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 칼럼]

매월 첫 금요일 아침이면 나는 어김없이 성체를 모시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나 환자들을 방문한다. 가서 그간의 안부를 묻고 기도도 하고 성체를 드린다. 그것을 우리 천주교회는 봉성체(奉聖體)라고 한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본당의 사제들은 사정에 따라 날짜는 조금씩 달라도 다 그렇게 한다. 보통으로 수녀님들이나 구역장, 반장님들이 동행한다.

30년이 넘도록 봉성체를 했는데 나는 아직도 내심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 판단이 안 설 때가 종종 있다. 어디 나뿐이랴. 본당사제라면 누구나 여러 차례 경험했을 터다. 이런 경우다.

“할아버지. 우리 얘기 많이 했으니 이제 영성체하셔야지요.”
“그러지 뭐.”
성체를 손에 들어 보이며 “이게 뭔지 아세요?”
“몰라.”
“지난 달에도 잡수셨잖아요?”
“그랬지.”
“뭔지도 모르는 걸 그냥 잡수셨어요?”
“주니까 먹었지.”


딱하다. 연세가 높아 정신이 혼미해져서, 혹은 치매 등으로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 생명의 양식이라는 기초적인 신앙고백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노인에게 그냥 먹을 것이라고 입에 넣어주는 게 과연 옳은 처사인가? 이런 영성체가 무슨 의미가 있나? 간혹 동행하는 수녀님이나 교우들의 생각을 묻기도 해보지만 속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

한 20년 전 쯤인가, 그때 나는 똑같은 질문을 노동사목하던 골롬반 수도회의 오기백 신부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는 영성체할 때마다 굳은 믿음으로 하는가. 습관적으로 받아먹을 때가 더 많을 거다. 그러면 영성체가 아닌가? 그렇게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오기백 신부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그의 답은 교리나 신학적인 설명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공감이 갔다.

대부분의 봉성체 대상자들은 우리의 방문을 무척 반긴다. 찾아오는 사람 없이 허구한 날 방에서 혼자만 지내는 노인의 경우엔 특별히 더하다. 가끔씩 사탕이나 과일이나 담배를 사가지고 가면 그렇게 고마워할 수가 없다. 그런데 성체를 영하고 나면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시큰둥하다. 그분들에게는 성체보다 사탕이나 담배, 과일 봉지가 훨씬 더 반갑고 고마운가보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몸” 하면 “아멘” 하고 받는 가톨릭신자에게 그까짓 사탕이나 과일을 감히 성체에 비길 수 있으랴만 그게 실상인 걸 어쩌랴. 그분들에게는 차라리 먹고 싶은 음식을 드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내 맘 속의 회의는 여전히 떠나지 않는다.

혼인이나 장례미사 때를 생각해본다. 영성체 때가 되면 사회자는 친절하게(?) “천주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은 분들은 자리에 앉아 계시고 세례 받은 분들만....”하며 선을 긋는다. 세례 받지 않은 사람, 다시 말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영성체 길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거룩한 혼인미사에서 신자가 아닌 쪽은 신자인 배우자가 혼자만 맛있게 먹는 걸 곁에서 멀뚱히 보고만 있어야 한다. 사뭇 안쓰럽다. 부모의 장례미사에서 상제가 얼떨결에 가족 따라 앞에 나왔다가 영세했냐는 사제의 추궁(?)에 쭈뼛쭈뼛 돌아서는 모습도 민망하다. 그냥 주니까 먹는다는 할아버지에게는 성체를 드리면서 혼인이나 장례미사에 참례한 집식구들에게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지? 오기백 신부는 어떻게 할까? 이런 의문 자체가 성체께 대한 모독인가? 오래 봉성체하면서 갖는 상념이다.

▲ 사진/한상봉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고강동 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