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시인, 두번째 시집 출간 "어떤 이름다운 수사로 그 밤을 형상화할까"

 

▲ 용산참사 이후 장례식 날 추모시를 낭송하고 있는 송경동 시인(사진/김용길)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이 굳게 닫힌 회사 철문 앞에서 농성을 할 때도 100일 넘게 단식을 할 때도 그는 그곳에 있었다. 용산참사가 발생하고 유가족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발을 동동거리는 현장에서도 우리는 늘 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불에 그을린 그대로/150일째 다섯 구의 시신이/얼어붙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다.//까닭도 알 수 없다/죽인 자도 알 수 없다/새벽나절이었다/그들은 사람이었지만 토끼처럼 몰이를 당했다/그들은 사람이었지만 쓰레기처럼 태워졌다/그들은 양민이었지만 적군처럼 살해당했다"고 추모식에서 그가 "냉동고를 열라"며 소리칠 때, 그의 목줄이 튕겨져 오르는 것을 우리는 확연히 볼수 있었다. 그에게 가련한 인생 모두가 결단코 남이 아니었던 탓이다. 자신의 삶이 그 이들의 삶과 어김없이 섞여 들어가는 것을 그도 느끼고 우리도 느꼈다.

그 송경동 시인이 새로 시집을 펴냈다. <사소한 물음에 답함>. 남들은 다 사소하다고 여기는 현실이 뼈저리게 울리는 소리로 들려왔음직한 이야기를 우리는 그 시집에서 다시 읽는다. 그의 시는 지극히 편파적인 노래다. 시같이 부를 수 없는 이야기를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의 사랑이 움켜쥐는 삶에 대한 안간힘이요 생명력이다. 

붕어빵 아저씨 고(故) 이근재 영전에 바친 시를 잠깐 읽어보자.

어떤 그럴듯한 표현으로 그려줄까
13년 동안 밀가루값 가스값 빼면
100원 벌었고 200원 벌었고 300원 벌었는지를 헤아리며
변함없이 붕어빵만 구웠을 당신의 무미건조한 삶을
당신 옆에서 또 그렇게 순대를 썰고 떡볶이를 팔던
당신의 아내를

어떤 그럴듯한 은유로 보여줄까
2007년 10월 11일 오후 2시 일산 주엽역 태영프라자 앞
트럭을 타고 갑자기 들이닥친 300여명의 용역깡패들과 구청직원들에게
붕어들이 부서지고 가판이 조각 나고
조각난 리어카라도 지키려다
부부가 길바닥에 얻어터지며 울부짖던 날을

어떤 이름다운 수사로 그 밤을 형상화할까
잘난 것 없는 죄, 못 배운 죄 억울해
붕어빵 순대 떡볶이 팔아 대학 보낸
자식들 마음 아플까봐 숨죽여 울며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여보, 미안해, 미안해
부르튼 아내 손 꼭 잡은 채 잠들지 못했다는 그 밤을...(하략)
 

▲ 이하 사진/한상봉

송경동 시인은 1967년 전남 보성 벌교에서 태어나 읍내 장터에서 장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장터에서 살아가는 조건 자체가 안정적이지 못했던 송경동에게 문학은 어릴 적 백일몽 같은 것이었다. 중학교 때 백일장 숙제로 쓴 '봄비'라는 시 때문에 생전 처음이랄 수 있는 칭찬을 받고는 "나도 잘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처음 생각했다. 그후론 도서관에서 책도 많이 읽었다. 어린 중학생에게 도서관은 오일장터의 북적거리고 악다구니가 끊이지 않는 공간하고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읍내 장터는 늘 질척거리던 진창길, 악다구니를 쓰면서 사는 사람들, 장터 둘레로 술 팔고 몸 파는 집들이 즐비했다. 저녁마다 호객행위 하는 소리가 들리고 싸우는 소리가 들리던 곳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잦은 도박과 가정불화로 집안 분위기가 늘 어두웠다. 그는 "당연히 내 영혼도 습지고 어두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해 광주로 나가면서, 위악(僞惡)적으로 변했다. 내 영혼이 지저분한 것 같아 늘 강한 체 해야 했다. 도시 뒷골목을 밤이면 쏘다니고, 반듯한 모범생보다 어긋나 있는 친구들이 내가 속한 세계이며, 더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라고 여겼다. 문예반과 뒷골목 사이에서 방황했던 시기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고를 치면서 소년원 생활을 해야 했다. 가난이 죄라서 변호사도 없이 꼬박 2년을 그 안에 있었다. '우리들의 암송'이라는 시에서 그는 "소년원에서 나는 문맹반 반장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줄이 세 개 쳐진 완장을 두르고
세상을 이미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뜻을 잃은 말들의 파편을 가르쳐야만 했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그는 "세상이 흘러/ 잘난 세상에 꺽이려 할 때마다/ 반장님 반장님, 중등반 새끼들이/ 고등반 개새끼들이 멍청하다고 씹어요/ 콱 박아버려요 하던, 그 친구들이/ 아직도 내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1987년에 출소했지만,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자포자기 속에서 친구들과 서울로 올라와 삐끼집과 빠징꼬 등을 전전했다. 그는 그런 바닥에서 인생을 배웠다.  그러던 중 빠찡꼬 손님 중 고전무용을 하시던 분이 권유해 잠시 뒷골목 생활을 정리하고, 낮에는 인쇄소나 팬시제품 공장 등에서 일하며 고전무용을 배우다 그만 두었다. 

