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오래 전, 친구 아기 돌잔치에 가보니 친정어머니가 떡을 해오셨다며 내놓는데, 좀 특별해서 물으니 모란꽃잎을 우려내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 어머니는 딸의 생일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란꽃잎을 말려 두었다가 물에 우려내 떡을 해주었다고 한다. 일찌기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어버린 그 분은 하나 남은 딸의 무병장수와 부귀를 기원하며 떡을 빚어오셨다고 했다. 그 기원은 외손녀의 돌떡으로 이어져 우리는 보랏빛 모란꽃물이 든 떡을 먹었다. 모란의 꽃말은 富貴와 無病長壽이다.

지난 6월 말쯤, 하던 일이 어이없게 끝나는 바람에 법정으로 가서 시비를 가리고 싶은 생각으로 번지며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해서, 아는 작가선생님께 그분과 절친하다는 모 변호사의 연락처를 달라는 부탁을 하다, 언쟁으로 번져 20년 지기의 인연마저 소멸 직전에 처하게 됐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변호사였다. 논스톱으로 일류 코스를 마치고 로펌을 만들어 업계 선두를 달리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정부요직을 거쳤다. 그 변호사가 내가 처한 문제의 전문 변호사였고 일은 베테랑하고 해야 명료하게 시비를 가려낼 듯해서 무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수임료를 제대로 낼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이, 감히 너무 쉽게 최고위직의 사람을 옆집 아줌마 불러내듯 한다는 불평이 작가 선생님의 음성에 배여 있었다. 왈가왈부, 갑론을박하다, 당신은 그렇게 현실감각이 없으니 참 걱정이다, 라는 질타를 듣는 걸로 나는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

당장, 약국에 가서 현실감각을 보충할 영양제를 사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각자 자신의 세계관대로 살아갈 수밖에. 같은 성경을 읽고도 다른 신학을 갖게 되는 것처럼, "세상"을 읽어내는 시각도 그가 살아온 배경과 지향점에 따라 다양해서, 같은 세상을 살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다른 행성에서 온 이방인을 대하듯 놀라움과 서먹함을 느낄 때가 있다.

요즘에야 해마다 사시합격자 수가 천 명을 넘어 사무실 운영이 어렵다는 변호사들도 많지만, 판검사들을 향한 보통 사람들의 시선은 거품이 많이 섞인 듯하다.

지금도 검사들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지만, 판검사, 변호사들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들의 캐릭터 설정은 지나치게(?) 명민한 사람들 혹은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로 그려진다. 가족 안에 법조인맥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쉽게 그들의 성격을 단정할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 -특히 작가들이 작품 속에 고정시켜놓는 법조인의 캐릭터 설정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인간의 생을 다루는 작가들이 법조인들을 보통사람들보다 우월한 인간으로 설정하고 서술해나가는 걸 자주 보며 우울했었다. 그저 한 사람으로, 법조 분야에 종사하느라 그 계통에서 요구하는 자질이 개발된 사람쯤으로 그려주면 안될까... . 보통의 장단점을 가진 법조인을 그려낸 것으로 기억나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근래 존 그리샴의 소설들은 법조인의 세계라기보다 사건의 색다름이 더 빛이 나는 소설들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家의 형제들>은 아버지-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의 살해사건이 중심이 되는 소설이다. 생모가 다른 아들 셋을 두고 있는 아버지 표도르씨는 큰아들과 여자를 사이에 두고 다투는 인물이다. 그런 정황증거를 파악한 검사는 아버지를 살해한 자가 장남 드미뜨리일 거라고 확신을 한다. 게다가 드미뜨리는 다혈질적인 성격이다. 그는 초짜검사로 열정이 지나치다. 그를 묘사해놓은 작가의 시선은 사뭇 냉소적이다. 드미뜨리의 재판과정도 이미 결론을 내놓고 하는 재판에 가깝다. 변호사의 변호나 여러 의문점들은 무시되어 버리고 드미뜨리는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사생아 스메르짜꼬프였다. 그는 까라마조프 家에 얹혀사는데, 그의 아버지가 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일 거라는 암시를 주는 구절들이 숨어 있다.

법조인들은 기본적으로 복잡한 인간문제를 다루는 법률서적을 꿰뚫어야 하니 머리가 나쁜 사람들일 리는 없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상류층 대접을 받는 이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취재과정에서나 캐릭터 설정에서 작가들은 그들에게 지나치게 후한 점수를 준다. 이 세상 어느 일은 복잡하지 않고 머리가 나빠도 가능하던가?

아는 영화감독이 영화제작을 위해 재원을 모으러 다니다 지쳐, 피자집을 하는 친구에게 푸념삼아 몸이 고되더라도 피자나 만들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피자집 사장님 왈, 피자 하나 굽는데 얼마나 (잔)머리를 굴려야 되는지 아느냐며 맛을 감지하는 "혀"를 만족시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예민하고 성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혀를 차더라고 했다.

판검사, 영화감독, 피자집사장 어느 것도 만만치 않다.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판결은 어긋나고 영화는 용두사미가 되어버리며 피자는 맛이 변한다.

중등학교 국사책 초반부에 보면, 으레 "한민족의 근간은 예맥족인데 그들은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며 그 성격이 현세적이다"라는 설명을 읽게 된다.

음주와 가무를 즐긴다는 건 수많은 술집과 노래방이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 성격이 현세적이다'라는 표현은 좀 난해했다. 그러다 어느 해 운현궁을 거닐다 마당 가득 피어난 모란꽃을 보며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현세의 부귀(富貴)와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모란을 조선 왕가에서도 귀하게 여겨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나 보다. 우리 고전명작들의 한결같은 주제였던 부귀와 무병장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의식을 파고들어 과거제도에 매이던 광기가 사법고시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에너지로 전이되었을 것이다.

어느 직종을 더 우월한 인간집단으로 그려낸다는 건, 생의 에너지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닐까. 현실이 그러하니 현실을 반영하는 게 예술작품이라며 변명한다면 일리는 있겠지만, 재미는 떨어지는 작품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특별히 어느 직종의 사람들에게 주눅 드는 의식이 내 안에 고여들면,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일을 허술히 대하는 거 아닐까 살펴보게 된다. 사리(事理)는 고요히 진리로 흘러드는 샛강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처한 생업의 장은 사리분명한 처리를 요하는 천직의 자리일 것이다.

일본의 검객 미야모도 무사시가 젊은 시절, 어느 기생집에서 화로에 모란꽃가지를 태우며 술을 마시던 게 생각난다. 그는 그 운취와 그윽함이 너무 뛰어나 서둘러 기생집을 빠져나온다. 그의 검법은 섬세함보다 야성을 잃지 않는 데 있었다.

생동하던 인간-미야모도 무사시는 모란꽃보다 차라리 겨울나무의 혹독함을 마음에 심는 게 중요했다. 선배 작가선생님은 가파르게 상승하는 나의 분노가 더 걱정스러웠는지 모른다. 부귀영화의 끝을 묵상하게 만드는 겨울나무를 보며, 모란꽃 같은 삶은 불가능하더라도, 해가 가기 전에 작가선생님을 찾아가 함께 모란꽃가지나 한번 태워봤으면 하는데, 지나친 호사일까...?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의 나무 1964년 작


/이규원 200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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