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돌이가 우리신학을 하게 된 내력(마지막회)

 

▲ 사진/한상봉

이 글을 끝으로 어줍지 않은 회고담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직 삶을 정리할 나이도 아니고, 정리할 게 있을 만큼 이룬 것도 없는 사람이 “공돌이가 우리신학을 하게 된 내력”을 쓴 것은 젊은 평신도 가운데 단 몇 명이라도 평신도신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글에 달린 몇 개 안 되는 댓글, 그리고 주변 사람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또래나 선배들에게만 옛 생각에 젖는 기회가 되었을 뿐 젊은 평신도의 관심은 끌지 못한 모양이다. 아쉽다.

우리신학연구소를 만들면서 우리는 또 다른 꿈이 있었다. 평신도운동이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연구소 말고도 평신도전문양성기관과 평신도영성수련센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신학을 전공해도 우리를 선생으로 받아줄 신학대학은 없다는 걸 그때도 알았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교육기관을 만들어 평신도 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 내용도 좀 더 진보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론만으로는 부족하고 평신도 고유 영성을 수련할 곳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신도영성수련센터는 시골에 세워서 늙으면 함께 공동체마을을 이루고 살자며 행복한 꿈을 꾸기도 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보면 꿈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우리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자신이 없다. 솔직히 다른 꿈은 그만두고 연구소만이라도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에 함께 시작했던 선배, 동기, 후배들 가운데 대부분이 지금은 연구소를 아주 떠나거나 자기 일을 하느라 연구소 일에 거의 시간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시작할 때 30대 초반의 총각이었지만, 이제 모두 마흔을 넘긴 나이이고, 결혼해 자식도 한두 명 키우는 형편이니 섭섭하고 답답해도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우리신학연구소를 설립하기 전부터 쭉 관계해 왔지만 다른 일을 하느라 하고 싶은 만큼 몰입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연구소 설립 초기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 천주교 사회단체들이 뜻을 모아 추진한 <격월간 공동선> 창간 준비와 초대 편집장을 하느라 몇 년 동안 연구소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또 1년 남짓은 연구소 수익사업으로 우리밀빵 대리점을 한다고 팔자에도 없는 장사도 해보았다. 도저히 연구소 수익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없으니 따로 수익사업을 해서 연구 기금을 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경험 부족과 모질지 못한 성격 탓에 공동선 편집장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우리밀빵 대리점도 본사의 엉성한 사업 기획과 운영으로 손해만 보고 그만두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로서는 배운 게 많았다.

연구소에 대한 사랑이야 남 못지않았지만, 10주년을 맞은 2004년에 소장을 맡게 되어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왕이면 신학연구소에 맞게 신학 전공자가 소장을 맡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분들이 맡을 여건이 안 돼서 소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1~2년 동안 임시로 맡을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벌써 6년째 장기 독재(?) 중이다. 그만큼 연구소 인력이 부족하다는 얘기이다.

우리신학연구실 창립을 준비하면서 이름을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신학’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 이중광 후배이다. 별 이견 없이 받아들여졌다.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이어받아 우리신학연구소가 되었다. 그때 우리가 새긴 ‘우리신학’의 뜻은 이랬다.

첫째, 신학은 사제와 수도자만의 것이 아니라 신자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신학의 독점은 교회 권력 독점의 뿌리이다. 그러니 평신도 모두가 ‘신학함(doing theology)’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학하는 주체의 전이(轉移)가 이루어져야 하고, 평신도 모두가 자기 신앙체험을 신앙언어로 되새기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신학의 과제는 몇몇 평신도신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신학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평신도신학자는 그 일에 앞장서거나 뒤에서 북돋는 사람이다. 그럴 때만이 존재 의의가 드러난다.

둘째, 해방신학이 해방운동에 대한 성찰이고 민중신학이 민중운동에 대한 성찰이라면, 우리신학은 지금 여기 우리 운동에 대한 성찰이어야 한다. 우리신학연구소 설립 당시는 천주교 사회운동이 활발했으니, 우리신학은 천주교사회운동에 대한 성찰이어야 했다.

셋째, 우리신학은 개인 신학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함께 이루어가는 신학이어야 한다. 연구 방법에서 개인 연구보다는 함께 하는 공동 연구를 지향해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신학이어야 하고, 공동체의 신학이어야 한다. 이러한 뜻은 우리신학연구소 사명선언문을 통해 잘 드러난다. “우리는 스승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가고, 지금 여기 우리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낸다.”

우리신학연구소 창립 16주년을 맞는 지금, 과연 우리신학연구소가 우리신학에 얼마나 충실하였는지 되새겨본다. 무엇보다도 연구소를 둘러싼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제법 활발했던 천주교사회운동은 침체되었고, 가톨릭청년학생운동의 침체로 평신도신학자는커녕 천주교사회운동 활성가로 살아가겠다는 젊은이도 거의 없다. 반면 우리신학연구소의 초창기 창립 구성원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후배들은 제 갈 길을 갔다. 창립 때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은 없다. 그래서 우리신학연구소의 현재는 아슬아슬하고, 미래는 어둡다. 연구소 창립 15주년 잔치 때 이사장 호인수 신부께서 20주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우리신학의 뜻을 되살리려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각오와 열정이 필요한 때이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맞는 우리신앙공동체운동을 기획하고 현장으로 뛰어들어 하나둘 이루어내야 한다. 만일 그것을 한다면, 그것에 성공한다면 우리신학의 미래는 있다.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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