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시사칼럼-배은주]

 

▲ 사진/한상봉

아버님께,

“지난 늦가을에 신종플루가 극성이어서 수학여행을 못 갔다고 하더니, 서울은 일본으로 수학여행 가니?”
“아니오, 아버님. 학교 수학여행이 아니고요. 수연이 졸업하고 다닐 대안학교에서 겨울 캠프를 가는데 함께 가는 거예요.”

아버님, 지난 1월 중순에 아버님과 전화 통화를 한 것이 아직도 생생한데 혹 기억하고 계신지요? 2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어린 손녀가 일본여행을 한다는 소식에 아버님은 어린 손녀 못지않게 반갑고 뿌듯하신 듯 들뜨고 떨리는 음성으로 확인전화를 하셨죠. 제가 아버님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아버님 마음이나마 편하시라고 ‘그렇다’고 말씀드리면 될 것을, 전 곧이곧대로 말씀드렸죠. 제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님은 저를 철부지 학부모나 혹은 자식이라고는 전혀 키워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보셨는지, 일본여행에 대한 들뜬 목소리는 돌연 불신과 불만으로 변하고, 줄곧 언성을 높이시며 화를 내셨지요.

‘대안학교라는 곳은 말 그대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문제아들, 깡패들이나 다니는 곳인데, 왜 멀쩡한 아이를 그런 곳에 보내느냐’, ‘세상에는 큰 흐름이라는 게 있는데 그 속에 아이들이 잘 적응하며 살도록 키우려 하지 않고 아이를 꼬드겨서 그런 곳에 보내려고 하느냐’...... 대충 이런 말씀들을 하셨죠. 물론 저도 대안교육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아버님과 저의 생각의 차이는 좁혀들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 감정만 격앙되고 말았지요. 결국 서로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현저하게 다름을, 또 세상을 사는 가치관이 다름을 확인한 날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슬하에 3남매를 두셨죠. 모두들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진데다가 별다른 도덕적 흠결 없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편안함을 누리고 있고, 주변 사람들도 자식농사 잘 지었다고 말씀하시며 아버님을 부러워하시니 아버님도 얼마나 뿌듯하시겠어요? 평소에 반듯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자식을 키우시고 이제 손자들에게 집안 어른으로서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강조하시고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생활하시고 교육하셔서인지 아버님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문제아를 보면 그게 다 부모 탓이고, 가정교육이 제대로 안 된 것으로 생각하시지요. 또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는데, 그게 힘들다고 큰 흐름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가는 것은 핑계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도태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손녀를 ‘그런 곳’에 보내다니, 당신 집안에 있을 수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거지요.

그런데 아버님, 대안학교에 앞서 우리나라 제도교육에 대해서는 아버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우리나라 교육은 한마디로 1~2%를 향해 달려가라고 모든 아이들을 교실에 밀어놓고 마구 채찍질 해대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이 모든 사람이 어떻게 상위 1~2%안에 들 수 있나요? 그러나 지금 이른바 교육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나는, 내 자식은 그럴 수 있다’며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놀이와 사귐이 박탈당한 채 교실에서 친구들과 서로 경쟁하고,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는 신뢰가 무너지고, 학교는 높은 진학률에 목맨 기업의 모습에다가,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에 맞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기 않고 돈을 벌어 아이에게 투자합니다.

이쯤 되면 공부가 자신만의 성공과 성취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있다고 봐야겠지요? 사람답게 살기 위한 공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명문대학, 좋은 직장, 높은 임금이 유일한 교육의 목표이며 삶의 지향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돈, 큰 집, 지위, 명예, 권력을 미친 듯이 추구하고 있지만, 물거품처럼 허망하고 껍데기에 불과한 것들에 소중한 가치의 자리를 내줄 수는 없는 일 아니던가요?

함께 어울려 사는 이 사회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일,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는 일, 뭇 생명을 사랑하며 사람과 자연이 한 몸으로 사는 일들을 교과서에 박제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더 늦기 전에 인격적으로 만나고 살아내야 합니다. 큰 집을 추구하면서 가난한 이웃을 기억할 수 없고, 골프 치러 다니면서 생명과 환경을 말할 수 없으며, 권력을 좇으면서 평등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지요.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 똑같이 아름다운 길 앞에서 망설이며 사람이 적게 간 길을 선택한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놓인 두 갈래 길은 이미 너무도 선명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라며 사람이 지니고 살아야 할 가치를 왜곡시키고 버리는 제도교육을 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나마 대안학교는 제도교육이 버린 그 ‘가치’를 걷어 들이며 사람 사는 세상을 기억하고 함께 만들어가자고 합니다. 저는 그 길로 아이와 함께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누구는 승산도 없는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이라고 염려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용기 있는 도전이라며 격려하고 축하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도 앞길을 알 수 없지만, 보다 나은 선택이었다고 어느 훗날 오늘을 회상하며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스트처럼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환하게 웃으며 말이죠.

아버님,
수연이는 일본여행을 다녀온 후 대안학교 학생들과 함께 사회창안 프로젝트를 만드느라 한창 분주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하루하루 다르게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가는 아이를 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는 지금껏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에 매우 즐거워하고 행복해 합니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우물쭈물 가지 못하는 그 길 위에서 아이가 춤을 추고 있지요.

전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그것이 제 행복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겠지요? 아버님, 수연이가 더 큰 세계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믿으시고 진심으로 축복해 주세요. 아이 앞에 수없이 많은 도전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뒤에서 소리 없이 응원하는 할아버지 덕분에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말이죠.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곧 수연이도 대안학교에 입학합니다. 명랑하고 쾌활한 녀석이 새로운 환경에서 또 얼마나 즐겁게,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나갈지 벌써 기대가 되는걸요.
아, 봄이, 우리에게 진정한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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