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공돌이가 우리신학을 하게 된 내력(5)

공짜로 얻어 쓴 우리신학연구실 사무실은 인천교구 부평4동본당 교육관의 3층 베란다를 막아서 만든 방이었다. 공간은 충분했지만 방이 좁고 길어서 특별 주문 제작한 작은 책상을 나란히 놓고 4명이 한 줄로 앉아 일했다.

여름에는 무척 덥고, 겨울에는 무척 추웠다. 모든 것을 아꼈지만, 그래도 연구실 운영에는 돈이 필요했다. 수익사업으로 대부분의 사제가 강론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점을 생각해 주간(週刊) 강론 참고 자료를 펴내기로 하였다. 이렇게 창간된 게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갈기)이다. 처음에는 2백 부를 인쇄해 인천교구 모든 사제에게 약 80부를 보내고, 나머지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활동 사제들에게 보냈다. 다행히 반응이 좋아서 구독자가 조금씩 늘어났다. 연구실 재정이 안정될 정도의 수익은 아니었지만, 연구실을 널리 알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우리신학연구소 출자회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도 <갈기>를 이미 보고 있거나 알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월급은 나이와 직책에 따라 25~35만 원을 받았는데, 그나마 제때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1990년 결혼한 아내가 초등 교사로서 돈을 벌지 않았다면, 이 같은 조건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이해하고 믿어주는 부모님과 아내 덕분이다. 그 무렵 호인수 신부께서 주도해서 젊은 사제 모임인 인천교구 사제수요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에 나오는 몇몇 젊은 사제의 후원은 늘 아슬아슬했던 연구실 재정에 단비와도 같았다. 우리신학연구소에 기대가 컸던 이 분들은 나중에 각각 따로 두었던 인천과 서울의 연구실을 통합해 둥지를 서울 합정동으로 옮겼을 때 무척 서운해 했다.

연구실 탄생의 배경과 목표였던 <우리들의 성서>도 잘 진행되어서 우리신앙공동체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중광의 주도 아래 공동연구를 통해 입문, 구약, 신약 등 모두 세 권이 나왔다. <우리들의 성서>는 기존 성서모임교재와 달리 1년 동안 입문에서 신약까지 모두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통 1년을 주기로 활동하는 청년 단체의 특성을 반영하였다. 또한 단순한 개인 성찰에 그치지 않고 사회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교재가 나오면서 인천교구는 '청년예수'가 본당 청년회를 중심으로, 서울교구는 '우리신앙공동체'가 본당 청년회와 대학 동아리를 중심으로 성서공동체를 조직했고, 둘째 권 구약과 셋째 권 신약 공부가 끝난 사람 대상으로 심화를 위한 연수를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우리신학연구실을 설립하면서부터 연구소 설립은 과제로 제시되었다. 그러다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동으로 설립한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가 별다른 성과 없이 해체되고 광주대교구가 서울에 가톨릭정의평화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와 우리신학연구실과 가톨릭자료정보센터를 통합한 평신도 신학연구소 설립을 본격 추진하였다. 앞으로 교계 연구소가 계속 설립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그 연구소들의 실무자로 뿔뿔이 흩어져 뒤치다꺼리하느라 평신도 신학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가톨릭자료정보센터는 가톨릭신앙운동연구회 때부터 자료 수집과 정리를 중요하게 여겼던 박준영이 만들어 운영하던 기구였다. 이중광이 자료 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문정현 신부가 컴퓨터를 지원하였다. 연구소 설립이 본격 추진되면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젊은 우리말고도 함세웅 신부, 문규현 신부, 성염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추진위 사무실은 가톨릭정의평화연구소가 있던 연남동의 한 건물에 두었다.

외국 원조에 기대어 만들었다가 별 성과도 없이 해체된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사례는 우리에게 반면교사 구실을 하였다. 외국 원조나 특정 개인에게 의존한 연구소는 오래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 안에서 십시일반 설립 기금을 만들고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하는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였다. 공동체운동 연구 과정에서 알게 된 스페인 몬드라곤 공동체 사례는 이 같은 고민을 가진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몬드라곤 공동체의 창립자 호세 마리아 신부의 시구 ‘우리는 나아가면서 길을 만든다’는 우리 표어처럼 사용되었다. 우리는 지식생산공동체로서의 연구소를 만들기로 하고, 설립 자금을 출자 방식(1구좌 1백만 원)으로 모았다. 우리 자신은 물론 뜻있는 사제, 평신도, 수도회, 단체의 출자로 약 7천만 원을 모았고, 이 돈으로 인천과 서울 연구실 사무실을 빌리고 집기를 마련하였다. 인천 연구실은 새로 지은 송림동본당 신협 건물 3층에, 서울 연구실은 쌍문동의 개인 주택에 자리 잡았다.

어렵게 시작한 우리신학연구소였지만, 모두가 고운 눈길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평신도가 건방지게 무슨 신학이냐? 한참 투신해서 활동해야 할 사람들이 연구소에서 연구나 해서야 되겠느냐? 연구소에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닌데 얼마나 버티겠느냐? 등등. 말 그대로 우리는 나아가면서 길을 만들어야 했다.(계속)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