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덕진 천주교인권위 사무국장

▲ 용산 국민법정(사진/한상봉)

2009년 1월 20일 추운 겨울 새벽 용산 국제빌딩 옆 남일당 건물 옥상에 세워진 철탑 망루에서 여섯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꿈을 꾸며 매일매일 이 땅의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명이 죽었다. 그가 철거민이었든, 경찰이었든 살기 위해서는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마주한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왔던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건설자본과 자본의 달콤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권력은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을 여섯 사람을 죽음의 길로 인도했다. 아니 그들은 여섯 사람을 죽였다. 1년 동안 냉동고에 있던 다섯 철거민의 장례를 치뤘으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줄어들겠지만 매섭게 추웠던 2009년 겨울 새벽 용산의 '죽음'과 '죽임'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2009년 세밑,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보상과 관련된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모든 언론의 첫머리 기사를 장식했다. 정치인들은 용산참사 해결에 자신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알리기 위해 분주했고 남일당 참사현장은 백여명의 기자들이 다투어 취재에 열을 올렸다. 여기저기서 협상내용에 대한 추측성 기사들이 인터넷판으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한 보수 신문은 결국 ‘돈’으로 해결되었다는 유치하고 악의적인 사설을 쓰기도 했다.

유족들과 용산 4구역 철거민 23명으로부터 협상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협상대표로 20여 차례 공식 · 비공식으로 서울시와 용산구청의 고위 공무원들과 마주 앉았던 필자는 답답한 마음을 달리 표현 할 길이 없었다. 유족들과 철거민들, 용산범대위의 요구가 정말 '돈'이었다면 벌써 몇 달 전 협상을 끝내고 장례를 모셨을 것이다. 어찌 돌아가신 분들의 '목숨'을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1년 동안 상복을 벗지 못한 유가족들의 한과 눈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노숙을 하며 생존권을 위해 투쟁해 온 철거민들의 매일매일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협상에 임했다. 용산에서 함께 분노하고 기도하며 눈물 흘렸던 사람들, 경찰의 방패와 워커에 맞아 같이 쓰러지고, 아무 이유 없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협상에서 우리가 어찌 ‘돈’ 이야기로 1년을 끌어 올 수 있었겠는가?

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 임시상가와 임대상가, 세입자들의 주거안정과 권리침해를 막을 수 있는 ‘순환식 개발’의 토대가 될 법과 제도의 개선이 우리에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1년을 하루같이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년간 다섯 분을 냉동고에 모셔두면서까지 유족들과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부족하지만 승리할 수 있었다.

▲ 용산에서 열린 마지막 추모미사에 참석해서 초를 봉헌하는 시민들(사진/김용길)
지난 1년간 용산참사는 다섯 유가족들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용산에 쏠려있었고 용산참사 현장과 고인들이 안치되어 있던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이 수십만에 이른다. 지난 1년간 전국 각지에서 날아든 후원금을 비롯하여 쌀, 과일, 라면, 김치 등은 1년 동안 수천명이 함께 먹고도 열두광주리가 남았다.

용산참사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현주소를 알게 해 주었다. 이 나라가 민주화되었고 인권국가가 되었다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깨어나게 해 준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본과 세입자간의 싸움이 아니라, 공권력과 철거민들간의 싸움이 아니라, 집을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건설 자본과 쫓겨나는 이들의 편에 선 양심의 대결, 국민을 힘으로 눌러 통제하고 억압하는 무리한 공권력과 내 삶의 터전을 지키겠다는 정당한 권리, 집회·시위·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운 인권의 대결이었다. 용산 싸움의 승리는 대한민국 재개발 잔혹사를 멈추어야 한다는 많은 이들의 염원이 현실화 된 것이다.

협상과 관련한 모든 약속이 이행되며 유족들과 철거민들, 용산범대위는 남일당과 레아호프를 떠났다. 다들 어서 문제가 해결되어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지만 막상 그 마지막 날에는 모두들 서러움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을 뒤돌아보고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이곳에서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284일간 미사를 봉헌했고 서울시민을 중심으로 100회가 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이 손수 1천끼가 넘는 밥을 지어 함께 먹었고 은박 돗자리 위에 전기장판을 깔고 365일이 넘게 같이 누워 잠을 잤다. 분향소에는 단 한순간도 촛불과 향이 꺼지지 않았고 고인들에 대한 조문이 끊긴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이제 우리가 용산을 떠나는 것은 용산을 잊기 위함이 아니라 용산을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용산참사를 해결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수 많은 과제들을 마주 하러 출발하는 것이다.

요구사항과 관련한 협상은 마무리 되었지만 잠시 미루어 두었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싸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검찰이 고의적으로 은닉했던 수사기록이 공개되어 당시 진압이 무리했고 지휘와 현장 작전 진행에 잘못이 있었음이 경찰 수뇌부의 진술에 의해 확인되었다. 1심 공판에서도 이미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1심 재판부는 다소 감정적인 판결을 하며 중형을 선고했었다.

검찰이 재판부를 기피하는 초유의 사태를 가져온 수사기록의 공개는 그동안 검찰이 경찰을 일방적으로 옹호했던 수사과정의 잘못을 만천하에 밝혀 줄 것이다. 용산참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례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농성 24시간도 안되어 경찰특공대와 크레인이 동원된 강경진압도 이례적이었고, 유족들에게 통보도 없이 바로 신속하게 부검이 이루어진 것도 이례적이었다. 변호인단이 검찰의 수사기록 은닉에 항의하며 사퇴하고 새로 꾸려졌고 피고인들도 재판을 거부했다.

새로운 변호인단과 시작된 공판은 일주일에 두 번씩, 하루 8시간을 넘기며 진행되었다. 검찰이 법원의 수사기록 공개 결정을 ‘위법한 결정’이라고 비난하며 검찰총장이 전면에 나서며 사법부를 공격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정권에서 밝힐 수 없다면 인혁당 사건이나 민족일보 사건처럼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이 사건의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원래 살던 주민의 20%도 정착할 수 없는 재개발, 건설자본과 투기꾼들의 부만 축적시켜주는 뉴타운 정책에 전면 제동을 걸어야한다. 조화로운 개발을 위한 법과 제도의 정착은 물론이고 가난한 사람들과는 함께 살고 싶어하지 않는 시민의식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한다.

세입자들이 이주할 공간을 미리 마련해 두고 재개발에 들어가는 순환식 개발이 정착되어야 한다. 용산참사 이후 국회에 많은 법들이 제도 개선을 이야기하며 발의되었고 서울시도 조례를 개정하며 나름의 노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법안, 그 어느 정책에도 서민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제도는 없다. 재개발로 인한 영업의 손실을 3개월치 보상해 주던 것을 4개월치로 늘려 놓은 것 외에는 오히려 세입자들에게 더 불리하게 개정 된 조항도 있다. 이는 우리에게 재개발과 관련된 법과 제도를 바꾸어 정착시키는 일 역시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용산이 우리에게 준 과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제도의 개선과 정비는 물론이고 표현의 자유, 공권력의 부당한 인권침해에 대응하는 것, 문화예술과 운동이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 진보운동진영이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소통의 토대 마련 등 너무나도 다양하고 중요한 일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연대하고 신뢰하며 함께 했던 매일매일의 정신을 기억하는 일이다. 용산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2010년 2월 1일은 용산참사 발생 377일째일 뿐이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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