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 칼럼]

(* 원고 마감을 앞두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마침 어느 수녀님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것도 당신 이름은 숨기고 꼭 내 이름으로 내면 좋겠다면서요. 해서 분부대로 그분의 글을 올립니다.)  

나는 역사학에 관해서는 빵점이다. 국사, 세계사의 재미있는 이야기 몇 가지는 기억해도, 연대를 외우기는커녕 역사적 사건의 맥조차 잡지 못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로 문외한이다. 성서를 봐도 말씀을 곱씹기는 하지만 역사적 흐름은 모른다. 교회 내의 그 중요한 성사에 대해서도 언제 생겼고, 어떤 이유로 변경, 오늘날과 같이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것은 관심 밖인가 보다.

평상시에 존경하는 호인수신부의 글, ‘사제들의 반말 습성’을 보며, 그 원인은 여러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겠지만, 호칭에서 오는 무의식적인 신분의식에서 나온 점을 생각해 보고 싶다. 앞서도 내가 사용했지만 사제의 경우, 유일한 호칭은 ‘신부님’이다. 이것이 과연 합당한 호칭인가?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사제를 신부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神父=신의 아버지? 신적 아버지? 영어로는 아예 Father이다. 왜 아버지인지, 어떻게 아버지인지, 아버지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불문하고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사제서품만 받으면 30대에도,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의 아버지가 된다. 여기서 파생되는 것이 반말 습성은 아닐까? 정말 모든 사제는 다 우리의 영적 아버지인가?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분 뿐!’이라고 못 박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형제자매이다’라고 말씀하신 (마태 12,50. 23,8) 예수님도 생전에는 ‘선생님’이라 불리었다. 사제는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형제자매 중 한 사람이다.

▲ 사진/한상봉

성서에는 ‘목자와 양떼의 비유’가 많다. 누가 목자이고, 누가 양떼인가? 에제키엘 34장을 보면 확실하게 구분이 된다. 주 하느님이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양떼요, 하느님 목장의 것이다(에제 34,31). 그러면 성직자는 누구인가? 하느님께서 양떼 가운데서 당신의 양떼를 먹여주고, 지켜주고, 잘 돌보는 ‘좋은 목자’되라고 손수 뽑아 세우신 일꾼, 목자이다(요한 15,16; 21,15-17). 그들은 양들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에게 해고당할 수도 있는 일꾼이다(에제 34,3;8,23).

요한복음에 따르면 목자는 하느님께 고용된 삯꾼이다. 그가 진정으로 양떼를 잘 돌볼 때(에제 34,13-16; 마태 9,13) 하느님께서 친히 품어주실 것이다. ‘너는 내가 선택한, 내 맘에 드는 목자!’ 그리고 양들도 말할 것이다. ‘당신은 좋은 목자!’ 목자는 스스로 하느님의 대리자라고 말할 자격조차 없는 신분이다.

목자가 자기 신분을 망각하여 주인 행세를 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내치신다(에제 34, 10). 눈먼 인도자이기 때문이다(마태 15, 13). 목자가 양들의 주인이면 그 누구도 그의 양들을 ‘내놓으라’고 요구(에제 34,10)할 수 없고, 누군가에게 내침을 당할 이유도 없다. 사제는 하느님께 선택된 삯꾼이다. 삯꾼이기에 더더욱 그들은 깨어 기도하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목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양떼는 그 어려운 직무를 수행하는 목자들을 존경하고 그 목소리를 따르면서 직책의 다름과 상관없이 하나의 ‘하느님 생명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머리조차 둘 곳 없고,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스승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사제들의 몫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느님 자신’이다(민수 18, 20). 할 일을 다 한 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 17,10)라고 고백해야 할 목자!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마태 18,18)’ 이 땅의 수많은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가지 예로, 근 1년 가까이 시간을 끌어온 용산참사만 해도 그렇다. 355일, 진실에 눈감은 국가권력 아래 피눈물 흘리던 유가족들, 그분들과 유사한 처지를 당했거나,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철거민들과 그 대책위원들! 그들은 약하고, 아프고, 부러진 양들이었다. 지난 1월 6일, 284번째의 추모미사를 마지막으로 문닫은 남일당 성당.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양은 원기를 북돋아 주던(에제 34,16) 하느님의 작은 목자들과 사제들을 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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