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학부과정에서 역사를 공부했지만, 4년간의 공부란 게 역사를 공부했다고 말하기엔 함량미달의 시간이고, 그 시간 속에서나마 내용을 갖추고자 애를 쓴 기억도 별로 없었다. 사학과를 선택한 것조차도 별다른 뜻이 없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1980년대식의 거대담론으로 정신없는 머리속에서 문학에 대한 개념이, 불투명한 감상에 사리사욕적인 연애를 포장하는 기술과 등가로 다가왔다. 무지에서 형성된 이 경멸감은 이후 톡톡히 댓가를 지불해야했다.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기도 한, 스페인 내전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벌어진 공화주의와 극우 국가주의-프랑코총통이 중심이 된 파시즘-의 싸움이었다. 각국의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국제여단을 꾸려 공화주의자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극우파 국가주의 쪽에는 가톨릭교회와 군부세력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 내전은 전 후, 양측 합해 100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내전은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고, 프랑코 장군의 기나긴 독재가 이어졌다. 1975년 프랑코가 죽자, 스페인 정치권은 이른바 ‘침묵 합의’라는 것을 도출해 냈다. 내전 당시의 잔학상은 물론 사후처리 문제 논의도 금기시했다. 이런 의도적인 역사의 망각을 통해 스페인은 분열의 위기를 넘기고 현대적인 민주국가로 탈바꿈한다.

70년이란 세월이 흘러, 2007년 10월 7일 스페인 집권 사회당은 군소정당과 함께 내전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법을 제정한다. 10월 31일 의회를 통과한 법안의 명칭은 ‘역사기억법"이다. 그러나 보수 야당인 인민당은 “사파테로 총리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여론도 갈라져, 법 제정에 찬성하는 여론은 50%에 못 미쳤고, 30% 정도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기 싫다고 했다. 28일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내란 중 희생된 가톨릭교인 498명을 시복(諡福)해 스페인 정부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스페인 좌파는 1939년 내전 패배 이후, 기나긴 굴욕을 겪었다. 우파 희생자들은 가톨릭교회에 의해 차례로 순교자로 인정받고 안장됐지만, 좌파 희생자들은 암매장된 채 방치됐다. 그리고 드디어 정권을 잡았다(2004년). 따라서 현 집권 여당이 말하는 명예회복이란 주로 좌파 희생자를 염두에 둔 것이다(동아일보 2007년 11월 1일 참조)

우리나라 과거사진상위원회 등으로 불리는 단체들 활동과 비슷한 작업이 먼 나라 스페인에서도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가톨릭의 종주국이라 교황청의 에너지가 가세하여 한 나라에서 두 집 살림을 하는 형국이다.

도꾜전범재판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들이 패전국 일본의 전쟁책임자들을 재판한 법정이다. 극동군사재판이라고도 불린 이 법정에서, 일본의 지도자 14명이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들 중, 도죠 히데끼는 관동군 출신으로, 전쟁 당시 수상을 지낸 사람으로 군국일본 전쟁범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는 終戰부터 일본정부로부터도 소외되어, 그의 가문 전체가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도죠"의 성을 가진 학생이 전학을 가면, 담임을 맡으려는 교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에 반영된 그의 의지가 일반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다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이러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손녀가 할아버지를 옹호 발언하는 게 미디어로 전해지고, 그의 부인이 남긴 평에 의하면, 몹시도 가정적이었고 섬세한 사람이었다는 기록, 그리고 도죠 자신이 지시하여 쓰여진 자기변호에 가까운 자서전이 있는데, 이것들을 근거로 그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일본에서 일어나는 모양이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고가 있었던 걸로 보면, 일본무인의 전형적 스타일의 소유자로 보인다. 한 인간이 지니는 다양한 면모와, 그의 인생의 가치는 사람이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빼어난 역사가도 어느 인물의 진정한 모습을 다 드러내긴 어려울 것이다.

극동군사재판, 맥아더 사령관이 총지휘하는 법정에서 도죠 히데끼는 이렇게 자신을 변호했다. "태평양전쟁의 직접 원인은, 세계경제의 구조적 변화에 의해 일어난 세계공황에 있다. 이런 이유로 자원의 강국인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측이, 자원을 갖지 못한 일본을 무력포위하고 경제봉쇄를 저지르며 일본자산의 동결, 물자금수조치 등에 의해 배제시키려 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일본이 무력으로 자원획득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꾜재판은 부당하고 한계가 있으며 파행으로 나가고 있다.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개전책임을 묻는다 해도, 전쟁의 본질적인 원인규명에는 이르지 못한다."라고.

미국은, 만주 곳곳에서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731부대장을 지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일본군 중장을 살려주어, 실험자료들을 넘겨 받아 미국의 제약산업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어떻든 악명 높은 731 부대장이 1959년 67세에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고 하니, 전범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중국대표나 소련대표들도 도꾜재판이 미국의 일방적인 이득을 위해 이끌어 간다며 항의를 했던 기록들도 남아있다.

도죠의 법정진술처럼, 태평양 전쟁은 복잡한 이익집단들과 당대 역사적 한계와 돌파력 등 여러 원인들이 얽히고 설켜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도죠 히데끼는 , 그의 지휘 하에 확장된 이 전쟁에서 죽어간, 무수한 생명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잉그릿드 버그만이 연기한 마리아는, 내전의 와중에서 여성으로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국제여단 소속(?)의 미국청년 로버트 조단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마리아의 연인이었던 이 청년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

지금도 태평양전쟁 당시 만주, 중국본토, 남양군도로 끌려가 군위안부 생활을 했던 여성들은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수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온 경우도 그들은 가정에서 좇겨나거나, 아예 가정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그 분들이 80 노구(老軀)의 할머니가 되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집회를 연다. 늙은 그 분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다. 꽃봉오리 같은 소녀시절에 낯선 타국에서도 흘렸을 눈물이 겹쳐 다가왔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사람들 사이로, 시간이 흘러 역사가 되어간다.

역사를 배우며,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머리속에 펼치며 역사의 엄정성을 신뢰했다.

역사가로 저명하신 한 스승의 역사이론은, "역사의 발전은 역사가 흐르면서 점점 지배계층이 확대되어가는 것으로 설명되어진다." 라는 간결하면서도 희망에 찬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의 대통령 선거의 장과 삼성의 전방위 로비는 역사의 장에서 어떻게 평가될까? 현재로선 "묵묵부답"이 이들 공통의 반응이라, 그들의 오만한 여유가 더욱 못마땅하다. 밥 많이 먹고 목소리 큰 사람치고 악인은 없다던 옛말이 그리워진다.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간 성직자와 신자들은 시복시성의 은혜를 받았는데, 같은 전장에서 죽어간 좌파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연미사라도 올려주었을까...?

영원과 순간은 쌍생아처럼 마음 안에서 늘 함께 한다, 해와 달처럼. 시간 속에 새겨진 사람들의 고단한 숨결은 영원과 순간을 타고 역사의 완성인 하느님의 시간 속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규원 200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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