송경동이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후 가족이 있는 순천으로 내려간 뒤였다. 목수 조공 일을 배우며 새끼목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늘 공사장 일은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후 플랜트배관공이 되어 여천 석유화학단지에서, 광양제철소 현장에서, 열병합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열심히 돈벌이에 집중했다. 그러나 얼마간 돈을 모왔다 싶었을 때 서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내게 되어 3개월 동안 잡범징역을 살고 그 돈을 몽땅 합의문으로 내놓아야 했다. 미친듯이 철야와 잔업으로 쫓았던 돈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리면서 그런 삶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는 돈을 쫓아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돈은 허상이었고, 아무 것도 그에게 남겨주질 않았다.   

그제서야 글쓰기에 대한 갈망이 다시 솟아올랐다. 그간 경험했던 삶의 비참과 억울함을 써보고 싶었다. 그들이 해방되어 가는 과정을 노래하고 싶었다. 1991년 한국문학대학에서 올린 모집광고를 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2년 동안 김남주, 정희성, 이시영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아, 그건 송경동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오래 기다려 왔던 꿈이었다. 그후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활동하면서 노동시를 배우고 쓰기 시작했다.  차비 3만원 들고 올라온 서울에서, 그는 공사장 함바(기숙사)에서 목수일, 설비일, 용접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밤마다 문학수업을 한 셈이다.  

구로노동자문학회는 창작반(시, 소설, 산문), 사회과학 학습모임, 회보 제작, 시낭송단 모임(쟁의현장에서 시낭송), 현장 노조 편집 지원, 노동자문학의 밤, 책 대여사업, 노동자문학교실, 투쟁 현장과 공동창작, 현장 시화전, 지역민주단체협의회 활동, 노동조합사 정리 등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지역노동자 대상 소책자였던 <단결의 길>을 복각하자는 고민을 하던 차에 전국적인 노동자생활문화 잡지인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드는 데 합류했다. 이 잡지는 1998년에 창간되었다.  그후 가장 바닥에서 움직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했다. 대추리에서, 기륭전자에서, 용산까지.

그는 "아직 오지 않은 말"을 기다렸다. 같은 제목의 시에서 "나는 이 말들의 음역이/ 좀체로 떠오르지 않아/ 많은 날을 벙어리처럼 침묵해야 했다/ 때론 벽을 쿵쿵 울려보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 말들이 아귀처럼 어느 길목에서 내 몸을 삼킬 수 있기를 고대했다. 그 말들이 나를 삼켜 뼈를 토해놓기를 기다렸다. 그 삶의 진액을, 그의 몸에 흡수된 수액을 길어올리길 바랬다.

흠모하던 김남주 시인을 땅에 묻을 때에도 울지 않았다는 그가,  마포대교를 건너다 "다리 난간에 덜덜 거리는 허리 받치고 해머드릴로 아스팔트 까며 야간일 하는 늙은 노동자를 본 순간 이 악물고 울고 말았다." 거기서 그는 혁명 시인 김남주가 사랑했던 한 시대가 가는 것을 서러워했던 것이다.

오일장터 일상옥 앞에서 밥 빌어먹던 비럼벅수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를 불러 '예수'라 했던 송경동이다. 그의 생애를 '어떤 예수전'이라는 부제를 달아 시로 썼다. "동지섣달 꽃 본듯이 히죽해쭉"하던 그를 말이다. 그는 '당신의 운명'이란 시에서 어머니의 구원에 대해 논한다.

어머니는 밤 기도를 드리고
나는 두 칸짜리 미닫이문 너머에서
바퀴벌레를 잡는다.

어머니의 구원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어머니는 한때 팥알을 씻어 절간엘 다녀왔다
아카시아향 번지는 개척교회 돌계단도 올랐고
생활이 더 말라가는 말년엔
미사포를 넣고 성당엘 다닌다

그런 어머니를 비꼬기도 했지만
난 어머니의 그 천연덕스러움이 좋다
곤궁한 생활을 피게만 해준다면
설탕이 아닌 사카린이면 어떻고
꿀 아닌 물엿이면 어떤가

어머니에게 절대적인 것은 생활이어서
바퀴벌레처럼 어두운 이 삶이 펴지지 않으면
저 신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하리라

이처럼 송경동의 시는 그의 이력만큼이나 바닥에 닿아 있다. 추상이 틈입할 자리가 없다. 바닥에서 바로 천상으로 솟구치는 여운이 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라는 시에서 그는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질문에,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는 물음에 '숨김없이' 답한다.

나는 저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그는 자못 허위와 권력을 느끼게 하는 사소한 질문에 답한다. 자못 가련한, 그러나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모든 사소한 것들에게 자신이 촘촘이 소속되어 있다고 말이다. 송경동 시인, 그를 통해 나는 구원의 한끝을 얼핏 엿본 것 같아 얼굴이 상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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