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한 해의 마지막에 서니 더욱 선생님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선생님의 이름이 기억이 안나고 허연 머리와 햇살 같던 웃음만 마음에 되살아납니다.

한 번 찾아뵈어야지 하면서도 늘 그 생각에만 머물며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못하고 있어요. 바쁜 것도 아니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 부족해서도 아닌 데...잘 살아온 것 같지 않아 선생님이 실망하실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허연 머리로, 우리들의 눈을 휘둥글게 하셨던 선생님의 안부를 묻기가 겁이 나는지도 모릅니다.

건강하신지요?

이제 어언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네요.
초등학교 4학년, 어린 제가 교실 앞 늙은 자목련 가지에 앉아 빵을 먹고 있을 때 선생님은 지나다
저를 보시고는, 한 입 달라 하시더니 크게 베어 드시고는 노래를 불러주셨지요. 어떤 노래였는지도
기억이 없고 다만 노래 도중에 기침이 터져 나와 곤혹스러워하시던 모습만 또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 어제는 제가 책읽기를 가르치는 아이들 부모님들과 송년회 겸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야기 내내,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이 세상의 어둠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마음이 전해져, 불안한 현실이지만 그런 어머니들이 계시기에 행복했지요. 각자 자신의 모든 달란트를 쏟아내 일군 가정이기에 그 가정을 지켜내려는 아빠들과 그들이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는 얘기도 나누며 술을 마셨지요. 하양에서 분홍까지에는 수 천의 분홍과 하양의 조합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들 각 가정이 그러했습니다. 조금씩 비율이 달라지는 만큼 채색을 달리하면서도 한결같이 하양과 분홍색이 주는 감흥이 맴돌았습니다. 곱고 부드러워 꿈결 같고 정결한.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며, 겨울바람 속에서 간절한 무엇이 소설 속의 한 장면으로 떠올랐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19세기 영국 지방도시의 어느 목사가 버려진 아이 히쓰클리프를 양아들로 집에 데려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목사님에게는 같은 또래의 친아들이 있었지요. 이 친아들 힌들리와 양아들 히쓰클리프가 똑같이 홍역에 걸립니다. 친아들 힌들리는 열에 들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지요. 온가족이 그에게 매달려 정신을 못차립니다.
그런데 히쓰클리프는 아무 말도 안하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땀을 흘리며 긴 홍역의 시간을 견딥니다. 아이는 그가 열에 시달린다고 가족을 불러들이거나 울부짖어서는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나 봅니다.
자신은 주어온 아이니까... .

한 아이-정민이-가 제가 훈장으로 있는 <글방집>에 오고 싶은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친구들과
<글방집> 근처까지 왔다, 저만 혼자 돌아간다고 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제가 아이들의 삶에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나 봅니다.
히쓰클리프와 정민이 사이에 큰 연관성은 없는데, 제 수업에 아이가 들어오지 못해 혼자 마음을
태웠다는 걸 알게 되면서 혼자 감정이 증폭됐나봅니다.

선생님, 왜 사람들은 눈이나 비가 오면 옛날 사람들이 보고 싶을까요?
다시는 전화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의 번호를 찾느라, 옛날 수첩을 뒤적이는 날도 이런 날입니다. 저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러브콜을 보내오지만 받지 않았던 나, 내 전화를 거절하고 멀어져간 인연들...다가오다 그냥 돌아서 버린 사람들... 지금 인연의 줄이 닿을듯말듯한 작은 꼬맹이 정민이가 있습니다. 어제밤도 비 같기도 하고 눈 같기도 한 것들이 조용조용 어깨로 내려 앉았습니다

그 옛날, 선생님은 결핵을 앓느라 한 쪽 폐를 절단하시고, 긴 요양생활을 거치며 생사를 넘나드셨지요. 그 후유증으로 20대 초반에 벌써 검은 머리가 허옇게 되셨고요. 그런 고역의 시간에서 우러난 맑은 사랑은 오롯이 저희들 차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들은 선생님이 안 계신 곳에서 '허파한쪽'이라는 별명으로 선생님을 불렀지요.

어느 날, 책을 읽지 못하고 더듬대는 친구에게 선생님은 나와서 노래나 한번 불러보라고 하셨고
친구는 그 수업시간에 톱스타로 등극했지요. 늘 꾸어다논 보릿자루처럼 존재감이 없던 친구는 오락부장이 되어 우리 반을 활기 넘치는 반으로 개혁했습니다. 오락시간마다 웃고 떠드느라 아이들 볼은 발그레했고 더불어 그 친구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갔지요.
반에서 꼴찌를 도맡아 하던 친구가 그 시절 유행가를 춤과 함께 선보여 반친구들은 책상을 치며 웃게 했지요. 그가 부르던 노래 중엔 '이를 잡는 호래비 신세' 하는 가사도 있었지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십팔 번을 배워 우리에게 들려준 것 같습니다. 그 친구 아버지의 술주정은 온 동네가 다 아는 것이어서 심지어 교장 선생님까지 이 친구의 가정 사정을 꿰고 계셨지요.

(뇌막염을 앓아서 그렇다고 했지요) 구구단을 4단 이상 외우지 못했던 '티밥'이라 불리던 남자친구도 생기를 드러내며 오락부장을 도왔습니다. 오락시간이면 두 친구는 더블엠씨를 보며 리싸이틀을 했지요. 이를테면 우리 반의 남진과 나훈아였지요.

천식을 앓느라 기침을 많이 하던 나, 도시락 반찬으로 장아찌를 싸온 게 부끄러워 선생님이 볼까봐 숨기려다 뒤집어엎었던 웅태... , 선생님 주위엔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진을 치고 있어, 학교에서 그동안 보지 못하던 풍경에 우리 생각의 틀이 흔들렸지요.
어리숙했던 시절이라, 아이들의 성적은 그들이 받아오는 점수가 그대로 정산되지 않은 채 우등상이 주어지기도 했지요. 선생님이 저희 반을 맡고부터, 자주 백 점을 받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상을 받지 못했던 친구들이 우등상을 받게 되었지요. 정의로웠지만 차갑지 않고 다감하여 등교길에 만나면 달려가 선생님과 보폭을 맞추어 걸었지요.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교실 앞 오래된 자목련의 자주빛 꽃잎까지 떠오릅니다.
선생님이 어느 요양소에서 쏟아냈을 핏덩이처럼 진한 꽃잎들이었지요.
저는 지금 세상 한 귀퉁이에서, 그 시절의 선생님처럼 저를 선생님이라며 책을 읽는 아이들과 만나며 지냅니다. 요즘 들어, 선생님이 떠오르며 제게 주신 사랑에 값할 만큼 제가 선생님 역을 제대로 하는 지 더럭 겁이 납니다. 더구나 풀싹 같이 어린 아이들을 향해서... .
지금 저는 정민이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것을 망설입니다. 혹여, 아이의 마음에 내 이름이
주홍글씨로 새겨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사랑으로 시작해서 애증으로 끝이 났던 실패의 기억들이 저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공부에 재능이 없는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그럼에도 그 옛날 선생님과 함께 한 일 년은 우리들 안에서 무언가가 생기를 되찾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성 안에 머무는 게 불가능하여, 성 밖으로 내쫓긴 문둥병자를 만나 그들을 깨끗이 고쳐주시고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셨던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지나친 연상작용일까요?
그리운 추억들을 되새겨보니 정민이와의 만남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것만 같습니다.

보고싶은 선생님, 부디 건강하시어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안녕을 빕니다.

/이규원 200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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