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 칼럼]

어디에 어떤 용도로 쓰이든 거의 모든 추천서쓰기는 늘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추천 대상자에 대하여 좋든 싫든 직간접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지 않았거나 아예 생판 초면인 사람의 추천서를 쓰는 일은 더욱 난감하다. 뭐라고 써야 하나. 솔직하게 잘 모른다고 쓸까? 머리를 조아리며 추천서를 부탁하는 사람의 딱한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건 못 할 짓이다.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람처럼 거짓말을 해? 그것도 께름칙하다. 어차피 추천서란 요구하는 쪽이나 쓰는 쪽이나 다 그런 것이려니... 한다면 가뜩이나 복잡한 서류들 사이에 굳이 추천서의 동봉을 요구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신학교나 수도원에 가겠다고 본당사제의 추천서를 부탁하는 사람은 그나마 한결 수월하다. 신학교의 경우 대부분은 미리 점찍어놓고 개인과 가정을 눈여겨보아온 터라 정직하게 나의 소견을 서술하면 된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당사자와 부모와 함께 사전에 터놓고 상의하면 된다. 문제될 게 없다. 수도원 지망생의 경우는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굳이 내가 나서서 창창한 앞길 가로막을 이유가 없으니 수도원의 선처를 바란다고 쓰면 된다. 이미 수도원 입회를 결정한 다음에 갖추는 요식행위 정도다.

문제는 몇 년 전부터 실시하는 가톨릭계 대학(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의 입시생에 대한 수품 5년 이상 된 경력사제(?)의 추천서다. 추천서를 보고 그 신자학생에게 가산점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 가산점이라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수험생과 학부모는 목을 맨다. 나는 정확히는 기억 못 하지만 벌써 수 십 장은 썼을 거다. 고백하건데 이제까지 내가 만난 여러 학생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솔직하게 추천서를 써준 학생은 겨우 한두 명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조리 엉터리였다. 본당사제로 몇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학생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추천서 양식에는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오랫동안 관찰하지 않고는 답하기 어려운 세세한 문항들이 나열되어 있고, 추천인이 양심껏 작성해서 학생이 보지 못하도록 봉인해 보내라는 주의사항도 적혀 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교적 사본까지 떼어 와서 “죄송한데 이번 한번만 봐주시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매달리는 학생과 부모를 보면 칼로 자르듯 냉정하게 “나는 모르는 학생”이라고 쓰지를 못한다. 그 애타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서다. 그러면서도 혹시 나의 이 엉터리 추천서로 인해서 애매한 학생이 피해를 본다면 책임은 누가 지나 하는 생각,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올해는 심지어 이런 사람도 있었다. 다짜고짜로 내게 전화를 해서 이웃에 사는 천주교신도에게 들었다면서 자기 아들을 보낼 테니 추천서를 하나 써달라는 것이다. 아들이 신도는 아니지만 전에 몇 번 교회에 갔었단다. 누군지 몰라서 곤란하다고 대답하니 앞으로 나가면 될 거 아니냐,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한 동네에서 그 정도 편의 좀 못 봐주느냐, 그래서야 신도가 늘겠냐고 훈계까지 한다. 이쯤 되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조심스레 묻는다. 가톨릭계 대학들이 추천서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참된 신앙인의 발굴과 양성인가? 전국에서 이런 엉터리 추천서를 쓰는 사람이 오직 나뿐일까? 다른 신부들은 어떻게 쓸까? 책임을 덜려는 얍삽한 수가 아니다. 고등학교에 입학만 하면 벌써 성당에 안 가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만연돼 있지 않은가. (우리 본당에서 주일미사에 꼭꼭 참례하는 고3 학생은 단 한 명뿐이다.)

그건 그렇고, 대학은 정말 전국에서 들어오는 수천 통의 추천서를 하나하나 검토해서 입시에 반영할까? 입시관계자를 만났다는 내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통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럴 것 같으면 뭐하려 그 많은 종이만 낭비하지?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고강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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