이 자신을 위하는 도는 ‘작은 이기주의’라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혹시 나는 소인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속 시원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학원 선생, 의사, 정육점 주인, 주유소 사장님…모두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죠. 하지만 그들의 이기주의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겠죠. 어쩌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소인들의 이기주의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담스미스와 죄수의 딜레마, 이기심을 바라보는 두 개의 입장

소인들의 이기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사람은 고전경제학의 창시자인 아담스미스입니다. 그는 <국부론>에서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양조장 주인,빵집 주인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아담 스미스는 사람들이 공익의 증진을 목표로 삼을 때보다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할 수가 있다고 본거죠. “공익(共益)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인 결실도 얻게 된다.”라고 아담 스미스는 말합니다. 국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동기에 이끌려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 국가가 할 일은 뭐냐? 국가는 밤에 범죄예방을 위해 방범대원처럼 순찰이나 돌라고 하는 것이 아담 스미스의 ‘야경국가’이론이죠. 국민들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소극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의 이런 견해들을 살짝 비웃는 이론이 있습니다. 1950년대 창안된 게임 이론으로 이른바‘죄수의 딜레마’가 그것이죠.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명의 사건 용의자가 체포되어 서로 다른 취조실에서 격리되어 심문을 받습니다. 서로 간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죠. 이들에게 자백여부에 따라 다음의 선택이 가능합니다.

1.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즉시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이 10년을 복역해야 한다.
2. 둘 모두 서로를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둘 모두 5년을 복역한다.
3. 둘 모두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 6개월을 복역한다.

두 사람이 택할 수 있는 것은 '자백'과 '침묵'입니다. 둘 다 입을 다물 경우 범인들은 둘 다 가벼운 처벌만 받는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죠. 그러나 혹시라도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연다면 혼자서 무거운 형 10년을 감당해야 합니다. 결국 범인들은 자신이 입을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백을 선택하게 되죠. 자백은 그들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합리적인 결정이 최선의 결정은 아니죠. 왜냐하면 최선의 결정은 두 사람 모두 죄를 자백하지 않아서 6개월을 복역하는 것일 테니까요.

개인적으로는 합리적인 결론이 두 사람 모두에게는 더 나쁜 결론을 가져오는 것, 이것이 바로 딜레마입니다. (이런 딜레마를 만든 것은 서로의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감옥의 ‘벽’이겠지요. 인간의 협력은 바로 이 ‘벽’을 부수고 소통하는 데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두 사람 모두가 상대방을 배려하면 서로에게 유리한 결과가 돌아오는 데도 불구하고 이기적 행동을 해서 결국 모두에게 불리한 선택을 하리라는 예측에서 죄수의 딜레마는 '이기심'의 폐해를 보여주는 증거처럼 내세워져 왔습니다. ‘나’를 위하는 합리적인 선택, 즉 이기심이 결국 ‘둘’의 공멸을 초래한다는 것이죠.

이기적이면서도 협조적일 수 있는 인간

하지만 <협력의 진화>를 쓴 미국 미시간대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는 이런 식의 게임예측은 어디까지나 '1회성'에 한한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게임을 현실에서와 같이 반복해 실행한다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액설로드는 62명의 게임이론 전문가들에게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반복하는 게임전략을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또 모든 참여자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참여자와 반복게임을 다섯 번씩 치르게 했죠. 처음부터 끝까지 배신만 하고 게임 상대방은 협조만 한다면 배신한 사람이 최고의 점수를 얻겠지만 현실적으로 이 같은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죠. 모든 참여자는 이기적인 동시에 나름대로 합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배신을 적게 당하고 협조를 많이 얻어내는 전략을 꾸며야 하니까요. 실전 결과 최후의 승리자는 'Tit-for-tat(눈에는 눈)' 전략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전략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먼저 상대에게 협력하라.
2. 상대의 협력에는 반드시 협력으로 대응하고 절대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
3. 대신 상대의 배신은 즉각 배신으로 응징하라.
4. 상대가 협력으로 돌아설 경우 용서하는 관용성을 가져라.

양측 모두 '눈에는 눈' 전략을 쓸 때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것이죠. 책에 따르면 개인뿐 아니라 단체, 국가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들도 죄수의 딜레마로 정리될 수 있다고 합니다.

살아남는 자는 가장 힘이 센 자도 아니고, 가장 비열한 자도 아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들과 가장 잘 협조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반복게임 모형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가요. 바로 상호 관계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경우 '이기적 개인'이 자발적으로 남들과 협조하게 된다는 것이죠. 결국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되 타인과의 협조 또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회성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이기심이 공멸(公滅)의 결과를 낳은 것은 상호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이런 시장을 경제학의 용어로는 ‘불완전경쟁시장’이라고 하죠. 모든 경제주체가 완전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다시 말해 정보의 비대칭성이 발생하지 않는 시장인 완전시장의 상대적인 개념이 ‘불완전경쟁시장’입니다. 감옥을 하나의 시장이라고 한다면 감옥의 벽 때문에 상호 정보가 차단되기 때문에 감옥은 ‘불완전경쟁시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을 반복하게 되면 상대방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게 돼 정보의 비대칭이 해소되고 결국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죠.

EU(유럽연합)는 1990년대 중반 이 이론을 기업 담합(Cartel:몇 개의 기업이 점유율을 대부분 소유하는 상태에서 기업들이 가격합의를 통해서 가격을 일제히 올리는 행위)을 적발하는 데 처음 적용했다고 합니다. 리니언시(Leniency·자진신고 처벌감면) 프로그램이 그것인데요. 담합에 참여한 모든 업체가 침묵하면 죄가 드러나지 않지만 먼저 자백하는 기업에게 벌금을 면해주겠다고 하자 내부고발이 쏟아져, 1996년부터 10년간 169건의 불법 담합을 적발했다고 합니다.

넌제로, 이기심에 기반한 교환원리

인간의 이기심과 관련하여 <넌제로>라고 하는 로버트 라이트의 책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넌제로섬’은 어떤 시스템이나 전체의 이익이 한정돼 있으므로 한편이 득을 보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본다고 믿는 ‘제로섬(Zero sum)’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생물학자인 린 마굴리스에 따르면, 약 20억 년 전 우리 몸 안에 들어온 박테리아가 미토콘드리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포는 박테리아로부터 에너지를 공급 받고 그 대신에 박테리아는 먹이와 서식처를 제공받는 공생관계가 성립되어 진핵세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죠. 세포와 박테리아와의 공생 바로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넌제로섬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각자 개별 세포로 존재할 때보다 협력할 때 쌍방이 얻는 이득이 많아진다는 것이죠. 개미들의 협력이나 흡혈 박쥐가 피를 토해 동료를 먹이는 행동도 모두 넌제로섬의 틀 안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넌제로>는 어떻게 게임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도 있고 전체적으로 손실을 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한 손이 다른 손을 씻어준다면 두 손 모두 홀로 지내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수행되는 넌제로섬 게임의 정의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경제와 수렵·채집 경제 간의 차이는 게임에 참여 수행생물의 수, 그리고 그 손들의 상호의존성이 복잡하게 얽힌 정도에 있다.” 저자는 순수한 이기심에 기반한 교환원리를 문명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분석합니다.

저자는 수렵·채집 사회가 ‘공산주의 천국의 오아시스’라는 개념을 비판합니다. 모두가 충분히 먹고 있다면 무엇 하러 누군가가 왜 새로운 시도, 즉 농업을 벌였겠느냐고 저자는 되묻습니다. 수렵·채집인들도 무척 경쟁적이며 지위를 얻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는 거죠. 그들이 한가하게 풍족한 생활을 했을 거라는 것은 착각이란 겁니다. 그는 IOU(I owe you·당신에게 빚지고 있다)야말로 넌제로섬 원리의 고전적 표현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북아메리카 쇼숀 인디언들이 토끼 사냥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벌이던 무도회는 다른 먹거리를 구할 수 있는 장소 등의 정보를 교환하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 상당한 이익을 되돌려주는,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넌제로섬 상호작용 중 하나라는 거죠. 그는 ‘쇼숀족’의 무도회나 오늘날 전문가 집단으로 이루어진 학회, 그리고 인터넷은 겉모습만 다를 뿐 의사소통을 통한 협력의 창구로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문자는 물론이고 화폐도 특정 대상에 대한 ‘가치 정보’를 내포하면서 넌제로섬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아는 이기주의는 단기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손해를 불러온다는 것이 <협력의 진화>를 쓴 로버트 액설로드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기심에 기반하되 상호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서로 의사소통의 창구를 열어놓고 활발히 교류하라는 것이 <넌제로>를 쓴 로버트 라이트의 주장입니다. 어쨌거나 인간은 자신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취하되 마음의 벽을 허물고 타인과 협력할 수 있는 자, 그 사람은 결코 소인배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풍요는 나의 풍요에서 시작되는 거니까요.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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